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뒤 그는 철수하지 않고 그리스에 남아 저항세력과 카이로를 잇는 사절단을 세웠다.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는 영국 육군 장교이자 SOE·MI6 요원, 그리스 정치사 연구자였다. 그는 점령기 그리스에서 ELAS와 EDES를 잇는 영국 군사사절단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저항운동과 전후 국가질서 사이의 접점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활동은 군사 협력이 영국의 왕정 복귀와 영향권 정책으로 기울 수 있었던 긴장을 보여준다. 훗날 의원과 저술가로서 그리스 현대사를 해석했다.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호른 줄러가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 줄러와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1991년 1월 12~13일 밤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스스로 물러나 숨았고, 1월 13일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가 정부를 맡고 있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의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빌뉴스대학에서 경제수학을 전공하고 1981년 경제학 후보 학위를 받았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강의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했고,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후 경제장관과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 2000~2017년 리투아니아 철도 간부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1월 10일~13일)
1991–1992경제장관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2000–2017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2006년까지) 및 부총국장(2006~2017)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