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
그리스를 해방시킨 저항운동은 왜 영국군과 아테네에서 싸우게 되었는가?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은 1941년 추축국 점령에서 시작되어 1945년 바르키자 협정으로 이어진 저항과 권력투쟁이다.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의 점령, 기근과 협력정권에 맞서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EAM)과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 농촌과 도시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할 때 EAM은 전국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영국은 왕정과 비EAM 정부를 지키려 했고 소련도 그리스의 영국 영향권을 사실상 인정했다. 12월 1일 로널드 스코비가 저항군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EAM 장관들이 사임했고, 12월 3일 아테네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하면서 영국군과 정부군, ELAS 사이의 37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증원과 화력 앞에 EAM은 후퇴했고, 1945년 2월 12일 바르키자 협정에서 ELAS 해산과 무장해제를 받아들였다.
독재 아래에서 맞은 전쟁
1940년 10월 28일의 침공은 민주국가의 평온을 깨뜨린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스 왕국은 이미 정치가 막힌 채 전쟁을 맞고 있었다. 1935년 왕정이 복귀한 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가 의회를 되살렸지만,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 공화파의 대립은 안정된 다수를 만들지 못했다. 1936년 4월 총선에서 공산당(KKE) 의원 15명이 143명의 왕당파와 142명의 자유주의자·농민파·공화파 사이에서 사실상 캐스팅보트를 쥔 것도 이 교착을 보여준다. 5월에는 북부 담배농민과 노동자들의 파업이 번졌다.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총리는 이를 질서 붕괴의 증거로 제시했고, 8월 4일 국왕의 승인을 받아 헌법 조항과 의회를 중지했다. 이른바 8월 4일 체제는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언론을 검열했으며, KKE 조직과 지도자들을 체포·고문·유배로 해체하려 했다. 공안장관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는 가짜 공산당과 가짜 기관지까지 만들어 지하 당을 혼란시키려 했다. 체제의 지지자들은 이를 의회 분열과 사회불안을 끝내고 농민과 노동자를 하나의 국민국가로 묶는 ‘새 국가’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조직과 공개 정치의 말살이었다. 그래서 1940년의 저항은 무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점령이 시작되었을 때 KKE의 잔존자들은 합법 정당의 기반이나 의회 통로가 아니라 감옥, 유배지, 비밀 연락망에서 출발해야 했다. 대외적으로 메탁사스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과 규율을 일부 빌렸지만 추축국에 가입하지 않았고, 국왕과 함께 전통적인 영국 연계를 유지하려 했다. 이 모순, 국내에서는 반공 독재이고 국제적으로는 영국 쪽 중립국이라는 위치가 훗날 해방 뒤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충돌의 출발점이 되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전쟁, 감당할 수 없는 두 전선
1940년 가을 그리스의 선택은 파시즘과 민주주의 중 하나를 자유롭게 고르는 선택이 아니었다. 1936년 8월 4일 체제는 의회를 닫고 공산주의자와 노동운동을 탄압한 독재였지만,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정부는 이탈리아의 발칸 팽창을 국가 주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보았다. 이탈리아는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병합한 뒤 그리스 국경에 군대를 모았고, 1940년 8월 15일에는 순양함 엘리를 침몰시켰다. 그리스 정부는 가해자를 공개 지목하지 않았지만, 침공이 오리라는 사실은 숨겨지지 않았다. 6월 11일 아테네 주재 미국 공사관이 남긴 외교전보에도 메탁사스가 공격받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저항하겠다”고 재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민주적 정권의 결단이 아니라 독재국가가 제국주의적 강압에 맞서 택한 방어전이었다.
10월 28일 새벽, 베니토 무솔리니의 명령을 받은 이탈리아 대사 에마누엘레 그라치는 알바니아에서 병력을 들여보내고 전략 요충지와 통신시설 점령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내놓았다. 메탁사스가 남긴 답변은 훗날 민족적 구호로 압축된 “아니오”였지만, 핵심은 말의 극적 효과가 아니라 거부가 곧 전투를 뜻한다는 계산이었다. 항복하면 이탈리아의 보호국이 되고, 거부하면 훨씬 큰 군대와 싸워야 했다. 메탁사스는 영국과의 전통적 연계를 활용해 물자와 해상 방어를 기대하면서도, 영국군의 대규모 상륙이 독일을 자극할까 경계했다. 그리스군은 산악 국경에서 방어선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반격해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 안쪽으로 밀어냈다. 이 승리는 왕정과 독재정권이 주장한 국가 방어의 정당성을 높였지만, 병력과 탄약을 서부 전선에 묶어 두는 대가를 치렀다.
