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프랑스

49 명

해당 인물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자연사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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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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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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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장 조레스

Jean Jaurès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59–1914 ✕ 암살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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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레옹 도데

Léon Daudet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42 ○ 병사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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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 1948년 무혐의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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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8–1952 ○ 종신형 · 병보석 후 사망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뇌, 「통합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왕당파 이론가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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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90마르티그 출생, 청력을 잃고 파리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99–1908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 1908년 일간지 창간
  • 1908–1939「통합민족주의」의 이론가로 프랑스 극우 전체에 영향
  • 1926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 2월 6일 시위 호소
  • 1938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 1940–1944비시 지지,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
  • 1945.01대적 협력으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 선고
  • 1952병으로 석방된 해에 투르에서 사망

알베르 르브룅

Albert Lebru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인 1871–1950 ○ 자연사

공화국의 권한이 무너지는 순간 서명한 대통령

1940년 7월 10일, 그는 사임하지 않은 채 헌법법을 공포했고 다음 날 대통령직은 페탱에게 넘어갔다.

알베르 르브룅은 광산공학 교육을 받은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오랜 의회·각료 경력을 거쳐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제3공화국의 제한된 국가원수 관행 속에서 내각 불안정과 좌우 세력의 충돌을 조정했지만, 행정부를 직접 이끌 권한은 좁았다. 1940년 패전 국면에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항전을 계속하려 했으나 필리프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다. 그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그 서명과 권력 이양은 비시 체제로 이어진 헌정적 단절의 핵심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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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1광산공병, 베술·낭시
  • 1900–1920하원의원, 브리에
  • 1911–1914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 1917–1919봉쇄·해방 지역 장관
  • 1920–1931상원의원, 상원 부의장·의장
  • 1932–1940프랑스 대통령,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 19407월 10일 헌법법 공포, 사임 없이 권력 이양

레옹 블룸

Léon Blum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72–1950 ○ 심장질환으로 사망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남긴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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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 1914–1919전시 사회당 각료 비서실장, 종전 후 하원의원 당선
  • 1920.12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낡은 집」 사수 연설
  • 1921–1936SFIO 재건, 『르 포퓔레르』 주필, 원내 지도자
  • 1936.02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에게 폭행당해 중상
  • 1936.06–1937.06인민전선 정부 총리, 마티뇽 협정·유급휴가·주 40시간제
  • 1938.03–04제2차 블룸 내각, 상원의 벽에 다시 막혀 한 달 만에 붕괴
  • 1940.07비시에서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표를 던진 80인 중 한 명
  • 1942–1945리옴 재판에서 인민전선을 변호, 이후 부헨발트 인근 특별수용소 억류
  • 1946.12–1947.01과도정부 총리, 전후 재건과 미국 차관 교섭(블룸-번스 협정)
  • 1950.03주이앙조자스에서 사망

모리스 가믈랭

Maurice Gameli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계 1872–1958 ○ 자연사

방어선과 전진 사이에서 결단을 잃은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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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 1906–1914조프르 장군 참모 및 전쟁계획 보좌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9보병사단 지휘
  • 1919–1924브라질 프랑스군사사절단 단장
  • 1924–1929레반트 프랑스군 사령관
  • 1931–1939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 최고 조정
  • 1939–1940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르 공세와 딜 계획 지휘
  • 1940해임 및 비시 정권의 구금

이네사 표도로브나 아르만트

Инесса Фёдоровна Арманд
비소련 혁명가 소련 프랑스 1874–1920 ○ 자연사

레닌과 가장 가까웠던 여성 볼셰비키: 죽음이 그녀를 숙청에서 구했다

1914년 레닌은 그녀를 브뤼셀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에 단독 대표로 파견하며 편지했다: "그대는 혼자 책임을 질 때 더 성장하고 강해지며 대담해지는 사람이다."

레닌의 절친한 동지였던 프랑스 태생 볼셰비키 혁명가. 1919년 제노트델(당 여성부) 초대 책임자로서 여성 해방 정책의 틀을 세우고, 1920년 제1차 국제공산주의여성회의를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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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 입당, 볼셰비키가 되다
  • 1905–081905년 혁명 참여, 체포·메젠 유배, 탈출
  • 1909–11레닌과 조우, 롱쥐모 당학교 교무주임
  • 1912–13《여성문제에 관하여》 집필, 러시아 잠입·재체포
  • 1917.04'봉인열차' 편으로 레닌과 귀국, 모스크바 시의원 당선
  • 1919–20제노트델(여성부) 초대 책임자, 제1차 국제여성공산주의자회의 조직

