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다른 이름: 최창석 · 최창순 · 최동우 · 이건우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8월 종파사건 이후의 처분과 최종 숙청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직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이 처분은 곧바로 번복되었다. 1956년 9월 23일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재심하여 최창익과 박창옥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복귀시키고, 윤공흠·서휘·이필규의 당원 신분을 회복시켰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사국이 작성한 자료에는 이 재심이 당의 통일을 위한 활동에서 레닌주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중앙위원회의 노력으로 설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예는 오래가지 않았다. 1957년 5월 소련 측 보고서에는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이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에서 제명되었다는 내용이 다시 정리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1958년 2월 10일자 같은 계열의 문서에는 1957년 9월 이후 최창익이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1957년 9월 1일 제명과 동시에 숙청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사형선고까지 내려졌으나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 등의 반대로 집행되지 않았고, 이후 문화선전성 문화유물보존관리국장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투옥되어 옥사했다고 이 백과는 서술한다. 사망 시점은 1957년 10월 6일로 제시되지만,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으로 적어 만년을 한 해 더 늘리고 있으며, 소련 문서 계열에는 사망 연도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의 최후는 형장이 아니라 수감 상태에서의 죽음으로 전해지며, 정확한 시점과 경위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이 사태를 개인 권력의 시험대로 삼았다. 1956년 9월 18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계열 인사는 소련 외무성 인사에게 사건의 주동자가 최창익이라고 주장하며 사건을 설명했고, 소련은 계속 그를 옹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로동당 내부에서는 김일성 계열이 중공업 우선 노선에 반대한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을 반당종파분자로 몰아내는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20차 당 대회 이후 제기된 집단지도체제 요구는 조선에서 제도화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