그 결과 독일의 개입은 이탈리아 동맹국을 구하는 일인 동시에 영국이 발칸에 발판을 얻는 것을 막는 일이 되었다. 1941년 1월 메탁사스가 죽은 뒤 정부는 영국 원정군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병력 대부분이 알바니아 전선에 있었고 북동부의 메탁사스선은 정원보다 훨씬 적은 병력으로 지켜졌다. 4월 6일 독일군은 불가리아를 거쳐 침공했고, 요새선의 저항을 우회해 남하했다. 그리스군은 독일군에 포위될 위험 속에서 후퇴했고 4월 20일 항복했다. 이 패배는 1940년의 저항이 무의미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탈리아를 물리친 국가 방어가 독일의 압도적 작전과 영국의 제한된 지원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점령 뒤 저항이 성장한 물질적 조건은 바로 이 모순, 침략자를 물리칠 의지는 있었으나 그 의지를 지켜 줄 국가와 군사적 자원이 부족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깃발을 내린 밤, 병합에 맞선 봉기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온 것은 깃발 하나였지만, 그 행위가 겨냥한 대상은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1941년 5월 30일 밤, 열여덟 살의 마놀리스 글레조스와 법학생 아포스톨로스 산타스는 점령 당국의 감시를 피해 북서쪽 바위면을 타고 올라가 스바스티카 깃발을 떼어냈다. 두 사람은 무기를 가진 조직도, 망명정부의 명령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행동은 군사적 손실을 주기보다 점령자가 그리스의 상징 공간을 자기 권력의 표지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독일 당국은 범인을 곧바로 찾아내지 못했지만, 훗날 두 사람을 궐석 사형 선고했다. 글레조스가 훗날 전한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히틀러가 ‘유럽은 자유롭다’고 말한 데 맞서 싸움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이 회고는 사후의 자기해석이므로 당시의 내면을 그대로 증명하지는 않지만, 행위가 훗날 저항의 공적 기억을 조직한 방식은 보여준다.
그러나 아테네의 상징적 도전과 북동부의 무장 봉기는 같은 조건에서 나왔다. 불가리아는 1941년 5월 14일 동부 마케도니아와 서부 트라키아를 공식 병합했고, 군대만 주둔시킨 것이 아니라 학교와 행정을 불가리아식으로 바꾸려 했다. 처음에는 식량과 우유를 나누고 현지 주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그리스어 공공생활을 밀어내는 강제 불가리아화가 이어지면서 ‘해방’이라는 선전은 설득력을 잃었다. 소련 침공 뒤 그리스 공산당의 지역 조직은 산악 분견대를 만들고,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마비시킬 계획을 세웠다. 9월 28일 밤 드라마 주변의 독사토, 호리스티, 프로소차니에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병력과 무기가 부족했고 지역 봉기를 전국적 봉기로 연결할 준비도 없었다. 프로소차니에서 잠시 인민정부가 선포된 것은 점령 행정의 대안을 상상했다는 뜻이었으나, 다음 날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도주하면서 끝났다.
불가리아군의 대응은 반란 진압을 민간인 처벌로 바꾸었다. 드라마에서는 18세에서 45세 남성을 체포해 수백 명을 처형했고, 독사토와 호리스티에서는 9월 29일에만 485명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체 희생자는 불가리아 군사보고서의 약 1,600명부터 그리스 측의 수천 명까지 편차가 크다. 숫자의 차이는 자료의 성격과 전후 기억정치에서 비롯되지만, 마을 약탈과 난민의 동쪽 점령지 이탈이라는 결과까지 흐리지는 않는다. 이 실패는 저항이 무모했다는 증거만이 아니었다. 점령자는 병합을 주민의 동의로 바꿀 수 없었고, 공개 봉기의 대가를 주민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이 통치하는 질서의 폭력을 드러냈다. 이후 저항은 상징적 항의와 준비되지 않은 봉기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 그리고 조직·보급·민간인 방어 없이는 해방의 이름이 또 다른 학살을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을 함께 떠안았다.
