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경력 연표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관련 역사 사건
마카렌코와 제르진스키 공동체
1927년 4월 발리츠키는 우크라이나 GPU 콜레기야 회의에서 아동 노숙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이름을 딴 노동 공동체 설립을 발의했다. 우크라이나 체키스트 전원이 급여의 0.5%를 기부했고, 발리츠키는 비당원 교사 안톤 마카렌코를 공동체 책임자로 임명했다. 여동생 나탈리야가 마카렌코의 폴타바 콜로니야 성과를 전해들은 것이 계기였다. 1927년 12월 29일 공동체 개관식에서 발리츠키는 GPU 콜레기야를 대표해 직접 공동체 깃발을 수여했다.
마카렌코의 지도 아래 하리코프 외곽의 이 공동체는 무료 급식소에서 자립적인 소년원으로 성장했고, 자체 광학 공장에서 독일 라이카를 복제한 FED 카메라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발리츠키는 마카렌코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했다: 1928년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의 비판으로 막심 고리키 콜로니야 책임자직에서 해임된 마카렌코를 공동체에 계속 머물게 했고, 1936년 마카렌코의 '스탈린도 실수할 수 있다'는 발언이 빌미가 되어 체포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개입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937년이었다: 마카렌코에 대한 '반혁명 활동' 증거가 이미 수집되었으나, 발리츠키는 L.S. 아흐마토프 사건 명단에서 직접 그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로써 마카렌코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날 시간을 벌었고, 그의 저서들은 '인민의 적' 저작으로 분류되어 소각되는 일을 피했다. 발리츠키가 체포된 후에도 마카렌코는 《교육시》와 《탑 위의 깃발》을 집필했다. 마카렌코 연구의 권위자 괴츠 힐리히 교수는 발리츠키 없이는 마카렌코의 세계적 교육학 유산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