프랑수아 코티

François Cot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4–1934 ○ 재정 파탄 뒤 병사

향수 재벌의 돈으로 극우 동맹과 대중지를 함께 사들인 후원자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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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1904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생, 파리에서 향수 사업 시작
  • 1905–1920향수 산업에서 당대 최대급 재산 축적
  • 1922《르 피가로》 인수
  • 1925–1928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에 자금 지원
  • 1928대중지 《라미 뒤 푀플》 창간
  • 1933연대 프랑스 창설과 자금 지원
  • 1934.07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사망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77–1964 ○ 자연사 · 86세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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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장 시아프

Jean Chiappe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8–1940 ✕ 부임 길에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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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로베르 투숑

Robert Toucho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78–1960 ○ 자연사

산악전 경험과 구식 지휘체계의 긴장을 드러낸 프랑스 장군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아isne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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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1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알프스 엽병 대대 지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다수 표창
  • 1928–1930제159보병연대 지휘관, 브리앙송
  • 1932–1935생마상 보병·전차 응용학교 교장
  • 1938–1939리옹 군정장관 및 제14군관구 사령관
  • 1939.11–1940.02제23군단 사령관
  • 1940.02–07제6군 사령관, 아isne 방어와 몽코르네 반격 시기
  • 1941–1942비시 국가평의회 위원 및 리옹 국가재판소 판사

폴 레노

Paul Reynaud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인 1878–1966 ○ 자연사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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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샤를 들레스트랭

Charles Delestrain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79–1945 ✕ 수용소에서 처형

기갑전과 지하군을 잇고 사라진 장군

1943년 6월 9일, 지하군 지휘관 비달은 파리 라뮈에트역에서 체포되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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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독일군 포로
  • 1923–1936기갑부대 지휘관, 대령
  • 1936–1939제3기갑여단장, 준장
  • 1939–1940제7군 전차부대 및 제1기갑집단 지휘관
  • 1942–1943비밀군 초대 지휘관, 암호명 비달
  • 1943–1945나츠바일러와 다하우 수감, 처형

레옹 주오

Léon Jouhaux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79–1954 ○ 병사

31년간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한 생디칼리스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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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 1940–1945비시 정권의 CGT 해산 뒤 가택연금, 1943년 독일 이송·억류
  • 1947–1948공산당 주도 CGT와 재분열, 「노동자의 힘」(FO) 창립 의장
  • 1947–1954프랑스 경제이사회 의장,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
  • 1954.04파리에서 사망

샤를 욍치제르

Charles Huntziger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1 ○ 비행기 사고사

패전과 정전의 군사적 논리를 대표한 장군

그는 1940년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를 대표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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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생시르 졸업, 식민보병 소위
  • 1918동부연합군 작전참모, 바르다르 공세 계획
  • 1924–1928톈진 프랑스 조계 주둔군 사령관
  • 1934–1938레반트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9–1940제2군 사령관, 세당 방면
  • 1940제4군집단 사령관, 6월 22일 정전 프랑스 대표단 의장
  • 1940–1941비시 국방장관, 정전군 총사령관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기계화와 협상의 실무형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협상했지만, 대표단의 권한과 서방의 결단은 이미 제한돼 있었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자동차 수송과 전간기의 기계화 구상을 통해 현대적 제병협동을 밀어붙인 군인이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했지만, 영국의 소극적 협상과 서방의 상충한 계산 속에서 회담은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끝났다. 1940년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서 아르덴 방어와 제9군 붕괴를 마주한 뒤에도 재건과 군사사 저술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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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 1907–1909고등전쟁학교 수학
  • 1916–1918자동차수송국 지휘, 베르됭 보급·교대 조직
  • 1925리프 전쟁 참전
  • 1928독립 기갑사단 구상 제시
  • 1938최고전쟁위원회 위원
  • 1939모스크바 프랑스 군사대표단 단장
  • 1940–1942육군 총사령부 소장, 국가재건 총감, 현역 이탈

피에르 라발

Pierre Laval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83–1945 ✕ 반역죄로 총살

공화정 정치가에서 비시 협력의 설계자로 변한 인물

1942년 노동력 동원을 호소하며 그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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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2사회주의 운동가·변호사
  • 1914–1919하원의원
  • 1923–1944오베르빌리에 시장
  • 1931–1932각료회의 의장
  • 1934–1936외무장관·각료회의 의장
  • 1940.06–1940.12비시 부각료회의 의장
  • 1942.04–1944.08비시 정부 수반
  • 1945고등법원 재판·처형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84–1970 ○ 병사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측근에게 (동승자들의 증언으로 전하는 말), 1938년 9월 30일