빵을 나누는 조직이 군대가 되기까지
1941년 겨울의 기근은 단순히 식량이 모자라서 생긴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점령군은 그리스를 군대의 식량창고와 전쟁비용의 지불자로 취급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생산물과 운송수단을 징발했고, 불가리아 점령지의 곡물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막았다. 연합국의 해상봉쇄는 수입을 끊었다. 농민에게는 현물세와 강제 판매가 부과되었지만 고정가격은 생산비를 따라가지 못했으므로 농산물은 창고와 암시장으로 숨어들었다. 점령 드라크마의 대량 발행은 물가를 폭등시켰고, 아테네에서는 1941년 4월부터 1942년 6월까지 빵값이 거의 90배 올랐다. 1941년 12월부터 1942년 2월까지 도시의 배급표는 생존을 보장하지 못했다. 사망자는 정확히 세기 어려웠지만, 후대 연구는 점령기 기아 사망을 약 30만 명으로 추산하며, 의학 연구는 결핵과 장티푸스 같은 감염병의 치명률이 영양실조와 함께 높아졌음을 확인한다.
이 조건에서 EAM이 내건 첫 약속은 추상적인 혁명보다 “삶과 자유, 우리 민중에게 빵을”에 가까웠다. 1941년 9월 27일 결성된 민족해방전선은 공산당이 주도했지만, 처음부터 여러 좌파 및 공화주의 세력을 묶는 전선으로 자신을 제시했다. 그 실천은 마을과 도시의 위원회, 노동조직, 청년조직만이 아니었다. 민족연대라는 구호 아래 식량을 구하고, 병자를 돌보고, 체포된 가족을 돕는 일이 저항의 일상적 기반이 되었다. 전통 정치인들이 점령 당국의 정책을 바꿀 수 없었던 반면, EAM의 활동가들은 주민 스스로 배급과 구호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EAM은 굶주린 사람을 단순한 동조자로 세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고 모금하고 운반하고 파업하는 조직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생존을 지키려면 징발과 폭력에 맞설 힘도 필요했다. KKE의 1942년 1월 결정에 따라 2월 16일 EAM의 군사부대인 ELAS가 창설되었고, 아리스 벨루히오티스가 중부 그리스 산악지대에서 초기 조직화를 맡았다. ELAS는 처음부터 정규군이 아니었다. 흩어진 무기, 전직 군인, 마을의 식량과 은신처를 연결해 점령군의 순찰과 협력자에 맞서는 유격대였다. 이 선택은 사람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욕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가가 굶주림을 막지 못하고 경찰과 행정이 점령에 종속된 상황에서, EAM에게 구호위원회와 무장조직은 서로 다른 사업이 아니라 같은 주권의 두 형태였다. 바로 그 때문에 EAM은 빠르게 대중운동이 되었고, 동시에 해방 뒤 누가 국가를 대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 번의 폭파가 만든 동맹, 항복이 바꾼 전쟁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는 단순히 철로 하나를 끊은 사건이 아니었다. 카이로의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는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하는 물자의 흐름을 늦추려 했고, 공병 장교 에드먼드 마이어스가 이끄는 소규모 팀을 그리스에 보냈다. 그러나 영국인들만으로는 약 80명의 이탈리아 수비대와 증원 병력을 상대할 수 없었다. 마이어스와 크리스토퍼 우드하우스는 서로 적대하던 두 그리스 무장조직, 아리스 벨루히오티스의 ELAS와 나폴레온 제르바스의 EDES를 설득해야 했다. 제르바스에게 작전은 영국의 지원을 얻고 공화주의 민족저항의 존재를 입증할 기회였다. EAM 지도부는 영국과 왕정의 관계를 의심했지만, 벨루히오티스는 농촌 무장투쟁이 실제로 점령군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줄 기회를 보아 상부의 소극적 지시를 넘어 참여했다.
11월 25일 밤, ELAS 86명과 EDES 52명, 영국 폭파조가 합류했다. 교량 양끝의 수비대를 묶어두는 동안 폭약을 설치했고, 예상보다 튼튼하고 형태가 다른 철골 때문에 작업이 지연되었다. 첫 폭발은 26일 오전 1시 30분 중앙 교각과 두 경간을 무너뜨렸고, 2시 21분 두 번째 폭발이 남은 부분을 끊었다. 이탈리아 증원열차도 저지되어 공격대는 네 명이 다친 채 빠져나왔다. 군사적 효과는 이미 11월 초 엘알라메인 전투가 끝나 작전의 원래 목표보다 작았지만, 정치적 효과는 컸다. 영국은 철수하지 않고 군사사절단을 남겼으며, 양대 저항군의 협력은 한 달 안에 깨졌다. 폭파 현장에서 독일군이 그리스인 인질 아홉 명을 공개 처형한 대가는 저항이 치러야 할 비용이었다.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휴전협정은 균형을 더 크게 흔들었다. 이탈리아군이 맡던 넓은 농촌 경비가 무너지자 독일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무장해제된 이탈리아 부대의 소총과 기관총, 포가 저항군으로 흘러갔다. 특히 피네롤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EAM이 확보하면서 ELAS의 화력이 급증했다. 이 변화는 해방을 앞당긴 선물이면서 동시에 내부 경쟁을 무장시킨 사건이었다. EAM 지도부는 이제 해방 때 아테네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EDES와 영국은 그 전망을 왕정과 비공산 정부를 밀어낼 위험으로 읽었다. 1943년 10월 산악지대에서 시작된 ELAS와 EDES의 전투는 독일군이 아직 점령하고 있던 그리스에서 저항세력끼리 벌인 전쟁이었다. 고르고포타모스가 공동의 적을 향한 마지막 공동행동이었다면, 이탈리아의 붕괴는 같은 무기를 서로 다른 미래를 위해 겨누게 만든 분기점이었다.
