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Elizabeth Flynn
미국 미국 1890–1964 ○ 자연사

"이스트사이드의 잔 다르크": IWW 반항소녀에서 공산당 첫 여성 의장까지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공공연히 공산주의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범죄 음모단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당면한 요구와 열망에 헌신하는 33년 된 노동계급 정당입니다." — 스미스법 재판 최후 진술, 1952년 4월 24일

미국 노동운동가·공산주의자. 15세에 IWW '반항소녀'로 불리며 로렌스 파업을 이끌고 ACLU 공동 창립에 참여했다. 1961년 CPUSA 첫 여성 의장이 되었고, 사후 모스크바 붉은광장 국장이 거행되었다.

경력 연표

IWW '반항소녀'의 탄생 — 언론자유 투쟁과 초기 급진화

플린은 1906년 15세의 나이로 할렘사회주의클럽에서 첫 연설 「사회주의가 여성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행한 직후 체포되면서 공적 삶에 들어섰다. 그녀의 부모는 아일랜드 독립투쟁 이야기와 사회주의 사상을 어린 플린에게 심어주었고, 브롱크스 모리스 고등학교를 중퇴(혹은 정치활동으로 퇴학)한 뒤 곧바로 IWW 전임 조직가의 길로 들어섰다. 테오도어 드라이저는 이 신출내기 10대 선동가에게 '이스트사이드의 잔 다르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플린의 전투적 면모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1909~1910년 몬태나 주 미줄라와 워싱턴 주 스포케인에서 벌어진 IWW 언론자유 투쟁이었다. 미줄라에서는 시 당국이 거리 연설을 금지하자 IWW 조직가들이 연쇄적으로 체포되어 감옥을 가득 채우는 '감옥 채우기' 전술을 구사했고, 플린이 현장을 지휘했다. 1909년 10월 미줄라 시가 결국 굴복해 연설의 자유를 인정했다.

곧바로 스포케인으로 이동한 플린은 더욱 격렬한 투쟁에 뛰어들었다. 고용 알선 사기로 이주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현지 고용업자들을 비판하는 IWW 연설을 금지한 시에 맞서, 수백 명의 워블리들이 스포케인 감옥으로 몰려들었다. 플린 자신도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그녀는 경찰이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감옥을 사실상 매춘업소처럼 운영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 폭로는 지역 신문과 IWW 기관지 『인더스트리얼 워커』에 보도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고, 스포케인 시는 IWW 신문을 전량 압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중의 분노에 직면한 시 당국은 여성 교도관을 고용하고, 마침내 1910년 3월 4일 IWW의 거리 연설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수감자를 석방했다. 당시 플린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미줄라와 스포케인의 승리는 IWW 전국적 명성의 초석이 되었고, 불과 2년 후 그녀가 로렌스 파업에서 '파업의 혼'으로 불리며 전국적 인물로 도약할 기반을 닦았다. 조 힐이 1915년 플린에게 헌정한 노래 「The Rebel Girl」의 모티프 역시 이 시기 거리 투쟁에서 형성된 그녀의 이미지(젊고, 아름답고, 두려움 없고, 노동자를 위해 감옥도 마다하지 않는 선동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렌스 '빵과 장미' 파업, 1912년

플린이 전국적 명성을 얻은 결정적 계기는 1912년 1월 매사추세츠주 로렌스 방직 파업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삭감에 항의해 2만 명 이상의 이민 노동자들이 일어났고, IWW는 플린과 빌 헤이우드를 파견해 파업 지휘를 맡겼다. 플린의 가장 빛나는 공헌은 '어린이 탈출'(Children's Exodus)이었다. 굶주리는 파업 가족을 돕기 위해 수백 명의 아이들을 뉴욕, 필라델피아, 버몬트의 동조자 가정으로 보내 임시 위탁한 것이다. 2월 10일 119명의 아이들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5,000명의 환영 인파가 역을 메웠고, 이 장면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며 여론을 파업자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2월 24일 100명의 추가 아이들이 필라델피아로 떠나려 하자 경찰과 민병대가 기차역에서 어머니들과 아이들을 곤봉으로 때려 저지했고, 한 임산부는 유산했다. 이 폭력 장면은 의회 청문회를 촉발했고, 공장의 충격적인 노동조건이 전국에 폭로되었다. 3월 12일 사측은 임금 15% 인상과 차별 금지 등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다. 파업 기간 내내 플린은 연설과 구호품 배급, 피켓 조직을 진두지휘했으며, 당시 21세에 불과했지만 종군기자 메리 히튼 보스는 그녀를 '파업의 혼(spirit of the strike)'이라 불렀다. 이 경험은 조 힐이 플린에게 헌정한 노래 「The Rebel Girl」의 배경이 되었고,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이후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호로 정착했다.