빵집 아들 출신의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끈 정치인. 1934년 2월 6일 폭동 이튿날 총리에서 물러났고, 급진당을 이끌고 인민전선에 참여해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을 지냈다. 1938년 4월 총리로 돌아와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해체하고 항의 총파업을 꺾어 인민전선을 끝냈다. 1939년 9월 대독 선전포고를 했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다.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블룸과 나란히 피고석에 섰다가 부헨발트에 억류되었고,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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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37블룸 인민전선 내각의 국방장관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2–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프랑수아 드 라 로크

François de La Rocque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5–1946 ○ 억류 후유증으로 병사

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돌린 불의 십자단의 대령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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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로리앙에서 장군의 아들로 출생
  • 1907–1918생시르 졸업, 모로코 근무와 1차 대전 복무
  • 1919–1928참모 근무를 거쳐 중령으로 예편
  • 1929–1931불의 십자단 가입, 회장 취임
  • 1931–1936불의 십자단을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확대
  • 1934.02.06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해산시킴
  • 1936.06동맹 해산령 뒤 프랑스사회당(PSF) 창당
  • 1936–1939PSF를 프랑스 최대 우파 정당으로 키움
  • 1940–1942페탱 지지, 비시 국민평의회 참여
  • 1942–1943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 운영, 1943년 3월 게슈타포에 체포
  • 1943–1945독일로 이송되어 억류
  • 1945–1946해방 후 프랑스 당국에 구금, 이듬해 병사
  • 1961저항 강제이송자로 사후 인정

앙드레 마르티

André Marty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86–1956 ○ 폐암

흑해 함대 반란을 이끈 해군 기관사, 코민테른 서기국에 오르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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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 1923국제적 석방 캠페인으로 사면,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24–1955프랑스 하원의원 (센에우아즈) 및 PCF 중앙위원
  • 1931–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활동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
  • 1936–1938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정치위원 — 알바세테에서 여단 조직·지휘
  • 1939–1943소련 체류하며 코민테른 업무, 1943년 알제에서 드골 측과 연락
  • 1944파리 해방 후 귀국, 혁명 기도 — 스탈린의 거부권으로 무산
  • 1952마르티-티용 사건: 경찰 간첩 혐의로 PCF에서 제명

피에르 테탱제

Pierre Taittinger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7–1965 ○ 병사

청년애국단을 세운 의원, 거리의 부대와 의사당 의석을 함께 가진 사람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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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918파리 출생, 1차 대전 참전
  • 1919–1940하원의원
  • 1924청년애국단 창설
  • 1925–1936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동맹을 지휘
  • 1934.02.06청년애국단이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로 참가
  • 1940.07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
  • 1943–1944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
  • 1944–1945해방 후 구금되었다가 석방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 사후 원수 추서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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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로제 살랑그로

Roger Salengro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90–1936 ✕ 자살

극우 언론의 중상에 목숨으로 답한 인민전선의 내무장관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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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 1925–1936릴 시장
  •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 1936.11.17릴 자택에서 자살, 장례에 수십만 추모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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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육군 보병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독일군 포로
  • 1932–1937국방최고회의 사무국 장교, 기갑전과 기동전 저술
  • 1940.05–06제4기갑사단 지휘, 준장 승진, 국방·전쟁 담당 국무차관
  • 1940–1943런던의 자유 프랑스 지도자, 프랑스군과 해외 위원회 조직
  • 1943–1944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공동의장 및 의장
  • 1944–1946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의장
  • 1958–1959국무총리,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주도
  • 1959–1969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베르티 알브레히트

Berty Albrech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893–1943 ✕ 고문 뒤 옥중 자살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지하 저항으로 잇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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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간호사 자격 취득
  • 1918–1931네덜란드와 런던에서 생활, 여성주의와 가족계획 운동 접촉
  • 1933–1935여성주의 잡지 《성 문제》 창간·편집
  • 1933–1940독일 망명자 지원, 반파시즘 활동, 앙리 프르네와 협력
  • 1940–1941지하 간행물 《Les Petites Ailes》·《Vérités》 제작
  • 1941–1943콩바 지도부 협력자·사회사업 책임자
  • 1943체포·고문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사망

마르소 피베르

Marceau Piver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95–1958 ○ 병사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쓴 사회당 좌파,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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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4센에마른의 교사 집안,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됨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전쟁이 그를 반군국주의자로 만듦
  • 1924–1935SFIO 파리 연맹과 교원노조 운동
  • 1935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 결성
  • 1936.05「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고
  • 1936–1937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 책임
  • 1938제명 뒤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창당
  • 1940–1946멕시코 망명
  • 1946–1958SFIO 복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서 활동
  • 1958.06파리에서 사망

