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칼 바우만
주요 활동과 소속
- 1920–1923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29.04–1930.07
1930.07 미재선 · 1937년 처형
관련 역사 사건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1931–1934
1931년 4월 바우만은 모스크바 당조직에서 중앙아시아국(스레드아즈뷰로)으로 옮겨 1934년 10월까지 제1서기로 이 기구를 이끌었다. 1922년 5월에 설치되어 1934년 10월 2일 해체된 중앙아시아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중앙위원회를 대표하는 최고 기관으로서, 1924년 경계 획정 이후 우즈베크·투르크멘·타지크·키르기스(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당과 국가 건설을 지도했다. 관할 범위는 토지·용수 국유화, 집단화, 반종교 운동, 문화혁명에 걸쳐 있었다. 바우만은 1932년까지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자리도 유지했다(서기직 종료를 1932년으로 적는 자료와 1934년으로 적는 자료가 갈린다). 이 직위는 앞선 모스크바 시기의 전면 집단화 노선을 대규모로, 그리고 당과 국가 권력의 중심에서 적용할 기회였다.
중앙아시아국의 서기들은 모스크바에 책임을 졌다. 바우만은 이 기구의 주인이었으나, 이제 중앙위원회 간부들이 전임 책임자로서 그의 실적을 평가했고, 그는 1934년 모스크바로 불려 가 중앙위원회 부서들을 맡았다. 연구서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집단화를 밀어붙인 유달리 열성적인 주창자였던 바우만이 1929~1930년 운동의 방식을 중앙아시아에 들여왔다는 데 일치한다. 집단화와 반종교 운동은 카자흐인을 비롯한 유목·목축 주민을 짓눌렀고, 뒤이어 기근과 가축의 대량 손실이 일어났다. 여기 제시된 자료는 그가 이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내린 결정을 기록하지 않으므로, 중앙아시아 시기는 개인의 발의라기보다 1930~1933년 소련 기근과 농촌 계급전쟁의 일부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