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공장 기술자에서 국가계획 수장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경력 연표
- 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62–1965소련 코메콘 대표;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관련 역사 사건
전시 무장인민위원부 활동 (1941–1948)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일주일 후인 1941년 7월 7일, 노비코프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이끄는 무장인민위원부(나르콤보오루제니야)의 부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책임 범위는 소총·기관총 등 보병 화기와 항공기 탑재 기관포의 생산 및 신형 무기 체계의 실전 배치였다. 이는 전쟁 발발 직후 서부지역 대규모 공장들이 급박하게 동부로 이전되는 혼란 속에서, 노비코프가 이제프스크 공장 시절부터 쌓아온 생산 공정 혁신 경험을 전국적 차원에서 발휘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공장 이전과 동시에 생산을 재개하는 '바퀴 위의 조업' 체계를 정착시키고 전쟁 첫해에만 소총과 기관총 생산량을 급격히 끌어올린 것이었다. 전쟁 이전 이제프스크 공장 연구실에서 노비코프가 공학자 N.A. 사프로노프와 함께 개발한 총신 강선 가공법은 기존 대비 생산 시간을 50분의 1로 단축했고, 이 기술은 대량 생산 국면에서 결정적 이점이 되었다.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으로 노비코프는 보리스 반니코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가 34세였을 때였다. 이 포고령은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를 명시했다. 1944년 11월 18일에는 공병·포병 소장 계급을 수여받았다.
노비코프는 훗날 회고록 『시험의 전날과 그날들』(1988)에서 무장 공업이 '수세기 동안 구축되어 왔기에 가장 전쟁에 대비되어 있었다'고 평가했으며, 스탈린의 전쟁 전 공업화가 없었다면 전시 생산의 비약적 확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종전 후에도 노비코프는 1948년까지 무장부 차관직을 유지하며 전후 재건과 군수 체제의 평시 전환을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