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6–1938 정부·행정 · 프랑스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관련 역사 사건
대안 올림피아드와 민중 스포츠 연대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독일의 선전 도구로 쓰이는 것을 두고 스포츠계가 갈렸다. 반대 진영은 1928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베를린에 밀렸던 바르셀로나를 대안 개최지로 삼아 1936년 7월 19일부터 26일까지 반파시스트 성격의 인민 올림피아드를 열기로 했다. 스페인·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선수가 등록했고 모두 22개국 6000명이 참가를 신청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와 파시스트 동맹이 베를린 대회를 지지했고, 프랑스공산당은 인민 올림피아드를 공식 지지했다. 사회당의 라그랑주도 이 진영에 섰다.
대회 참가국 최종 예선은 1936년 7월 4일 파리 페르싱 경기장에서 열렸고, 라그랑주는 교통부 장관 피에르 코, 앙드레 말로 등 인민전선 인사들과 함께 이 자리를 직접 주관했다. 노동체육총연맹(FSGT) 소속이나 개인 자격으로 프랑스 선수 1200명이 반파시스트 올림피아드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주에 라그랑주는 가르슈에서 열린 인민 올림피아드 지지 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결국 참가자와 지지자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고, 비용은 각 대표단과 선수 부담으로 남았다. 7월 9일 프랑스의 베를린 대회 참가를 놓는 표결에서 우파 전체가 찬성표를 던졌고, 프랑스공산당을 포함한 좌파 전체가 기권했으며,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프랑스 선수단은 7월 14일부터 바르셀로나로 향했는데, 각 역마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즉흥 시위가 벌어질 만큼 노동자 대중의 지지가 컸다.
개막 직전인 7월 18일 밤, 프랑코의 군사 반란으로 총성이 터졌다. 그 결과 1929년 국제박람회용으로 지어 둔 숙박 시설과 몬주이크 경기장을 쓰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7월 23일 대회 조직위원회는 인민 올림피아드의 취소를 선언했다. 이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선수 중 일부는 군사 반란 진압에 참여했고 부상자와 사망자도 났다.
이 사업은 끝까지 가지 못했지만, 라그랑주가 재임 기간 이어 온 노동자체육총연맹(FSGT)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 1934년 12월 공산주의 계열의 노동체육연맹과 사회당 계열의 노동체조·체육연합이 통합해 출범한 FSGT는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서자 라그랑주의 스포츠·여가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조직이 되었다. 저항 노선에서 협력으로 돌아선 FSGT는 1938년 100개 이상의 클럽과 10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