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기대어 자바이칼을 지배하고 콜차크와 맞선 백군 아타만
「…태동하는 내전의 조건에서, 모든 온정과 인간애는 버려져야 한다」: 회고록 『나 자신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백색 테러 정책을 정당화한 말.
자바이칼 코사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유능한 기병 장교였다. 1917년 말 특별만주부대(OMO)를 조직해 시베리아 내전의 첫 전선을 열었고, 일본군의 군사·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자바이칼 지역을 장악해 '동부 변경' 정부를 수립했다. 콜차크의 권위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화했고, 그의 통치 아래 자행된 대규모 백색 테러는 미군 정보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했다. 1920년 패주 후에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에서 반소 활동을 이어가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1920 군사·지휘 · 러시아 백색운동
경력 연표
- 1908–1911오렌부르크 코사크 사관학교 졸업,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4급·게오르기 무기 수훈, 에사울 진급
- 1917.12–1918특별만주부대(OMO) 조직, 자바이칼에서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18–1919치타 점령, 자바이칼 코사크 군 아타만 선출, 콜차크와 충돌 후 화해
- 1920.1–10러시아 동부 변경 전권 통치자, 극동군 편성 → 10월 패주, 비행기로 만주 도피
- 1921–1945일본·만주 망명, 일본군과 협력, BREM 의장(1943–1945)
- 1945.8–1946.8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교수형
관련 역사 사건
자바이칼 백색 테러와 그 사상자 통계
세묘노프의 자바이칼 통치는 대규모 테러와 함께 진행되었다. 그의 세력이 자바이칼을 장악한 1918년부터 1920년 붕괴까지,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살상은 백색 테러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러시아어 사료는 자바이칼에서 세묘노프 부대가 처형한 사람의 수를 알 수 없다고 밝히면서, 여러 출처가 서로 다른 수치를 제시한다고 적는다. 미국군 장성 윌리엄 그레이브스는 보고서에서 세묘노프 군대가 4만 명의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미국 육군 정보부는 그가 1년 만에 3만 명을 처형했다고 추산했고,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그레이브스와 찰스 모로는 세묘노프가 의도적인 살인·강간·약탈 작전으로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증언했다. 수치가 3만에서 10만까지 갈리는 만큼, 어느 하나를 확정된 사실로 제시할 수 없고 각 출처에 귀속시켜야 한다.
대규모 수용·처형 시설이 자바이칼에 세워졌다. 가장 큰 수용소는 다우리야 역과 마카베예보에 있었는데, 다우리야에는 명목상 세묘노프에게 복종한 웅게른 남작의 부대가 주둔했고 마카베예보에서는 티르바흐가 지휘했다. 1919년 8월에는 우랄·서시베리아 각지 감옥의 정치범을 수용하려고 트로이츠코사프스크(옛 캬흐타)에 임시 감옥이 세워졌다. 이곳 수감자 처형은 세묘노프 부대의 코사크들이 집행했으며, 1919년 12월 24일부터 1920년 1월 10일 사이에 약 1500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은 '트로이츠코사프스크 비극'으로 불린다. 1920년 1월 1일과 5일 이틀 동안만 481명이 총살되었다. 같은 해 7월 아드리아노프카 역에서는 세묘노프의 진압대가 포로로 잡힌 적군 병사 약 3000명을 총살했고, 이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 찰스 해스켈 모로는 포로를 가득 실은 화차를 풀어 큰 구덩이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쏘았다고, 하루에 53량 화차 분의 포로 16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이 처형의 정점이었다고 기록했다.
가학은 개별 지휘관 차원에서도 자행되었다. 웅게른 남작과 티르바흐, 그리고 치스토힌과 필리핀의 진압대가 잔혹하기로 이름났다. 세묘노프 자신의 개인 비서실장을 지낸 블라시예프스키는 웅게른이 여성과 아동도 가리지 않고 온 마을 주민을 없앴으며, 티르바흐가 마카베예보에서 즉결 처형을 일삼았다고 증언했다. 세묘노프는 이런 방식에 대해, 내전이 시작되는 조건에서는 모든 연약함과 인도주의가 버려져야 한다고 스스로 밝혔다.
이 학살 기록은 내전기부터 국제적 조사 대상이었다. 1921년 세묘노프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원조를 요청했다가 뉴욕에서 체포되어 6일간 연방 교도소에 구금되었고, 같은 시기 미 상원에서는 시베리아 점령과 세묘노프의 행적, 일본군부와의 관계를 다룬 보고가 제출되었다. 사후 평가도 갈렸다. 1994년 4월 4일과 1998년 3월 26일 러시아 연방군사법원은 이 사건을 재심하여 반소 선전·선동 부분은 범죄 구성 요소가 없다는 이유로 절차를 종결했으나, 나머지 부분에서는 원판결을 유지하고 피고들을 재활 대상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즉 살상 책임에 대한 법적 판단은 유지된 채 모스크바에서 1946년 8월 30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