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6년 에르주룸 동계 공세

1916년 1월,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캅카스 전선에서 가장 대담한 작전 중 하나를 감행했다. 갈리폴리 전역이 끝나가면서 오스만 제국은 16개 사단을 캅카스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고, 유데니치는 적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선제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선택한 목표는 에르주룸이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도시로, 11개의 보루와 235문의 포로 방어된 이중 방어선이 시가지를 180도 호 모양으로 감싸고 있었다.

한겨울의 공세는 오스만 사령부를 완전히 기습했다. 제3군 사령관 마흐무트 카밀 파샤는 이스탄불에 있었고, 참모장 펠릭스 구제는 독일에 있었다. 러시아군은 영하의 혹한과 허리까지 차는 눈을 뚫고 진격했으며, 1월 29일 요새 공격이 시작되었다. 결정적 돌파구는 카르가파자르 고원에서 열렸다: 오스만군이 '통행 불능'으로 간주해 방비가 허술했던 산악 능선이었다. 이곳을 돌파한 러시아군은 북쪽에서 방어진 전체를 측면 포위했고, 2월 16일 에르주룸이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3군은 사실상 궤멸되어 12,988명이 포로로 잡혔고 323문의 포가 노획되었다. 1916년 한 해 동안 제3군은 전투 병력이 3만 6천 명으로 줄어들어 군단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 승리로 유데니치는 러시아 제국 역사상 마지막 성 게오르기 2급 훈장을 받았으며, 에르주룸 함락은 러시아군에게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1914–15년 사르카미시 전투: 얼음 속의 승리

1914년 12월, 오스만 제국의 전쟁장관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 캅카스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대담한 겨울 공세를 직접 지휘했다. 9만 명이 넘는 오스만 제3군이 사르카미시를 향해 진격했고, 엔베르는 나폴레옹식 단일 포위 기동으로 러시아군을 아라스 계곡으로 밀어내 궤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혹한과 폭설 속에서 제10군단은 알라후에크베르 산맥을 넘는 동안 병력의 90%를 동상과 탈영으로 잃었고, 전투 전부터 사실상 붕괴했다.

러시아군 사령부 역시 혼란에 빠졌다. 부사령관 미실라옙스키 장군과 베르그만 장군은 포위를 우려해 사르카미시 철수를 주장했으나, 참모장이었던 유데니치 중장은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사르카미시-카르스 철도가 유일한 퇴로임을 간파하고 도시 사수를 고집했으며, 자신이 직접 투르키스탄 예비대를 이끌고 바르디즈 마을을 총검 돌격으로 탈환하여 오스만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사르카미시 전투는 1915년 1월 17일 오스만 제3군의 완전한 궤멸로 끝났다. 11만 8천 명이던 오스만군은 4만 2천 명으로 줄었고, 약 2만 5천 명이 전투 전 알라후에크베르 산맥에서 얼어 죽었다. 유데니치는 이 승리로 보병대장으로 진급하고 캅카스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성 게오르기 4급 및 3급 훈장을 받았다. 이 승리는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연이은 패배를 겪던 시기에 찾아온 몇 안 되는 결정적 승리였고, 이후 에르주룸과 트레비존드로 이어지는 아나톨리아 진격의 발판이 되었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세와 북서군의 패퇴

1919년 9월 28일,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북서군은 페트로그라드를 향한 가을 공세를 개시했다. 콜차크 제독의 전러시아 정부로부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재정 지원을 받은 유데니치는 약 18,500명의 병력, 영국이 제공한 전차 6대, 장갑열차 4대, 53문의 포로 구성된 부대를 정비했다. 공세 첫 주에 루가를 점령하고 프스코프-페트로그라드 철도를 차단했으며, 10월 12일 얌부르크를 함락시켰다. 10월 중순에는 가치나, 크라스노예 셀로, 차르스코예 셀로, 파블롭스크를 차례로 점령하며 페트로그라드 외곽의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유데니치의 승세에는 치명적인 오판이 개입했다. 제3사단장 다닐 베트렌코는 토스노에서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간 니콜라옙스크 철도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혁명군사평의회는 증원군을 신속히 투입할 수 있었다. 10월 21일 적군 제7군과 제15군이 반격을 개시했고, 예비대가 없고 전선이 지나치게 늘어진 북서군은 풀코보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11월 말까지 유데니치의 군대는 에스토니아 국경까지 패주했고, 에스토니아 정부는 볼셰비키와의 평화협상을 앞두고 북서군의 무장 해제와 억류를 단행했다.

유데니치는 1920년 1월 22일 북서군 해산을 명령했고, 며칠 후 잔여 군자금을 가지고 도주하려 했다는 혐의로 에스토니아 경찰과 부하 장교들에게 체포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절단의 개입으로 석방된 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페트로그라드 공세는 백위대의 패배로 끝났다. 이 패배는 북서 전선에서 백군의 조직적 저항이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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