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장관이던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이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티토·카르델리에 이은 제3의 권력자로 여겨졌다. 1944년 5월 파르티잔 보안기구 오즈나를 창설했고, 전후 내무장관 겸 국가보안국(우드바) 수장으로서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해 1949년 골리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에 코민포름주의자 수용소를 세웠다. 코소보에서는 1947~1966년이 '란코비치 시대'로 불릴 만큼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경 진압이 자행되었고, 보이보디나 헝가리계와 산자크 무슬림에 대한 소규모 탄압도 있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을 고수했으며, 1966년 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된 뒤 두브로브니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4–1966 보안·정보·치안 · 유고슬라비아
경력 연표
- 1928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9–1935공산주의 활동으로 체포·투옥
- 1941–1945파르티잔 최고사령부에서 복무, 1944년 OZNA 창설
- 1946–1953유고슬라비아 내무장관 겸 UDBA 수장
- 1948–1955코민포름 반대 숙청 총괄, 골리오토크 수용소 건설
- 1963–1966유고슬라비아 부통령
- 1966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 당에서 제명
관련 역사 사건
코소보와 보안기구
1945~1966년 란코비치는 알바니아계가 다수인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소수 통제를 비밀경찰의 반알바니아 진압 정책으로 유지했다. 코소보에서 1947~1966년은 구어로 '란코비치 시대'로 불리며, 비밀경찰 아래 코소보는 경찰국가처럼 기능했다. 탄압은 불법 무기 수색이라는 명분과 고문, '이레덴티스트'로 불린 실제·의심 정치적 반대자들의 죽음을 동반한 경찰 행동을 통해 이뤄졌다. 보이보디나 헝가리계와 산자크 무슬림에 대해서도 규모는 작지만 유사한 공작이 있었다.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현지 알바니아계는 친소련 알바니아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간주되어 코소보는 란코비치 휘하 비밀기관과 경찰의 주된 감시 대상이 되었다. 알바니아계 지식인들이 표적이 되었고, 수천 명의 알바니아계가 '스탈린주의' 혐의로 재판받아 수감되었다. 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세르비아의 비밀경찰은 란코비치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었던 반면 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란코비치는 소련식 중앙집권 체제를 지지했고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자치 확대에 반대했다.
1953년 협정과 이주 문제는 자료가 엇갈린다. 위키백과 계열 서술은 1953년 티토·쾨프륄뤼 '신사협정'이 알바니아계의 아나톨리아 이주를 장려했고, 란코비치가 알바니아 민족주의 억제를 표방한 위협과 압력 공작을 주도해 다수의 알바니아계와 산자크 무슬림이 터키로 향했다고 본다. 한편 학술 연구는 협정이 공식적으로는 마케도니아의 투르크계 이주를 규정했고 1957년 말까지 코소보로부터의 이주가 금지되었으며, 유고 당국이 알바니아계 이주를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중단시키려 했다고 본다. 두 해석을 병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