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점령과 내전 속에서 어떻게 해방군이 되어 전후 국가를 세웠는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한 나라였지만 하나의 정치공동체는 아니었다
1941년 4월 6일의 침공은 안정된 국민국가를 무너뜨린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슬라브 지역과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묶어 세운 다민족·다종교 국가였지만, 국가기구와 군대의 중심은 세르비아 왕조와 관료층에 놓였다. 1921년 헌법의 중앙집권은 세르브계가 통합의 안전장치라고 본 것을 크로아트와 슬로베니아 정치인 다수가 세르브 패권으로 경험하게 했다. 1929년 알렉산다르 1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로 바꾼 1월 6일 독재는 민족 갈등을 없애지 못한 채 정당정치를 억눌렀다. 1934년 국왕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파블레 섭정공이 통치했지만, 왕정은 사회적 합의를 넓히기보다 위에서 균형을 관리하는 체제였다.
1939년 8월 26일의 크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은 이 위기를 임시로 봉합했다. 정부와 크로아티아 농민당 지도자 블라드코 마체크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만들어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분할 문제와 세르브계 주민의 지위는 해결하지 못했다. 크로아트 민족주의자에게는 불충분했고, 세르브계 중앙집권주의자에게는 양보였으며, 우스타샤는 이를 독립 크로아티아를 포기한 배신으로 공격했다. 농민 다수가 살아가던 가난한 농업사회, 지역별로 크게 다른 문해율과 산업 기반도 국가에 대한 경험을 갈라놓았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를 지킨다’는 말은 모두에게 같은 정치적 내용을 갖지 않았다.
국제정세는 이 균열을 압박했다. 독일은 1930년대 후반 유고슬라비아의 무역과 원료 수출을 끌어당겼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팽창은 국경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군이 실패하자 독일은 발칸을 통과해 그리스를 공격할 필요가 생겼다. 파블레 섭정공 정부는 1941년 3월 25일 삼국동맹에 가입해 통과권을 내주었지만, 세르비아계 장교와 대중의 반발 속에 3월 27일 쿠데타가 일어나 페타르 2세가 성년 국왕으로 선포되고 두샨 시모비치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가 협정을 재검토하려 하자 히틀러는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해 유고슬라비아를 국가로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국내 공산당은 1921년 이래 불법이었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소수의 전국적 지하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정의 정통성, 민족적 자치, 계급적 해방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던 세력들이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외국 군대가 국경을 넘자 국가가 붕괴한 자리를 누가 조직하고 어떤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만들 것인가가 전쟁의 핵심 문제가 되었다.
항복한 왕국에서 봉기의 조직으로
1941년 4월의 붕괴는 단순히 군대가 진 전투가 아니었다. 3월 27일 친추축 성향 정부를 무너뜨린 장교들의 쿠데타 뒤,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군사적으로 격파할 뿐 아니라 국가로서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4월 6일 폭격과 지상 침공은 열흘 남짓 만에 왕국을 항복시켰고, 4월 17일의 무조건 항복 뒤 국경은 점령군의 편의에 따라 잘렸다. 독일은 세르비아 대부분을 직접 통치하고 북부 슬로베니아를 병합했으며, 이탈리아·헝가리·불가리아도 영토를 가져갔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대부분에는 독일이 후원한 우스타샤 정권, 즉 독립국가 크로아티아가 세워졌다. 왕국의 붕괴는 여러 민족을 하나의 국가 틀 안에 묶어 두던 약한 중앙 권력을 없애고, 점령과 협력 정권, 민병대의 폭력을 주민들의 일상에 밀어 넣었다.
