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aafse Republiek · 1795–1806

바타비아 공화국

Batavian Republic

네덜란드 7개주 연합공화국을 계승해 1795년 수립된 프랑스의 자매 공화국. 프랑스 혁명군의 침공과 네덜란드 내부 혁명이 함께 낳은 결과였다. 1801년 10월 헌법으로 바타비아 연방으로 개칭되었고 1805년에는 대연금수의 1인 집행부가 들어섰으며, 1806년 6월 홀란트 왕국으로 대체되었다. '바타비아'는 게르만 바타비족에서 온 이름으로, 네덜란드 혈통과 고대의 자유 전승을 내세웠다.

상세

수립

1794~95년 혹한에 피슈그뤼 휘하의 프랑스군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여러 도시에서는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 혁명위원회가 시 정부를 장악했다. 총독 빌럼 5세는 1795년 1월 18일 어선편으로 영국으로 도피했다. 새 공화국은 네덜란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 진정한 대중 혁명의 산물이었으나, 프랑스 혁명군의 무장 지원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자매 공화국'의 첫 사례이자 이후 나폴레옹 프랑스 제국의 일부가 된 의뢰국이었다. 선포일은 출처에 따라 1795년 1월 19일(영·한 위키백과)과 1월 20일(네덜란드 국립문서관)로 갈리며, 같은 나라의 국사 연구에서도 국가로서 공식 선포된 적은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프랑스와의 관계와 내부 갈등

1795년 5월 16일 프랑스와 맺은 가혹한 헤이그 조약으로 영토 할양, 막대한 배상금, 2만 5천 명의 프랑스 점령군 유지 의무를 지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영국·프로이센의 의뢰국에서 프랑스의 의뢰국으로 바뀌었고, 외교와 군사 정책은 프랑스가 좌우했다. 프랑스는 자국의 정치 발전 단계에 맞는 정파를 집권시키기 위해 세 차례 쿠데타를 지원했지만, 성문 헌법 제정 과정은 나폴레옹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군주로 강요하기 전까지 주로 내부 정치적 요인이 주도했다.

개혁

내부 개혁의 핵심은 옛 연방 구조를 단일 국가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1798년 헌법은 네덜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민주적 성격을 지녔으며, 1798년 4월 23일 국민투표에서 153,913 대 11,587로 승인되었다. 이 헌법은 세습 관직과 한직을 폐지하고 관리의 책임성을 규정했으며, 길드 등 내부 통상 장애를 철폐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1801년 쿠데타는 반혁명적 성격을 띠어 자유·평등·박애 문구를 삭제하고 참정권을 축소했으며, 행정부 권한이 강화된 Staatsbewind 체제를 세웠다. 1801년 헌법으로 공화국은 바타비아 연방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전쟁과 종말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을 포함한 국제적 승인을 받았으나, 1803년 전쟁이 재개되자 나폴레옹의 침영 준비에 동원되어 함대와 수송선을 제공하고 경제전을 수행해야 했다. 1803년부터 나폴레옹의 대영 경제전이 네덜란드 무역을 옥죄었다. 1804년 말 프랑스군 사령관 마르몽이 네덜란드 항구 화물에 대한 단속권을 요구하자, Staatsbewind는 1804년 11월 23일 네덜란드 관리가 프랑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금지하며 맞섰고, 이것이 또 다른 바타비아 정권의 종말을 불렀다. 1805년 5월 10일 쉬멜페닌크가 대(大)연금수로 취임해 1인 행정부를 구성했고, 짧은 통치 기간에 이전 정권 10년보다 많은 개혁(1805년 6월 고헐의 일반조세계획, 1805년 7월 지방정부법, 1806년 학교법 등)이 성취되었다. 1806년 6월 4일 쉬멜페닌크가 사임하고, 다음 날 루이 보나파르트가 '홀란트' 왕위 수락을 받아들여 바타비아 공화국은 끝났다. 이어 1810년 7월 네덜란드가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의의

옛 연방 구조를 단일 국가로 대체하고 1798년 민주 헌법과 각료 정부를 도입한 개혁은 1848년 요한 루돌프 토르베케의 헌법 개정으로 이어지는 등 현대 네덜란드 중앙집권 국가의 여러 특징을 예비했다. 프랑스의 의뢰국이면서도 바타비아 정부들은 프랑스 이익과 충돌하는 지점에서도 네덜란드 이익을 지키려 했다.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한국어)
  3. britanni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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