자크 뒤클로

Jacques Duclos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96–1975 ○ 폐울혈로 사망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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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계 1897–1993 ○ 자연사 · 1970년 제명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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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아ubervilliers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자크 도리오

Jacques Doriot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8–1945 ✕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로 사망

인민전선을 가장 먼저 요구하고 파시스트로 끝난 생드니의 공산주의자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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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우아즈 브렐에서 노동자 집안에 출생
  • 1915–1922생드니의 금속노동자,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투신
  • 1923–1924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지도부, 1924년 하원의원 당선
  • 1925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
  • 1927코민테른 특사로 중국 파견
  • 1931–1937생드니 시장
  • 1934.02–06사회당과의 공동행동 공개 요구, 모스크바 소환 거부, 6월 27일 제명
  • 1936프랑스인민당(PPF) 창당
  • 1941–1944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 참여, 독일군복으로 동부전선 종군
  • 1945.02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로 사망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뒤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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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99–1983 ○ 뇌졸중 · 83세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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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900–1940 ✕ 전사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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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모리스 토레즈

Maurice Thorez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900–1964 ○ 병사

광부의 아들에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인민전선의 설계자

「프랑스 국민은 결코 소련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 NATO 가입을 앞둔 1949년 2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뉴욕 타임스』 1949년 2월 23일 보도)

탄광 소년 노동자 출신으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정치인(1930–1964). 1936년 인민전선을 설계했고 전후 '프랑스식 사회주의로의 길'로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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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2세에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
  • 1919–1920사회당(SFIO) 입당 →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 참여
  • 1930–1964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34년간 당을 이끎
  • 1936인민전선 결성 주도, 블룸 정부의 사회개혁 뒷받침
  • 1939–1944프랑스군 탈영 후 소련 망명, PCF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드골 정부 국무장관 → 부총리(1946–1947)
  • 1950–1953뇌졸중으로 소련에서 치료, 자크 뒤클로가 당 대행
  • 1964서기장 사임 후 명예 의장, 흑해 유람선에서 사망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인 1902–1947 ✕ 비행기 사고사

자유 프랑스의 기갑 지휘관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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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25–1939기병 장교, 모로코 복무 및 전쟁대학 수료
  • 1940자유 프랑스 합류, 드골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파견
  • 1940–1943카메룬·차드 군사 지휘관, 쿠프라·페잔 전역 지휘
  • 1943–1945제2기갑사단 지휘, 노르망디·파리·스트라스부르 해방전 참가
  • 1945–1946극동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일본 항복식 프랑스 대표
  • 1946–1947북아프리카 육군 감찰관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902–1989 ○ 자연사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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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앙리 프르네

Henri Frenay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905–1988 ○ 자연사

비시 지지에서 저항운동으로 이동한 레지스탕스 조직가

“나는 페탱 원수와 이중 역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국민혁명을 믿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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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6생시르 특별군사학교 생도
  • 1935–1938고등전쟁학교 수학, 독일 연구
  • 1939–1940마지노선 제43요새군단 참모장교
  • 1940포로수용소 탈출, 국민해방운동 조직 시작
  • 1941–1943콩바 창립자·지도자, 지하 언론 조직
  • 1943–1945포로·강제이송자·난민 담당 국무위원·장관
  • 1948–1954유럽연방주의자연합 의장
  • 1976회고록 《밤은 끝나리》 출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랑팡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ангфанг
국가보안 기관 소련 프랑스 1907–1990 ○ 자연사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심문관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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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7OGPU·NKVD 방첩 요원
  • 1937–1940NKVD 심문관, 방첩부 부장 보좌
  • 1940–1941수사부장, 그리스 파견
  • 1942–1946전시 작전부서 지휘, 투바·몽골·신장 파견
  • 1946–1955MGB·KGB 간부, 중국 고문
  • 1955–1957해임과 계급 박탈
  • 1957–1972체포, 15년형 복역

앙리 롤탕기

Henri Rol-Tanguy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908–2002 ○ 자연사

파리 봉기를 지휘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1944년 8월 21일, 그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라는 명령을 게시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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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탈보 금속공장 노동자,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 1936파리 지역 금속노동조합 CGT 서기
  • 1937–1938스페인 국제여단 제14여단 정치위원, 에브로 전투 참전
  • 1941–1942파리 지역 무장조직 책임자, FTP 창설 지도부
  • 1943파리 지역 FTP 재편, FFI 지역 참모부 합류
  • 1944파리 지역 FFI 사령관, 파리 봉기 지휘
  • 1945–1962프랑스 육군 중령, 전후 군사 보직
  • 1962–1987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르네 부스케

