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른 이름: 알프레트 요젭 페르디난트 요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5년 5월 항복: 명령 권한 없는 서명자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자살하고 국가원수직을 이어받은 되니츠 제독은 절망적인 군사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에 대한 부분 항복을 시도했다. 그는 요들을 연합군 사령부가 있는 프랑스 랭스로 파견했는데, 그때 요들의 직함은 국방군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이를 연합국 협의를 깨뜨리려는 시도로 보았고, 모든 연합군에 대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되니츠는 물러섰고 5월 7일 이른 아침 시간 랭스에서 독일 국방군 전체의 무조건 항복이 합의되었다. 요들은 그 자리에서 OKW를 대표해 독일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여기서 요들의 지위가 결정적이었다. 그의 직책은 작전참모장, 곧 참모 직이었고 지휘 권한은 없었다. 보충 의정서는 상위 지휘관들이 두 번째 의식에서 항복을 비준하도록 했고, 특히 영국 측은 1차 세계대전 말의 경우처럼 독일 군사지도부가 패전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할 것을 우려했다. 비준은 5월 8일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의 소련 사령부에서 열렸다. 소련 측은 항복 문서가 독일 침략이 시작된 정부 소재지에서 조인되기를 요구했고, 이 자리에서 독일 측 최고위 대표는 케이텔 원수가 맡았다. 국방군에 대한 실질적 지휘 권한을 가진 자의 서명이 바로 두 번째 의식이 채워야 했던 것이다.

이 국면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요들의 책임 문제와 곧바로 이어졌다. 소련 측 기록은 그가 심문에서 정치인의 결정에 군인이 책임질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고 적고 있는데, 이른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방어 논리였다. 그러나 1943년 10월 30일 미국·영국·소련이 서명한 모스크바 선언 이후, 지휘관이나 정부의 명령에 따른 불법 행위가 행위자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는 모든 4개 기소 사항에서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처형되었다. 또한 그는 5월 13일 케이텔 원수의 체포로 OKW 참모장 자리를 승계했는데, 그 무렵 그 직위의 실질적 권한은 이미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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