이 조건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곧바로 공개 봉기에 나서지 않았다. 당은 불법 조직이었고,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맺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독일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라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노선도 작동했다. 침공 직후 당 지도부는 자그레브와 베오그라드에서 연락망, 은닉처, 무기를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는 소극성이 아니라 살아남아 전국 조직을 움직이기 위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바뀌었다. 코민테른의 지침은 각국 공산당에게 소련을 방어하는 전쟁을 자기 나라의 반파시스트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변화는 구호만이 아니라 인력과 장소의 형태로 나타났다. 6월 22일 시사크 인근 브레조비차 숲으로 들어간 약 40명의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는 제1 시사크 파르티잔 분견대를 만들었다. 다음 날부터 이 작은 부대는 철도와 통신을 교란하고 당 조직과 농촌을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직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규모였고 지역 주민의 보복 위험도 컸지만, 지하 당원이 무장한 정치적 단위로 변한 순간이었다. 티토의 지도부가 7월 4일 전국 봉기를 공식화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파르티잔의 출발점은 항복 뒤 저절로 생긴 민족적 분노가 아니라, 점령의 폭력 속에서 보존된 불법 조직이 국제 정세의 전환을 이용해 무장 저항과 새로운 정치 질서를 함께 준비한 데 있었다.
봉기는 왜 우지체에서 국가의 모습을 띠었는가
1941년 7월 4일 베오그라드의 공산당 정치국이 내린 결정은 상징적인 선언보다 훨씬 실무적인 선택이었다. 독일군이 소련으로 병력을 돌린 틈을 이용해 점령군의 철도와 통신을 끊고, 흩어진 무장조직을 파르티잔 분견대로 묶어 봉기를 전국으로 넓히자는 것이었다. 당시 세력 균형은 절망적이었다. 독일군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군, 불가리아군, 헝가리군과 협력 정권의 병력까지 합치면 점령지에는 약 40만 명이 있었다. 따라서 공산당 지도부는 정규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산악 지형과 비밀조직을 이용해 적의 통치 비용을 계속 높이고 해방구에서 병력과 정치적 신뢰를 함께 키우려 했다. 후대의 공식 서술은 이를 ‘민족·사회적 해방’의 통일전선으로 설명했지만, 왕당파는 같은 봉기를 시기상조인 모험으로 보았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에게 우선 과제는 병력을 보존해 전후 왕정의 복귀를 준비하는 일이었고, 파르티잔의 즉각적인 공격은 독일군의 보복을 민간인에게 떠넘길 위험이 있었다. 이 논쟁은 곧 군사적 경쟁이 되었다. 독일군이 9월부터 서부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양측은 한동안 같은 지역에서 싸웠지만, 누가 해방지를 지배하고 주민을 동원할 것인지를 두고 충돌했다. 파르티잔은 9월 24일 우지체를 장악한 뒤 후퇴하는 부대의 은신처가 아니라 작동하는 후방을 만들려 했다. 인민해방위원회가 행정을 맡고, 전쟁으로 멈춘 공장과 공방을 다시 돌렸으며, 철도 약 145킬로미터와 우편을 운영했다. 우지체의 은행 금고에 설치된 공장은 소총 16,500정과 탄약 250만 발을 생산했다. 신문 『보르바』는 전투 명령만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이 누구를 위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지를 알렸다. 이곳의 ‘공화국’은 안정된 국가가 아니었다. 주민 수와 경계에 관한 자료도 크게 엇갈리고, 무기·식량·피난민을 감당해야 했으며, 점령군은 마을 소각과 인질 처형으로 사회적 비용을 폭발시켰다. 9월 16일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 지휘부는 봉기를 ‘최단 시간에’ 진압하고 독일군 사망 1명마다 50명에서 100명의 인질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11월 공세가 시작되자 우지체를 지키던 노동자 대대가 카디냐차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최고사령부는 산자크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단순한 해방지의 소멸이 아니었다. 9월 26일 스톨리체 회의에서 파르티잔은 분견대의 편제와 지휘를 통일하고 인민해방위원회를 통한 동원을 확대하기로 했다. 우지체에서 얻은 교훈은 영토를 지키는 군대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퇴할 때에도 병력, 생산, 행정, 그리고 왕정 복귀와 다른 정치적 정당성을 함께 옮겨야 했다.
