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벨루히오티스

Άρης Βελουχιώτης
그리스 인민해방군 공산주의 그리스 그리스계 1905–1945 ✕ 자살

점령에 맞선 민중전쟁의 조직가

1942년 도므니스타에서 그는 소수의 산악 유격대를 이끌고 ELAS의 출현을 선언했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 · 타나시스 클라라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4~1945년 종전 국면: 5/42 연대 해산과 바르키자 이후의 파멸

바르키자 협정이 체결되자 벨루히오티스는 사라피스와 함께 ELAS의 전면 해산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곧 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이를 유격대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3월 24일에는 바르키자 노선의 "계몽"이 "문자 그대로 우스꽝스럽다"라고 당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냈다. 그는 1945년 3월 중앙 그리스 산악지대로 돌아가 국가독립전선(MEA)과 새 ELAS를 세우고 영국군과 새 정부, 농촌을 휩쓴 준군사 조직에 맞선 무장투쟁의 재개를 선언했다. 그의 측근들과 ELAS 카페타니오스들(펠로피다스, 타노스, 흐리시오티스, 네스토라스 등), 그리고 마브로스쿠피데스 일부가 그와 합류했다.

당 지도부는 그를 배신자이자 "의심스러운 모험주의 요소"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당 기관지 《리조스파스티스》는 그의 사망 당일인 1945년 6월 15일 중앙위원회 결정을 실어 "투초디오크적이고 의심스러운 행동"이 오직 적에게 이롭다고 비난했다. 추격이 시작될 무렵 약 80명이던 그의 부대는 아그라파 산악지대에서 포위될 때 35명으로 줄어 있었다. 정부 측 병력과 영국군이 함께 추격했고, 그는 알바니아로 나가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스 육군참모본부 기록에 따르면 1945년 6월 15일 저녁 무렵 아헬로오스 강변 메순다의 파구 협곡에서 부대가 이중으로 포위된 끝에 벨루히오티스는 부하였다. 사망 원인은 확정되지 않았다. 자살이라는 것이 초기부터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이고 목격자 진술도 이를 뒷받침하지만, 추격 부대의 총격으로 죽었다는 주장과 체포 뒤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그리스어 위키 정보상자와 다수 매체가 사망일을 6월 16일로 적어, 서술 자료 자체도 6월 15일 저녁과 그 이튿날 아침 두 설을 병기한다. 시신과 부관 자벨라스의 시신은 참수되어 트리칼라 광장에 내걸렸고, 영국 하원에서 항의가 나오자 "고대 그리스의 전쟁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후 평가는 오랫동안 당의 결정에 묶여 있었다. KKE는 2011년 7월 전국대표자회의에서 바르키자 협정에 대한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이유로 정치적 복권을 결정했으나, 당 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당원 자격은 되돌리지 않았다. 2018년 6월 전국대표자회의는 전시 당 지도부의 집단적 기능이 불충분했고 바르키자 협정 서명과 그에 대한 대응이 그 결과였다고 평가하며 당원 자격까지 사후 회복시켰다. 이 결정은 1988년 이후 KKE 공식 문건에 이미 나타난 지도부 기능에 대한 비판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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