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레 피다

ኃይሌ ፊዳ
전에티오피아 사회주의 운동 마르크스-레닌주의 에티오피아 오로모 1939–1979 1977년 체포 후 소식 단절, 사망설

에티오피아 마르크스주의 운동가, 메이손 지도자

1977년 8월 체포와 그 뒤의 소식 단절은 더르그의 탄압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을 넘어 자기 협력자였던 메이손 지도부로 돌아선 전환점이었다. 1979년 무렵의 사망은 여러 사료가 전하지만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으로, 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메이손)의 지도자이자 의장이었다. 오로미아 월레가 아르조 출신으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후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었다. 1975년 12월 더르그가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을 맡아 1976년 4월 20일 발표된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했다. 1977년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되었으며, 수개월의 구금 끝에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1979년 무렵 사망했다는 서술은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라틴 문자 쿠베 철자법의 선구자로 ‘쿠베의 아버지’라 불린다.

다른 이름: 하일레 피다 쿠마 · 메이손 의장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오로모어 연구와 쿠베 철자법, 그 사후의 평가

피다는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아파안 오로모 표기법 문제에 몰두했다. 1968년 그를 중심으로 유럽의 오로모 학생들이 언어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습모임을 조직했고, 이 모임은 1972년 보고서를 내고 아파안 오로모 표기로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 이듬해인 1973년 그는 이 모임과 함께 쿠베 철자법을 쓴 오로모어 문법서 『히르마타 둡비 아파안 오로모』를 파리에서 펴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뒤에도 오로모어 작업을 이어갔고, 구금되기 전에 오로모어 사전 원고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원고는 남아 있지 않다.

쿠베는 1970년대 감옥과 분쟁 지역, 망명지와 학계에서 오로모 지식인들이 작업을 이어간 끝에 1991년 피니피네에서 열린 학자들의 모임에서 아파안 오로모의 공식 문자로 채택되었다. 2020년에는 월레가 대학이 아파안 오로모 아카데미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2025년 오로모 연구협회도 그의 업적을 사후에 기렸다. 다만 쿠베의 정치적 효과를 두고는 이견도 있었다. 고(故) 게타체 하일레 같은 비판자는 쿠베가 ‘해방의 이름으로 민족 분열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망은 1979년 무렵으로 전해지지만 확정된 날짜와 경위는 없으며, 언어 작업을 포함한 미완의 저작들도 그와 함께 끊겼다는 점에서 이 유산은 오늘도 논쟁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