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보수주의 입장이나 보수·기독교민주주의 정당의 활동이 확인되는 인물들입니다. 재정 보수주의, 사회·문화적 보수주의, 의회적 기독교민주주의는 같은 정책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적만으로 한 나라의 모든 우파를 같은 입장으로 묶지 않고, 각 인물의 경력과 시기를 함께 봅니다.

21 명

소속 인물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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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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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Pehr Evind Svinhufvud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내전에서 독일의 개입을 요청한 원로원 수반

유형지 톰스크에서 2월혁명 소식을 들은 그는 경찰서로 걸어가, 나를 여기 보낸 자가 체포되었으니 이제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1917년 12월 핀란드 독립 선언을 이끈 원로원 수반으로 1918년 내전에서 백색정부를 이끌며 독일의 개입을 요청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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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귀족원 대표로 의회 활동 시작
  • 1907–1912핀란드 의회 의장
  • 1914–1917러시아화 반대로 톰스크 유형
  • 1917–1918원로원 수반(초대 정부 수반)
  • 1918섭정(국가 원수)
  • 1930–1931핀란드 총리
  • 1931–1937핀란드 대통령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전쟁을 피하려다 전쟁의 문을 연 유화정책의 설계자

1938년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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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버밍엄 시의원,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1915버밍엄 시장
  • 1916–1917국가복무국장
  • 1923–1924보건부 장관, 재무장관
  • 1924–1929보건부 장관
  • 1931–1937재무장관
  • 1937–1940영국 총리
  • 1938–1939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 주도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Juho Kusti Paasikivi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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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허버트 C. 후버

Herbert Hoover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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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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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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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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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앤서니 이든

Anthony Eden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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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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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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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

Christopher Montague Woodhouse

저항과 제국의 경계에 선 그리스 전문가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뒤 그는 철수하지 않고 그리스에 남아 저항세력과 카이로를 잇는 사절단을 세웠다.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는 영국 육군 장교이자 SOE·MI6 요원, 그리스 정치사 연구자였다. 그는 점령기 그리스에서 ELAS와 EDES를 잇는 영국 군사사절단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저항운동과 전후 국가질서 사이의 접점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활동은 군사 협력이 영국의 왕정 복귀와 영향권 정책으로 기울 수 있었던 긴장을 보여준다. 훗날 의원과 저술가로서 그리스 현대사를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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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영국 왕립포병대에 입대
  • 1941크레타 저항조직 지원을 위한 SOE 임무 수행
  • 1942고르고포타모스 작전의 하를링 부대 부지휘관
  • 1942–1943영국 군사사절단에서 ELAS·EDES와 연락
  • 1943–1945그리스 주재 연합군 군사사절단 지휘
  • 1945–1946아테네 영국대사관 2등서기관
  • 1959–1974옥스퍼드 하원의원, 보수당 정부 각료직 수행
  • 1976『그리스를 위한 투쟁』 출간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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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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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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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

알로이스 모크

Alois Mock

철의 장막을 가른 오스트리아 유럽주의자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호른 줄러가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 줄러와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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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빈대학교 법학 박사
  • 1961–1966연방수상실 유럽경제공동체·유럽자유무역연합 담당관, 파리 OECD 대표부
  • 1966–1969요제프 클라우스 수상 비서실장
  • 1969–1970교육·과학·연구·예술·문화·체육 연방장관
  • 1979–1989오스트리아 국민당 연방당수
  • 1987–1989오스트리아 부총리
  • 1987–1995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1990국방 행정 임시 관장

로널드 라도시

Ronald Radosh

공산주의에서 반공 보수주의로 이동한 역사가

모스크바 문서고의 공개 자료는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역할을 다시 묻게 했다.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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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뉴욕에서 출생
  • 1950년대미국 공산당 주변에서 성장하고 활동
  • 1960년대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신좌파 활동
  • 1970년대미국 현대사와 보수주의 비판을 연구하고 저술
  • 1983『로젠버그 파일』을 공동 저술
  • 2001『스페인 배신』 공동 편집, 스페인 내전의 소련 정책을 분석
  • 2000년대허드슨 연구소에서 연구와 저술 활동

알베르타스 시메나스

Albertas Šimėnas

독립 회복의 경제학자 정치가, 최단명 총리

1991년 1월 12~13일 밤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스스로 물러나 숨았고, 1월 13일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가 정부를 맡고 있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의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빌뉴스대학에서 경제수학을 전공하고 1981년 경제학 후보 학위를 받았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강의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했고,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후 경제장관과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 2000~2017년 리투아니아 철도 간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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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1월 10일~13일)
  • 1991–1992경제장관
  •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 2000–2017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2006년까지) 및 부총국장(2006~2017)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소련 해체의 상실을 국가 회복의 서사로 재구성한 통치자

“소련의 붕괴는 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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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91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장교
  • 1990–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 대외관계위원회 책임자·부시장급 간부
  • 1998–1999연방보안국(FSB) 국장
  • 1999러시아 연방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9–2000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 2000–2008러시아 연방 대통령
  • 2008–2012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 2012–러시아 연방 대통령

오르반 빅토르

Orbán Viktor

1989년 반공청년 지도자에서 '비자유민주주의' 창시자로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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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Fidesz (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공동 창립
  • 1989너지 임레 재매장식 연설; 반대파 원탁회의 Fidesz 대표
  • 1990국회의원, Fidesz 원내대표 (1993까지)
  • 1993–2000, 2003–Fidesz 당수
  • 1998–2002헝가리 총리, NATO 가입 주도
  • 2010–2026총리, 개헌 및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