René Bousquet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909–1993 ✕ 암살

점령자와 협상한 비시 경찰 수장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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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홍수 때 구조 활동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음
  • 1931내무부 차관 피에르 카탈라의 보좌관
  • 1933부지사
  • 1939–1942마른현 지사 및 지역 지사
  • 1942–1943비시 경찰 사무총장
  • 1950년대–1993년금융·언론계 사업가 및 정치적 영향력자

샤를 베텔하임

Charles Bettelheim
이론가 프랑스 프랑스 1913–2006 ○ 자연사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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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 1958EHESS 산하 CEMI 설립
  • 1963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반대
  • 1966–1977프랑스-중국 우호협회 회장
  • 1974–1982『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전3권 출간,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이론가 프랑스 프랑스 1918–1990 ○ 정신병원에서 사망

마르크스에게서 새 대륙을 발견한 사상가: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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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ENS 입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도
  • 1948ENS 철학 조교 임명
  • 1948프랑스공산당(PCF) 입당
  • 1954ENS 문학부 서기 — 학교 운영 담당
  • 1965『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출간 — 구조적 마르크스주의 정립
  • 196868년 5월 당시 우울증으로 병원 입원 — "알튀세르는 무슨 소용인가?"
  • 1970「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발표
  • 1976PCF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포기에 공개 반대
  • 1980정신적 발작 중 아내 엘렌 리트만 교살 — 재판 불능 판정
  • 1990정신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919–1944 ✕ 전투 중 사망

점령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투쟁의 선구자

“티티의 원수를 갚았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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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전투원
  • 1939–1940프랑스 공산당 청년운동 간부
  • 1940–1941점령 프랑스의 지하 공산주의 조직가
  • 1941–1942조직특별부대 군사위원
  • 1942–1943두 지역 FTP 마키 조직자
  • 1943–1944프랑스 전역 FTP 마키 지휘관
  • 1944파리 해방 전후 FTP·FFI 지휘관
  • 1944파비앵 부대 지휘관, 동부 전선 전사
  • 1941.08.21바르베 지하철역에서 독일 해군 장교 알퐁스 모제르 사살
  • 1944.12.27알자스 합셈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

기 모케

Guy Môque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924–1941 ✕ 인질로 처형됨

점령 아래 처형된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

그는 처형 전 편지에 “내 죽음이 무언가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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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파리에서 출생
  • 1930년대 후반카르노 고등학교 학생, 공산주의 청년동맹 활동가
  • 1940.10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프렌 감옥에 수감
  • 1941.01–02무죄 판결 뒤에도 행정구금되어 상테와 클레르보 수감시설로 이송
  • 1941.05샤토브리앙의 쇼아젤 수용소로 이송
  • 1941.10.22샤토브리앙에서 인질로 처형

피에르 브루에

Pierre Broué
연구자 프랑스 프랑스계 1926–2005 ○ 자연사

혁명운동의 기록자

그는 스페인의 혁명을 전쟁의 부수적 사건이 아니라 패배한 사회혁명으로 읽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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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국제공산당에 입당해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시작
  • 1953프랑스 혁명사 연구로 역사학 초기 저술을 발표
  • 1960–1965중등학교 역사·지리 교사
  • 1961에밀 테밈과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 출간
  • 1965–1975그르노블 정치학교에서 현대사 강의, 국제주의 공산주의 조직 활동
  • 1972『독일 혁명, 1917–1923』 출간
  • 1977레옹 트로츠키 연구소 설립
  • 1997『코민테른사, 1919–1943』 출간

앙리 루소

Henry Rousso
연구자 프랑스 프랑스계 1954– ○ 생존

비시와 전쟁 기억의 역사를 다시 쓴 역사가

앙리 루소는 제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와 비시 체제, 그리고 그 기억의 변화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가정이 수에즈 위기 뒤 프랑스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역사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대표작 《비시 증후군》은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협력과 책임을 망각하거나 재구성해 온 과정을 분석했으며, 그는 레지스탕스의 규모와 국민적 단결을 과장하는 기억의 신화를 ‘레지스탕시알리슴’이라 불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과 집단기억, 현재의 정치적 사용을 구별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추적하는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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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1979생클루 고등사범학교 학생
  • 1977역사학 아그레가시옹 취득
  • 1981–현재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자
  • 1988–1990파리 정치대학 강사
  • 1994–2005현대사연구소 소장
  • 2001–2010파리 낭테르대학교 교수
  • 2019–현재테러 역사 국립박물관 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