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3–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관련 역사 사건
1934~1937년 인사국장과 자백의 연쇄
1934년부터 1937년까지 펠트만은 노농적군 지휘·지휘참모인사국장 겸 국방인민위원 부속 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전군 지휘간부의 임명과 배치를 총괄했다. 1935년 개인 군사칭호가 도입되었을 때 그는 군단장(콤코르) 칭호를 받았다. 같은 시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였고, 1932년에는 그와 함께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을 참관했다. 훗날 심문조서에는 투하쳅스키가 그에게 지휘직 충원 때 전직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밀어 올리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이 실려 있으나, 이는 고문 아래에서 만들어진 자백의 내용이다.
1937년 4월 15일 그는 인사국에서 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고, 5월 15일 체포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5월 19일 심문조서에서 그는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을 인정하면서 푸트나, 프리마코프, 예피모프, 가리카비, 투로프스키, 쥬크, 슈미트, 바실렌코, 포타포프 등 여러 지휘관의 이름을 대었다. 체포 다음 날 이미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진 신고했다는 그의 진술은 고문과 장기 심문이 만들어낸 결과였고, 이 명단은 다른 피의자들에게 되돌아가 증거로 쓰였다.
그 결과는 5월 26일 투하쳅스키의 대질신문에서 드러났다. 프리마코프, 푸트나, 펠트만과의 대질 뒤 투하쳅스키는 처음으로 범죄 자백을 하여 적군 내 군사음모 준비를 인정했다. 이렇게 펠트만의 심문 기록은 상급 지휘부 전체를 끌어들이는 연쇄의 출발점이 되었다. 6월 11일 소련 대법원 특별사법부는 비공개 재판에서 그를 포함한 8명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판결은 즉시 집행되어, 그는 투하쳅스키, 야키르 등과 함께 군사평의회 청사 지하에서 총살되었다. 1957년 그는 완전히 복권되고 당적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