누가 저항의 이름으로 나라를 대표할 것인가
1941년 가을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의 충돌은 단순히 지휘권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었다. 두 세력은 ‘해방’의 시간과 주체를 다르게 정의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당은 점령이 만든 공백을 지금 메워야 한다고 보았다. 무기를 개인이나 지역 지휘관의 사유물로 남겨 두지 않고 민족해방위원회와 군사 지휘체계 아래 묶어야 점령군의 보복을 견디고, 세르비아인만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 무슬림, 슬로베니아인까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반면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왕당파는 왕과 망명정부의 합법성이 아직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대규모 봉기는 독일의 보복을 민간인에게 돌리고 전후의 정치적 결정을 공산당에 선물할 위험이 컸다. 1943년 미국 국무부에 제출된 유고슬라비아 공사관의 설명도 이 입장을 ‘왕에 대한 충성’과 ‘자유롭고 민주적인 재건’의 전쟁으로 제시했다. 체트니크가 스스로를 단순한 세르비아 민병대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군의 계승자로 이해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두 계산은 같은 점령 현실 안에서 서로를 무너뜨렸다. 1941년 11월 라브나 고라와 서부 세르비아에서 협상이 실패하고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체트니크 지휘관 일부는 파르티잔을 먼저 제거할 대상을 보았다. 일부는 독일군이나 네디치 정권, 이탈리아군과 국지적 협정을 맺어 병력을 보존했다. 이것은 모든 체트니크가 처음부터 추축국의 협력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왕당파의 보존 노선은 학살과 인질 처형 속에서 실제 마을을 지키려는 방어 논리로 사람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파르티잔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무기를 주었다. 파르티잔은 점령군과 협력 세력뿐 아니라 왕정 복귀를 기다리는 세력도 전후 질서의 경쟁자로 규정하며, 전투와 행정을 한 조직 안에서 동시에 건설했다.
그 결과 1942년 11월 26일 비하치에서 열린 AVNOJ는 승리를 선언한 의회가 아니라, 아직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대표성을 시험한 기구였다. 참석자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산자크와 보이보디나를 배분해 전국성을 연출했지만, 마케도니아 대표는 없었고 여러 대표도 도착하지 못했다. 이 결함을 감추기보다, AVNOJ는 해방구의 토지위원회와 인민해방위원회를 연결해 ‘누가 세금을 걷고, 식량을 배급하며, 재판하고, 군대를 지원하는가’라는 실질적 질문에 답하려 했다. 의장 이반 리바르는 왕국의 헌정 의회와 이어지는 경력을 지녔고, 부의장 누리야 포즈데라츠의 참여는 이 기구가 공산당원만의 세르비아 기관이라는 비난에 맞서는 상징이었다.
동시에 티토는 AVNOJ를 정식 정부라고 부르지 않았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영국과 미국이 인정한 망명정부와 정면충돌하지 말고, 반파시스트 전국기구라는 외피로 연합을 넓히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비하치의 결정은 왕정을 즉시 폐지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다민족 연방을 미래 국가의 원리로 채택하고 해방지대의 행정을 전국적 정치권위로 묶는 우회였다. 하지만 그 우회가 바로 힘이었다. 런던의 정부가 헌법상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동안, AVNOJ는 식량과 병력, 치안과 처벌을 실제로 조직했다. 내전은 파르티잔에게 잔혹한 비용을 안겼지만, 동시에 ‘저항하는 군대’가 ‘대표하는 국가’로 변하는 제도적 공간을 열었다.