산의 정부와 카이로의 정부, 누가 해방을 대표했는가
1944년 3월 10일 민족해방정치위원회(PEEA)가 세워진 것은 단순히 점령지에 임시 행정을 만든 일이 아니었다. EAM이 장악한 ‘자유 그리스’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낸 뒤 누가 국가를 대표할 것인가가 이미 현재형의 문제였다. PEEA의 창립 헌장은 정복자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고, 국가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회복하며, 국내 파시즘과 무장한 반역 집단을 제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공산당이 혁명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는 뜻이라기보다, 망명한 왕정 정부와 점령 협력정부 모두가 비워 둔 통치 공간을 저항운동이 메우겠다는 주장이었다.
그 주장은 제도라는 형태를 얻었다. 1944년 4월 말 PEEA가 조직한 비밀선거에는 자유지역과 점령도시에서 약 150만에서 180만 명이 참여했고, 조선이 아니라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5월 코리샤데스에서 열린 국민평의회는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오며 인민에 의해 행사된다”고 결의했고, 남녀의 정치적·시민적 평등과 지방 자치, 인민 재판을 기본 제도로 제시했다. 농촌 주민에게 이 언어는 추상적 헌법보다 학교, 식량 배급, 병원과 치안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경험과 결합되어 설득력을 가졌다. 동시에 PEEA의 대표에는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진보적 자유주의자와 헌법학자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도 참여했다. 따라서 EAM은 자신을 당의 단독정부라기보다 해방을 수행한 민중 주권의 임시기관으로 제시했다.
카이로의 망명정부와 영국은 정반대의 위험을 보았다. 그들에게 ELAS가 보유한 군사력과 PEEA의 선거는 해방 뒤 왕정과 기존 국가기구를 복원할 수 없게 만드는 사실상의 이중국가였다. 1944년 5월 레바논 협정은 국민통합정부를 만들고 EAM에 6석을 배정해 충돌을 미뤘지만, 국가의 합법성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EAM은 타협을 택해 8월 정부에 참여했고, 9월 카세르타 협정에서는 국민통합정부를 유일한 합법 권력으로 인정했다. 그 대가로 ELAS와 EDES는 지휘권을 정부에 넘겼고, 파판드레우는 해방 직후 그 권한을 영국군 사령관 로널드 스코비에게 맡겼다. EAM 지도부는 연합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독일군 철수 뒤 선거를 통해 영향력을 보존하려 했지만, 이 양보는 군사적 우위를 정치적 보장으로 바꾸지 못했다. 10월 아테네에 정부가 돌아왔을 때 두 권력이 함께 들어온 셈이었다. 한쪽은 인민이 뽑은 산의 기관과 무장한 해방군을, 다른 한쪽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정부와 영국의 병력을 내세웠다. 해방은 그래서 통치권을 둘러싼 합의가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주권의 대면으로 시작되었다.
시위의 피에서 무장해제의 덫으로
1944년 12월의 충돌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뒤 권력을 빼앗으려 한 사건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EAM이 두려워한 것은 군대가 없는 선거가 아니라, 자신들은 무장해제하는 동안 왕당파와 협력자 출신 인력이 국가의 경찰과 군대에 남는 상황이었다. 12월 1일 영국군 사령관 로널드 스코비는 카세르타 협정을 근거로 ELAS를 해산·무장해제하라고 명령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안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제3산악여단과 신성대대를 보존하고 일부 저항부대만 국가군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EAM은 모든 무장세력의 동시 해산을 요구했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정부의 EAM 장관들이 12월 2일 사임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동시 무장해제는 내전 회피와 민주적 정상화의 최소 조건이었고, 일방적 해산은 패배를 먼저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12월 3일 아테네 중심부의 시위에는 약 20만 명이 모였다. 경찰 발포로 28명이 숨지고 148명이 다치면서, 정부와 EAM 사이의 헌정 논쟁은 거리의 전쟁으로 변했다. 최초 발포자가 누구였는지는 당시부터 논쟁이었지만, 목격자와 사진 기록은 경찰이 비무장 행렬을 향해 쏘았다는 점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후 ELAS는 경찰서와 협력자 무장조직인 조직 X를 공격했고, 영국군은 정부군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포병과 항공기를 투입했다. 12월 중순 EAM이 아테네와 피레아스 대부분을 장악했음에도 영국은 이탈리아에서 인도 사단을 증원했다. 윈스턴 처칠이 성탄절 아테네에 온 것은 중재의 표지를 보이기 위해서였지만, 협상은 EAM이 요구한 권력 재편과 영국이 지키려 한 왕정의 틀 사이에서 결렬되었다. 소련 대표는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EAM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스가 영국의 영향권이라는 강대국 합의가 EAM의 군사적 우세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다.