ACLU 공동 창립, 사코-반제티 구명운동, 그리고 공산당원 추방

1920년 플린은 로저 볼드윈, 크리스털 이스트먼 등과 함께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공동 창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간첩법으로 기소된 노동운동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녀가 1918년 설립한 노동자방위연합(WDU)의 경험이 ACLU의 토대가 되었다. 1920년대 플린은 ACLU 내에서 사코와 반제티 구명운동을 주도했다.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탈리아계 아나키스트 이민 노동자였으나, 재판은 반이민·반급진 편견으로 얼룩져 있었다. 플린은 전국적인 연설 순회와 모금, 출판물 배포로 여론을 환기시켰다. 1927년 8월 두 사람이 처형되자, 이 사건은 미국 사법사의 대표적 오심으로 남았고 플린에게는 법과 계급의 관계를 직시하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1939년, 나치-소련 불가침조약 체결 후 ACLU 이사회는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동등하게 규정하며 두 이념의 당원이 ACLU 직책을 맡을 수 없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시 이사회 내 유일한 공개 공산당원이었던 플린은 사실상 표적이었다. ACLU는 공식 '재판' 절차를 거쳐 1940년 플린을 이사회에서 축출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평생 싸워온 인물이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공동 창립한 단체에서 쫓겨난 이 사건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 이미 미국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반공주의가 시민적 자유의 원칙을 잠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1976년 ACLU는 사후에 이 결정을 번복했다.

스미스법 재판, 앨더슨 수감, 그리고 공산당 의장으로

1951년 6월, 플린은 스미스법 위반으로 체포된 2차 기소 대상자 17명 중 한 명이었다. 1949년 1차 '폴리 스퀘어 재판'에서 CPUSA 지도부 11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법무부는 전국적으로 당 간부들을 추가 기소했다. 9개월간 이어진 재판에서 플린은 동료 피고인 페티스 페리와 함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자신을 변호했다. 1952년 4월 24일 배심원단 앞에서 행한 최후 진술은 미국 정치재판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공공연히 공산주의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범죄 음모단이 아니라, 33년 된 노동계급 정당입니다." 플린은 자신의 이력과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증언으로 풀어내며, 폭력적 정부 전복을 옹호한 적이 없음을 논증했다. 그럼에도 배심원단은 유죄를 평결했고, 판사는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 앨더슨 연방여성교도소에서 28개월을 복역하는 동안, 플린은 동료 수감자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 결과물이 1963년 출간된 『앨더슨 이야기: 어느 정치범의 삶』(The Alderson Story: My Life as a Political Prisoner)이다. 이 책은 교도소 내 인종 차별, 과밀 수용, 레즈비언 관계, 단조로운 노동을 솔직하게 묘사하면서도 동료 수감자들과의 연대와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는 모습을 담아냈다. 출소 후 플린은 곧바로 정치활동에 복귀했다.

1961년 1월, 플린은 유진 데니스의 뒤를 이어 CPUSA 전국위원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미국 공산당 역사상 첫 여성 의장이었다. 이듬해 국무부는 매캐런법에 따라 그녀의 여권을 취소했고, 플린은 허버트 앱테커와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1964년 6월, 연방대법원은 '앱테커 대 국무장관' 판결에서 여권 취소가 적법절차를 위반했다며 플린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 승소 3개월 후, 플린은 소련 방문 중 모스크바에서 74세로 사망했다. 스미스법 재판에서 대법원 승소까지. 플린의 말년은 냉전기 미국에서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지킨 급진주의자의 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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