포위망을 이긴 군대는 부상자를 버리지 않았다
1943년의 두 대공세에서 파르티잔이 얻은 것은 점령지 하나가 아니라, 포위되어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군대라는 증명이었다. 1월 20일 시작된 폴바이스는 비하치 해방지대와 최고사령부를 없애려 독일군 약 9만 명에 이탈리아군과 체트니크 보조병력을 더해 서부 보스니아를 조였다. 파르티잔은 영토를 지키는 대신 주력과 중앙병원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것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병원에는 전투할 수 없는 수천 명이 있었고, 그들을 남기면 추축국의 포로 처형과 협력 세력의 보복에 맡겨졌다. 파르티잔은 프로조르를 점령하고 네레트바의 교량을 폭파한 뒤, 적이 파괴된 다리를 지키느라 방향을 오판하는 사이 다시 임시 통로를 놓아 부상자와 주력을 강 건너로 통과시켰다. 3월의 돌파는 전장을 이긴 승리라기보다, 적이 노린 지휘부와 병원을 함께 보존한 작전적 생존이었다. 그 대가는 컸다. 전투와 행군,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자가 쌓였고, 민간 피란민도 추위와 공습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병원을 버리지 않는다는 결정은 파르티잔의 군사조직이 사람을 소모품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숙련된 전투원과 정치적 신뢰를 함께 보존하려는 선택이었다.
5월 15일 시작된 폴슈바르츠에서 추축국은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병력 약 12만 7천 명과 항공기 300여 대를 투입했다. 수테스카 일대의 파르티잔은 약 2만 2천 명이었고, 중앙병원에는 약 3천 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굶주림과 장티푸스까지 겹친 포위 속에서 최고사령부는 포차를 향한 돌파에 실패한 뒤 피바와 수테스카 사이로 방향을 바꾸었다. 6월 초 돌파 때 세 개 여단과 2천 명이 넘는 부상자, 대부분 비무장인 의료진이 포위망 안에 남았고 많은 이들이 붙잡혀 살해되었다. 따라서 수테스카를 값싼 영웅담으로 부를 수는 없다. 파르티잔은 병원을 끝까지 구하지 못했고 병력의 큰 부분을 잃었다. 그럼에도 주력과 최고사령부는 6월 9일 포위망을 뚫었고, 티토도 전투에서 부상했지만 지휘체계는 살아남았다. 독일 지휘관 루돌프 뤼터스가 이들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며 사기가 놀랍도록 높다고 평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파르티잔은 추축국을 정면으로 격파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 병력과 지형, 병원과 피란민이라는 부담을 안고도 해체되지 않았다. 이 생존이 1943년 연합국의 티토 승인과 무기 지원을 설득했고, 11월 야이체에서 AVNOJ가 유고슬라비아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군사적 근거가 되었다. 연방 구상은 회의장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포위망 밖으로 병사와 부상자를 함께 데리고 나온 지휘능력 위에 세워졌다.
무기를 얻은 운동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연합국과의 휴전을 발표하고 9월 29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유고슬라비아의 전쟁은 단순히 점령군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권력의 빈틈이 열리는 국면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군은 달마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일부와 섬들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이 무기를 버리거나 독일군에 무장 해제되자 파르티잔은 소총과 기관총뿐 아니라 포병, 차량, 통신장비까지 확보했다. 일부 이탈리아 병사와 유고슬라비아인 수감자도 파르티잔 대열에 들어왔다. 무기의 의미는 수량에만 있지 않았다. 파르티잔은 해안과 내륙의 넓은 지역에서 행정과 동원을 동시에 조직할 수 있었고, 마을의 무장 주민을 이동전 부대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곧 이탈리아 점령지를 장악했고, 우스타샤와 협력 민병대의 폭력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전리품은 안전한 후방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독일의 공격을 견디며 군사력과 정치기구를 함께 세울 시간을 준 것이었다.