1월 15일 휴전 뒤 EAM은 더 싸울 수 없는 조건에서 협상했다. 1945년 2월 12일 바르키자 협정은 정치범 사면, 언론·결사의 자유, 공무원과 치안기관의 정화, 1945년 국민투표와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제3조의 사면은 생명·재산에 관한 일반 형사범죄를 제외했고, 제6조는 정규·예비 ELAS와 민간무장조직의 즉각 해산 및 무기 인도를 요구했다. 조지 시안토스가 이끄는 EAM 대표단은 이를 국가적 화해로 되돌아갈 법적 통로로 받아들였지만, 무장해제는 그 약속을 강제할 수단을 없앴다. 실제로 우익 경찰과 준군사조직의 백색 테러가 곧 시작되었고, 협정의 자유 조항은 좌파를 보호하지 못했다. 따라서 바르키자는 EAM의 혁명적 변혁이 실패했다는 뜻만도, 영국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는 뜻만도 아니다. 해방의 대중적 조직이 국가 권력을 얻기 위해 선택한 합법화 전략이 외국군의 화력과 편향된 국가기구 앞에서 군사적 지렛대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이 불균형한 타협이 1946년 내전의 조건을 만들었다.
끝난 것은 전투였고, 끝나지 않은 것은 국가였다
바르키자 협정이 확정한 것은 평화라기보다 힘의 배열이었다. 1945년 2월 12일 정부 대표와 EAM 대표가 서명한 문서는 계엄 해제, 집회·언론·노동조합의 자유, 정치범 사면, 공무원과 경찰의 숙청, 1945년 안의 자유로운 왕정 국민투표와 제헌의회 선거를 함께 약속했다. EAM 쪽이 받아들인 논리는 분명했다. 무장투쟁을 멈추면 합법 정치의 공간을 되찾고, 국가를 협력자와 독재의 유산에서 정화하며, 선거를 통해 해방기에 형성된 민중의 힘을 제도 안으로 옮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협정 전문의 표현대로 목표는 ‘그리스 국민의 화해’와 정상적인 정치생활이었다.
그러나 대가의 순서는 비대칭적이었다. 제3조는 정치적 범죄를 사면하면서도 생명·재산에 관한 일반 범죄를 제외했고, 제6조는 ELAS 정규군과 예비군, ELAN, 민간방위대를 즉시 해산하고 무기를 넘기게 했다. 실제 인도 기록에는 대포 100문, 중박격포 81문, 기관총 419정, 소총과 권총 48,973정 등이 나온다. 국가는 아직 경찰과 군대의 인적 구성을 바꾸지 않은 채 먼저 상대의 조직적 강제력을 없앴다. 협정은 국가의 통일을 선언했지만, 누가 그 국가를 장악할지는 해결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역사학의 논쟁이 갈린다. 한 해석은 영국의 압력과 우익 국가기관의 불이행을 결정적 원인으로 본다. 협정이 약속한 사면과 경찰 숙청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곧 백색 테러가 시작되어 EAM 지지자들이 체포·구타·살해되거나 산으로 내몰렸다는 후속 자료가 그 근거다. 다른 해석은 KKE 지도부의 타협이 국제정세와 국내 세력관계를 오판했다고 본다. 소련이 그리스를 영국의 우선 영역으로 사실상 양보한 조건에서, 무장해제를 정치적 보장과 맞바꿀 실효성 있는 강제수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도 협정문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문서는 자유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집행할 국가기구의 성격과 무장해제 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데켐브리아나는 EAM의 패배로 전투를 끝냈지만, 해방의 주권과 계급적 권력 문제를 1946년 내전으로 넘겼다.
