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전쟁의 장군, 과들루프 원정 사령관
1801~1802년 나폴레옹이 과들루프에 파견한 원정군 사령관.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했으나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고, 반란은 1804년까지 이어졌다.
1770년 메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복무하던 콩티 용기병연대에 5세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혁명을 지지했고 1791년 소위, 1793년 대위, 1794년 기병대장을 거쳐 1796년 클레베르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했다. 오슈 휘하에서 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복무하며 네우비트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800년 모로의 라인 군에서 사단을 지휘해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우회 기습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1801년 라인 군 해산 뒤 바타비아 공화국 기병 총감독이 되었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은 그를 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한 뒤 노예제 강제 재도입을 집행했다.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797–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라인 군 사단장대표
군사·지휘 -
1801–1802
통령정부·제1제국 국가기관과들루프 총독
정부·행정
경력 연표
- 1785콩티 용기병연대 병참하사관
- 1791소위
- 1796클레베르에 의해 준장 승진
- 1797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네우비트 전투 참전
- 1800모로의 라인 군 사단장,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 기습
- 1802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델그레스 저항 진압, 5월 6일 푸앵타피트르 상륙
관련 역사 사건
사후 추앙과 기념의 반전
리슈팡스는 죽은 뒤 오랫동안 공화국과 제국의 군사적 영웅으로 기념되었다. 19세기 전기 작가 샤를 뮐리에가 그를 «공화국에서 가장 용감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평했고, 나폴레옹은 1803년 과들루프의 생샤를 요새를 그의 이름을 따 개칭하도록 명했으며 1810년에는 그의 미망인과 장남에게 제국 남작위를 주었다. 파리 에투알 개선문에 그의 이름을 새기는 결정은 1836년에 내려졌다. 과들루프 델그레스 요새 안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서른둘에 죽었다. 그러나 영광과 조국을 위해 그가 살지 않은 세월이 얼마던가»라는 묘비명이 남아 있다.
이 기념은 후대에 뒤집혔다. 노예제 재도입에서 그의 역할 때문에 과들루프 주민들에게 리슈팡스는 부정적 기억을 상징하게 되었고, 1803년 그의 이름을 얻었던 요새는 1960년 생샤를 요새로, 1989년에는 노예제 재도입에 맞서 저항한 루이 델그레스의 이름을 따 델그레스 요새로 다시 개칭되었다. 2001년 12월 파리는 리슈팡스 거리를 슈발리에 드 생조르주 거리로 바꾸었고, 2004년에는 출생지 메츠가 리슈팡스 부두를 빌체르 부두로 개칭했다. 2014년과 2018년 5월 14일 LKP 집단은 두 차례 대통령에게 그의 유해를 과들루프에서 옮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