이 조건에서 1943년 11월 29일 야이체에 모인 AVNOJ는 이미 존재하는 군사적 사실을 국가의 주장으로 번역했다. 제1차 회의의 전국적 반파시스트 대표기구를 넘어, 제2차 회의는 AVNOJ를 유고슬라비아의 최고 입법·대표기관으로 규정하고 그 집행기능을 맡을 민족해방 유고슬라비아 국가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는 전쟁 중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공산당의 결단이었다. 망명정부와 왕정은 국제적으로 여전히 유고슬라비아의 법적 대표로 취급될 수 있었지만, 국내에서 세금과 징집, 식량 배급과 사법을 실제로 수행하는 쪽은 해방위원회와 파르티잔이었다. AVNOJ의 결의는 그 현실을 제도적 정통성으로 바꾸려 했다. 동시에 왕 페타르 2세와 망명정부의 귀환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막고, 전후에 군주제와 공화제를 민중이 결정한다고 선언했다. 형식상 최종 선택을 유보했지만, 왕정이 전쟁 이전의 권리로 복귀하는 길은 차단한 셈이었다.
연방 구상은 단순한 행정 분할이 아니었다.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민,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을 동등한 민족으로 묶는 여섯 공화국의 국가공동체를 제시했다. 공산당 지도부의 계산은 분명했다. 우스타샤의 대량폭력, 체트니크의 세르비아 중심 왕정 구상, 점령국의 영토 분할이 민족적 공포를 키운 상황에서, 전쟁 전 중앙집권 왕국을 그대로 복원하면 무장한 경쟁자와 소수민족의 불신을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연방은 각 민족에게 해방의 주체라는 자리를 주면서도, 군대와 외교와 경제를 전국적 지휘 아래 묶는 타협이었다. 비판적으로 보면 대표자 다수는 공산당이 선별하고 군사력이 보호한 회의였으며, 전후의 정치적 경쟁을 미리 제한했다. 그러나 파르티잔의 관점에서 야이체는 아직 승리하지 못한 군대가 왜 싸우는지를 명문화한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점령에 맞서는 군대인 동시에, 무기로 얻은 영토에서 새 국가의 권리를 행사하는 세력이 되었다.
해방된 수도에서 군대와 정부를 바꾸다
베오그라드 해방은 단순히 수도를 되찾은 군사 작전이 아니었다. 1944년 10월 20일 파르티잔 제1군단은 표도르 톨부힌이 지휘한 소련 제3우크라이나전선과 함께 시가전을 끝냈다. 소련군의 전차와 중화기는 독일군의 철수로를 끊는 데 결정적이었지만, 도시 안팎을 잘 아는 파르티잔 보병이 거리와 교량을 장악했다. 이 협력은 파르티잔이 외국 군대의 대리인이어서가 아니라, 소련의 작전 지원을 자기 군사·정치적 주도권을 확장하는 기회로 이용한 것이었다. 티토는 모스크바와 작전 협의를 하면서도 붉은군대가 유고슬라비아의 해방자로 장기 주둔하는 상황은 피하려 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베오그라드에서 철수했고, 수도의 행정과 치안은 민족해방운동의 손에 남았다.