결과
바르키자 협정은 사면과 정치 참여를 약속했지만 ELAS의 무장해제로 EAM이 가진 군사적 지렛대를 없앴다. 곧 우익 국가기관과 준군사조직의 백색 테러가 좌파를 겨냥했고, 협정은 화해가 아니라 1946년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휴전이 되었다. 영국의 개입은 해방 직후의 주권과 민중 다수의 정치적 선택을 외부 전략에 종속시켰고, 동시에 EAM이 무장력 우위를 정치적 변혁으로 전환하지 못한 한계도 드러냈다. 이 사건의 국제적 배경은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전후 유럽의 세력권이 조정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연표와 지도
- 11940.10.28이탈리아의 침공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 방면에서 침공했으나 그리스군은 이를 격퇴했고, 독일의 개입을 불러왔다.
- 21941.04.06독일 침공과 점령
독일군이 북부 국경을 넘어 침공했고, 뒤이어 그리스는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의 세 점령구역으로 나뉘었다.
- 31941.05.30아크로폴리스의 깃발
아포스톨로스 산타스와 마놀리스 글레조스가 아크로폴리스의 스바스티카를 끌어내리며 점령에 대한 상징적 저항을 보였다.
- 41941.09.28드라마 봉기
불가리아 점령지의 드라마와 주변 주민들이 봉기했지만 진압되었고, 뒤이은 보복 학살은 점령의 폭력을 드러냈다.
- 51941.12–1942.02점령 기근
수탈과 물자 붕괴로 아테네와 피레아스의 기근이 절정에 이르렀고, 도시 빈민과 난민이 저항운동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 1942.02EAM과 ELAS의 조직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 EAM이 군사조직 ELAS를 발전시키면서 저항은 분산된 결사에서 전국적 정치·군사운동으로 변했다.
- 61942.11.25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
영국 SOE 요원 12명과 ELAS·EDES가 협력해 북부와 남부를 잇는 철교를 폭파했지만, 두 주요 저항세력의 공동작전은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 1943.09이탈리아의 붕괴
이탈리아 항복 뒤 저항세력은 무기와 병력을 얻었고, 독일군은 이탈리아 점령구역을 넘겨받아 보복전과 학살을 확대했다.
- 71944.03.10민족해방정치위원회
EAM은 자유 그리스에 민족해방정치위원회를 세워 점령 이후 국가의 통치권을 둘러싼 경쟁을 제도화했다.
- 81944.10.18아테네 해방과 귀환 정부
독일군 철수 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국민통합정부가 아테네에 들어왔고, EAM과 영국은 군대와 국가의 관계를 두고 충돌했다.
- 91944.12.03아테네 시위와 발포
약 20만 명의 시위대가 모인 아테네에서 경찰이 발포해 28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다쳤으며, 데켐브리아나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 101945.02.12바르키자 협정
EAM은 사면과 정치적 정상화를 약속받는 대신 ELAS를 해산하고 무장해제했지만, 곧 좌파에 대한 백색 테러가 시작되었다.
원문
그리스 정부와 민족해방전선(EAM) 간의 협정
아테네, 1945년 2월 12일
[번역]
전문
아래 서명한 자들은 바르키자에서 회담을 열고 내전을 종식하며 그리스 인민을 화해시킬 방안을 공동으로 검토한 끝에 다음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의 일방은 그리스 정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단으로 나선 외무장관 존 소피아노풀로스(John Sofianopoulos), 내무장관 페리클레스 랄리스(Pericles Rallis), 농무장관 존 마크로풀로스(John Macropoulos)이다. 타방은 EAM 중앙위원회의 정당하게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단으로 나선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조지 시안토스(George Siantos), EAM 중앙위원회 서기 데메트리오스 파르찰리디스(Demetrios Partsalides), 인민공화연맹(ELD) 사무총장 엘리아스 치리모코스(Elias Tsirimokos)이다.
정부 대표단은 이번 회담에서 더 이상의 유혈 사태 없이 불행한 내부 위기를 끝내고, 국가의 통일을 확립하며, 국내 평화와 정상적인 정치 생활을 회복하려는 정부의 확고한 열망을 표명했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인민은 외부의 적과 벌인 힘겨운 투쟁 및 내전으로 쌓인 폐허에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체결된 협정이 그리스 인민의 정치적 양심의 요구를 표현하는 파괴할 수 없는 도의적 합의가 되도록, 정부 대표단은 이를 통해 자유롭고 정상적인 정치 생활 발전을 향한 그리스 인민의 확고한 열망을 선언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치 생활의 주요 특징은 시민의 정치적 양심, 평화로운 계몽, 정치적 이념의 확산을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대서양 헌장이 선언한 자유와 테헤란에서 채택된 결정들을 존중하는 것도 주요 특징이다. 이 자유와 결정들은 그러한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자유민의 양심 속에 이미 수용된 바 있다.
