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 삼판

ខៀវ សំផន

민주캄푸치아 국가원수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프랑스 유학과 좌파 지식인 네트워크 (1949~1959)

키우 삼판은 1931년 7월 27일 스바이리엥주 룸돌현에서 프랑스 보호령 정부 판사였던 키우 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부패 혐의로 처벌을 받은 뒤 가세가 기울어 캄퐁참주에서 어머니가 과일과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렸고,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리시 시소와(Lycée Sisowath)에 진학해 1951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한 뒤 프놈펜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 살로트 사르(폴 포트)와 함께 공부했다.

1953년 정부 장학금을 받아 법학을 계속하려 프랑스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이엥 사리, 이엥 티릿, 후 윤, 손 센 등이 속한 마르크스 서클에 참여했다. 1955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고, 1956~1959년에는 파리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크메르 학생연합(Union des Étudiants Khmers) 의장과 마르크스 서클 지도자를 맡았다. 이 시기 파리의 좌파 크메르 지식인 모임은 훗날 크메르루주로 발전하는 좌익 혁명 운동의 맹아가 되었다. 그는 크메르 학생회(KSA) 창립자 중 한 명이었고 1956년 프랑스 당국이 이 단체를 해산하자 크메르 학생연합을 새로 세웠다. 1959년 박사논문 《캄보디아의 경제와 산업발전》에서 민족적 자립을 주장하며 제3세계 빈곤의 원인을 선진 산업국에 돌리는 종속이론에 가까운 입장을 폈다.

1959년 박사 학위를 가지고 귀국한 그는 프놈펜 대학 법학부 교수로 자리 잡고 프랑스어 좌파 간행물 《옵세르바퇴르(L'Observateur)》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정부의 적대적 시선을 받았고 이듬해 금지되었으며, 경찰이 그를 공개적으로 구타하고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어 모욕했다. 그럼에도 1960년 체포·구금되었고, 1962년에는 시아누크의 상쾽(Sangkum) 소속으로 칸달주 사앙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상무장관에 임명되었다. 1963년 3월 시아누크가 그를 34명의 ‘좌파’ 명단에 올리면서 장관직을 잃었지만 의석은 유지했고, 1966년 재선되었다. 1967년 4월 사믈라우 농민 봉기를 선동했다는 시아누크의 고발로 프놈펜을 떠나 타 목의 보호 아래 숨었고, 1967~1970년에는 캄퐁스프, 캄퐁치낭, 타케오주를 전전하며 지하 캄푸치아공산당 조직망의 지원을 받았다. 1969년 공식적으로 당에 입당해 캄퐁스프의 타 목 본부에서 함께 지냈다.

이 시기의 행적은 그를 단순한 정권의 얼굴이 아니라 좌익 지식인에서 무장 투쟁 조직의 지도부로 이동해 간 인물로 보여 준다. 프랑스에서 형성된 조직 경험과 이론적 배경, 그리고 상쾽 정부 안팎에서 겪은 정치적 좌절이 이후 크메르루주 합류의 조건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