그러나 승리한 군대가 곧바로 국가 전체의 합법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망명 중인 왕정과 영국이 지원하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를 완전히 배제하려면, 점령지에서 만든 AVNOJ의 권력을 국내 행정과 국제 외교의 언어로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1944년 11월 티토와 왕정 망명정부 대표 이반 슈바시치는 티토-슈바시치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표면은 타협이었다. 왕정의 국왕 문제는 당장 확정하지 않고, 민족해방위원회와 망명정부 인사를 묶은 연립정부를 내세웠다. 파르티잔 쪽에서 보면 이것은 서방 연합국의 승인을 얻고 전후 선거까지 시간을 확보하는 전술이었다. 왕당파 쪽에서는 공산당의 일당 지배를 막고 왕정의 법적 연속성을 보존할 마지막 통로였다. 하지만 협정이 허용한 형식적 균형과 달리, 국내의 무장력과 경찰, 해방지대의 행정망은 이미 파르티잔이 쥐고 있었다. 타협은 권력을 나눈 것이 아니라, 파르티잔의 권력을 국가 형태로 번역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 번역은 1945년 3월 1일 완료되었다. 민족해방군과 파르티잔 분견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통합되었다. 게릴라 부대의 지역적·정치적 성격을 벗겨 정규 군단, 사단, 군관구를 갖춘 국가군으로 만든 조치였다. 명칭의 변경은 전투가 끝났다는 선언이면서, 누가 무기를 합법적으로 소유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체트니크와 협력 세력에게는 독자적 군사정치 세력으로 남을 공간이 사라졌다. 동시에 이 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진 국민적 화해가 아니었다. 북부 유고슬라비아에서 퇴각하던 반파르티잔 병력과 민간인들이 붙잡혀 처형되거나 수용되었고, 전후의 재판과 숙청은 점령기 범죄에 대한 처벌과 혁명적 경쟁자 제거를 함께 수행했다. 따라서 1945년의 유고슬라비아군은 해방의 성과이자 내전의 승자가 만든 국가 장치였다. 파르티잔은 수도를 점령한 군대에서 국가의 군대로 변했지만, 그 국가의 정당성은 군사적 승리, 연방 약속, 그리고 경쟁 세력을 배제한 강제력이 결합해 세운 것이었다.
승리는 무엇을 결정했고, 무엇을 끝내 결정하지 못했는가
파르티잔의 승리가 결정한 것은 단순히 어느 군대가 베오그라드에 먼저 들어갔는가가 아니었다. 1945년 3월 1일 민족해방군이 유고슬라비아군으로 바뀌면서 전시의 당 조직과 군사 지휘망은 국가의 상설 기관이 되었다. 야이체에서 내건 여섯 공화국 연방은 전쟁 전 왕국의 중앙집권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고, 1945년 11월 선거와 연방인민공화국의 수립은 그 약속을 공산당이 지배하는 헌정 질서로 굳혔다. 파르티잔은 스스로를 단지 독일을 몰아낸 군대가 아니라, 학살과 협력의 질서를 끝내고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살 국가를 만든 운동으로 이해했다. ‘형제애와 통일’은 이 주장을 압축한 구호였다.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과 점령군의 보복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 구상은 민족국가들의 복수전을 되풀이하지 않을 현실적 대안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해방은 중립적인 선거 경쟁의 출발점이 아니었다. 망명 왕정과 페타르 2세의 복귀는 연기되었고, 티토-슈바시치 협정이 약속한 연립의 공간도 파르티잔이 장악한 행정·군사력 앞에서 급속히 좁아졌다. 1945년 봄 블라이부르크와 이후의 강제 행군 및 처형에서 패배한 체트니크, 우스타샤계 병력과 민간인들이 재판 없이 살해된 사실은 새 국가가 해방과 혁명을 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후 산악 게릴라가 1946년까지 활동한 것도 점령의 종식이 정치적 동의의 종식을 뜻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파르티잔의 입장에서는 무장 협력자와 재봉기를 제거하고 내전의 재개를 막는 국가 건설의 조치였지만, 피해자와 반대파에게는 승자의 보복과 일당 지배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이 아직 합의하지 못한 것은 승리의 사실보다 그 의미와 비용이다.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전쟁 희생자를 170만 명으로 제시했지만, 1980년대 보골류브 코초비치와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는 인구 자료를 바탕으로 약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숫자의 차이는 우스타샤의 집단살해, 체트니크의 민간인 공격, 점령군의 학살, 파르티잔의 전시·전후 처형을 어떤 범주로 세는가와 연결된다. 한쪽 서술은 파르티잔을 다민족 해방과 사회혁명의 주체로, 다른 서술은 공산주의 혁명이 전쟁의 반파시즘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 과정으로 본다. 현재의 연구는 둘 중 하나를 지우기보다, 파르티잔이 실제로 점령을 물리치고 국가를 재건한 능력과 그 국가가 승리의 이름으로 정치적 다원주의와 패자의 생명을 제한한 사실을 함께 묻는다. 이 전쟁이 확정한 것은 사회주의 연방의 탄생이었고, 끝내 해결하지 못한 것은 서로 다른 공동체가 그 연방을 누구의 국가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결과
전쟁은 추축국 점령을 끝냈지만 평화로운 복귀가 아니라 혁명적 정권교체를 남겼다. 파르티잔의 군사적 승리와 AVNOJ가 제시한 여섯 공화국 연방 구상은 1945년 연방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의 토대가 되었고, 왕정과 망명정부의 복귀 가능성, 경쟁 세력의 정치적 생존을 차단했다. 점령과 내전, 민간인 학살, 보복의 비용은 막대했으며 전후에도 체트니크와 반공 게릴라에 대한 소탕과 처벌이 이어졌다. 이 승리가 낳은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와 티토의 자율 노선은 뒤의 「티토-스탈린 결별」에서 다시 쟁점이 된다.