회담 중에 EAM 대표단은 이러한 원칙들에 전적으로 합의했다.
그리스 왕국 정부와 EAM 간의 협정
제1조 자유
정부는 헌법과 널리 인정받는 민주적 원칙에 따라 기존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법률을 폐지하고 시민의 정치적·사회적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한다. 또한 집회, 결사, 언론을 통한 견해 표명 등 개인의 자유가 방해받지 않고 기능하도록 보장한다. 특히 정부는 노동조합의 자유를 완전히 회복시킨다.
제2조 계엄 해제
본 협정에 서명한 직후 계엄을 해제한다. 이 조치와 동시에 제24호 헌법령과 모든 면에서 유사한 헌법령을 발효하며, 이로써 제24호 헌법령에 언급된 헌법 조항들의 효력 정지를 허용한다.
헌법 제5조, 제10조, 제12조, 제20조, 제95조의 효력을 전국적으로 즉시 정지한다. 이 정지 조치는 무장 해제가 완료되고 전국에 행정, 사법, 군사 당국이 수립될 때까지 계속된다. 특히 제5조와 관련하여, 아테네와 피레우스 및 그 교외 지역에서는 이 정지 조치가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오늘까지 체포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헌법 제5조가 시행되지 않으며, 이들을 가능한 한 최단 기간 내에 석방하고 이를 위한 필요한 명령을 관할 당국에 하달하기로 합의한다.
다른 조직에 억류되어 있을 수 있는 민족해방전선 추종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석방한다.
제3조 사면
1944년 12월 3일부터 사면을 규정하는 법률이 공포될 때까지 저지른 정치 범죄에 대해 사면을 실시한다. 해당 정치 범죄를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일반 형사 범죄는 이 사면에서 제외한다. 필요한 법률은 본 협정 서명 직후 공포한다.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 국민민병대 또는 그리스 인민해방해군(ELAN)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무기를 인도할 의무가 있음에도 1945년 3월 15일까지 무기를 넘기지 않은 자는 이 사면에서 제외한다. 사면 제외에 관한 이 마지막 규정은 ELAS의 무장 해제가 완료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에는 더 이상 그 사유와 정당성이 없으므로 무효로 한다. 제공될 사면의 보장과 세부 사항은 본 협정에 첨부된 법률안에 포함되어 있다.
제4조 인질
ELAS 또는 국민민병대(EP)가 체포한 모든 민간인은 체포된 날짜와 관계없이 즉시 석방한다. 적과 협력했거나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억류되어 있을 수 있는 자는 법률에 따라 관할 법원의 재판을 받도록 국가 사법 당국에 인계한다. (첨부된 사면 법률안 참조).
제5조 국민군
국민군은 직업 장교와 부사관을 제외하고, 수시로 소집되는 각 병역 기수의 병사들로 구성된다. 현대 무기 특별 훈련을 받은 예비역 장교, 부사관, 기타 사병은 이들을 필요로 하는 편제가 존재하는 한 복무를 계속한다. 신성대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직접 지휘를 받고 있으므로 현재 상태를 유지하며, 그 후에는 앞서 말한 원칙에 따라 통합 국민군에 편입된다. 기존의 기술적 여건과 발생할 수 있는 필요에 따라 정규 징병을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스 인민해방군의 무장 해제와 동원 해제 후, 첨부된 의정서에 따라 소집 대상 병역 기수에 속하는 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부대에 등록하기 위해 출두해야 한다. 소집 대상 병역 기수에 속하지 않으면서 현재 존재하는 부대에 등록된 모든 인원은 제대 조치한다. 국민군 상비 간부단의 모든 인원은 제7호 헌법령에 규정된 심의회의 심사를 받는다. 군에 복무하는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는 존중된다.
제6조 무장 해제와 동원 해제
본 협정이 공포되는 즉시 저항군의 무장 병력, 특히 정규군 및 예비군 ELAS, 그리스 인민해방해군, 국민민병대는 동원 해제된다. 무장 해제와 동원 해제 및 무기 반납은 전문가 위원회가 작성하고 정식으로 가조인되어 본 협정에 첨부된 의정서의 세부 규정에 따라 실시한다.
국가는 ELAS가 실시한 징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가축, 자동차 등 ELAS가 징발한 물품은 작성되어 본 협정에 첨부된 의정서의 세부 규정에 따라 국가에 인계되며, 그 후에는 그리스 국가가 징발한 것으로 간주한다.
