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9–1939 산업·생산 운영 · 소련 · 중공업 · 군수공업
경력 연표
- 1929–1939키로프 공장 기술자 → 주임 야금기사
- 1939–1947우랄마시 공장장
- 1947–1953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제4총국장
- 1955–1974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
관련 역사 사건
우랄마시 1941~1942년: 단품 생산 공장의 전차 양산 전환
1939년 11월 무즈루코프가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될 무렵, 이 공장은 이미 여덟 번째 지도자를 맞고 있었다. 그는 먼저 야금 부문의 병목을 풀고 기술 서비스를 재편했으며, 다루기 어려운 대형 작업장들을 나누었다. 1940년 새해부터 공장은 계획을 100퍼센트 채우는 길에 들어섰고, 1940년 중반에는 처음으로 국방 생산에 관한 국가 계획을 완수했다.
전쟁은 이 공장의 성격 자체를 바꿔 놓았다. 1941년 6월 22일 우랄마시는 중(重)전차용 장갑 차체와 포탑을 생산해 협력 관계로 첼랴빈스크 트랙터 공장에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 공장 역시 전차 생산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미 전차산업 인민위원에 임명된 V. A. 말리셰프가 이끄는 정부 위원회가 6월 24일 우랄마시에 도착해 전환의 방향을 정했다.
전환은 더뎠다. 소련 전차산업 전체가 동부로 옮겨지는 가운데 우랄마시에는 후송된 공장 다섯 곳이 얹혔고, 단품 생산에 맞춰진 공장에서 전차의 흐름 생산을 세워야 했다. 1941년 9월 초, 공장장은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모스크바에 보고해야 했다. 9월 17일 늦은 저녁에는 스탈린의 전보가 이어졌다. 며칠 뒤면 “조국의 명예와 이익을 저버린 범법자로” 취급해 “때려부수겠다”는 것이었다. 무즈루코프는 동요하지 않고 재편 작업을 밀어붙였다.
병목은 소재와 공정이었다. 우랄마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차 포탑을 주조한 뒤 스탬핑 방식으로 옮겨 갔고, 아카데미키 파톤의 연구소와 공동 작업으로 차체 자동 용접을 도입했으며, 남부 지역에서 아세틸렌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피롤리즈 가스를 대신 썼다. 1942년 7월에는 스베르들롭스크의 오르조니키제 제37공장이 두 지부 형태로 우랄마시에 합병되어, 576개 내부 부품을 익혀야 하는 T-34 생산이 추가되었다. 세 달 뒤에는 전차가 생산 라인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1942년 5월에는 이미 첫 37대분 T-34 차체를 협력 공장들에 넘겼다. 이 시기의 생산은 노동자들의 자기희생에만 기대지 않았다. 무즈루코프는 관리들이 직접 책임지는 전차를 정해 조립에 참여하고 합격 검사를 통과하게 했으며, 현장의 제안을 받아 도면과 공정을 고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