연표
- 1941.04.06침공과 분할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했고, 4월 17일 항복 뒤 영토는 점령지와 추축국 위성 정권으로 나뉘었다.
- 1941.06.22무장 저항의 전환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에 대한 조직적 무장투쟁을 개시했고, 시사크에서 첫 파르티잔 분견대가 결성되었다.
- 1941.07.04전국 봉기 명령
공산당 최고 지도부는 봉기를 공식 명령했고, 세르비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파르티잔 전투가 확산되었다.
- 1941.09우지체 공화국
파르티잔은 세르비아 서부의 우지체를 중심으로 해방지대를 세웠지만, 추축국 공세로 12월 철수하면서 초기 거점 대부분을 잃었다.
- 1941.10저항 세력의 내전
티토의 즉각 봉기 노선과 왕당파 체트니크의 세력 보존 노선이 충돌하면서 두 저항운동의 협력은 무너지고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 1942.11.26비하치의 AVNOJ
반파시스트 민족해방위원회가 비하치에서 처음 소집되어 군사투쟁과 해방지대 행정을 연결하는 정치적 전국기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 1943.03네레트바 전투
추축국은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와 부상자를 포위해 제거하려 했지만, 파르티잔은 네레트바를 건너 포위망을 뚫고 주력을 보존했다.
- 1943.05.15수테스카의 돌파
수테스카 전투에서 파르티잔은 큰 손실을 입으면서도 포위망을 돌파했고, 이 생존은 연합국이 티토를 주요 유고슬라비아 저항 지도자로 인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 1943.11.29야이체의 연방 구상
AVNOJ 제2차 회의는 임시정부에 가까운 권한을 자임하고 여섯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 재편을 결의했으며 티토를 유고슬라비아 원수로 선출했다.
- 1943.09이탈리아 항복과 무기 확보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파르티잔은 점령지의 무기와 탄약을 대량으로 확보했고, 아드리아해와 발칸의 군사적 조건이 바뀌었다.
- 1944.10.20베오그라드 해방
파르티잔은 소련 붉은군대와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고, 이후 주요 전선은 독일군과 국내 협력 세력의 잔여 병력을 몰아내는 전쟁이 되었다.
- 1945.03.01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
민족해방군은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어 정규 국가군이 되었고, 5월까지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정치적·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관련 인물 10명
지도부3
참여3
반대 · 저항2
관련 용어
출처: Jozo Tomasevich, 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Marko Attila Hoare, The Partisans and the Jews: The Persecution and the Politics of Liberation in Yugoslavia, Palgrave Macmillan, 2011Encyclopaedia Britannica Editors, Partisan, Encyclopaedia BritannicaEncyclopaedia Britannica Editors, Anti-Fascist Council for the National Liberation of Yugoslavia, Encyclopaedia BritannicaThe National WWII Museum, Conflict in Post-War Yugoslavia: The Search for a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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