제7조 공직 서비스 숙정
정부는 특별법으로 설립될 위원회나 심의회를 통해 공공 서비스 인원, 공기업 임직원, 지방 정부 공무원, 그리고 국가에 종속되거나 국가가 급여를 지급하는 기타 서비스 인원에 대한 숙정을 진행한다. 숙정에서 고려할 기준은 직업적 능력, 성품과 인격, 적과의 부역, 또는 해당 공무원이 독재의 도구로 이용되었는지 여부다. 점령기 동안 저항군에 가담한 위 서비스의 공무원들은 원래 직위로 복귀하며 다른 공무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심사받는다. 앞서 언급한 심의회는 1944년 12월 3일부터 본 협정 서명일 사이에 일어난 시위에 참여하거나 협력한 공무원들의 사례도 심사한다. 그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자들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의 처분에 맡겨질 수 있다. 이러한 공무원들의 최종 처분은 제헌의회 선거 결과로 수립될 정부가 결정한다. 장관들의 결정으로 이미 대기 발령 상태에 놓인 공무원들은 앞서 언급한 심의회의 결정에 회부된다. 어떤 공무원도 단지 자신의 정치적 견해만을 이유로 해고되지 않는다.
제8조 치안 기관 숙정
치안 기관, 헌병대, 도시경찰에 대한 숙정은 공무원 숙정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특별 숙정 위원회가 가능한 한 신속히 실시한다. 사면법의 규정을 적용받으며 점령기 동안 그리스 인민해방군, 그리스 인민해방해군 또는 국민민병대에 합류했던 위 부대들의 모든 장교와 사병은 원대 복귀하며, 다른 동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숙정 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다. 1944년 12월 3일부터 본 문서 서명일 사이에 직위를 떠난 위 부대들의 모든 장교와 사병은 대기 발령 상태에 놓이며, 이들에 대한 최종 처분은 선거를 통해 수립될 정부가 구성하는 위원회의 결정에 맡긴다.
제9조 국민투표와 선거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금년 내에 완전한 자유 속에서 진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이 국민투표는 헌법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며, 모든 쟁점은 인민의 결정에 맡긴다. 그 후 국가의 새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제헌의회 선거를 가능한 한 신속히 실시한다. 양측 대표는 인민의 의지 표현이 진정성을 갖추었는지 검증하기 위해 주요 연합국에 참관단 파견을 요청한다는 데 동의한다.
본 협정문은 동일한 사본 2부로 작성되었으며, 1부는 정부 대표단이, 다른 1부는 민족해방전선 대표단이 수령하였다.
1945년 2월 12일, 아테네 외무부에서.
지. 시안토스
디. 파르찰리디스
이. 치리모코스
제이. 소피아노풀로스
제이. 마크로풀로스
피. 랄리스
지. 바르사미스
관련 인물 15명
지도부5
1942년 산악 무장조직화를 이끌며 ELAS 창설을 주도했다.
KKE와 EAM 지도부 대표조지 시안토스1890–1947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바르키자 협정에 서명했다.
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1892–1956자유 그리스의 민중주권과 제도 구상을 대표했다.
그리스 육군 총사령관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1883–1955알바니아 전선에 주력을 두고 메탁사스 방어선과 독일 침공 대응을 조정했다.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설계자에드먼드 마이어스1906–1997영국 SOE 공병 장교로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했다.
참여4
반대 · 저항6
베니토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28일 알바니아 주둔군에 그리스 침공을 명령하고 영토 양도를 요구했다.
귀환 정부의 군주게오르기오스 2세1890–1947해방 후 귀환하여 정부와 영국 지향 외교의 축을 이루었다.
8월 4일 독재체제의 수립자이오아니스 메탁사스1871–19411936년 의회를 정지하고 반공 독재를 세워 좌파를 탄압했다.
국민통합정부 수상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1888–1968레바논과 카세르타 합의를 대표하고 해방 직후 통치권과 군대 통합안을 주도했다.
아테네 전투의 영국군 지휘관로널드 스코비1893–1969ELAS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고 영국군 작전을 지휘했다.
메탁사스 체제의 공안장관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1893–1972아시팔리아와 조작된 공산당 조직으로 KKE를 지하화하고 지도부를 무력화했다.
관련 용어
출처: Menelaos Charalambidis, “The Battle for Athens,” Rosa-Luxemburg-Stiftung, 2024Ed Lengel, “The Greek Civil War, 1944–1949,” National WWII MuseumWikipedia contributors, “Greek resistance”Wikipedia contributors, “Dekemvr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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