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전투와 총통 벙커의 최후
1945년 4월 소련군은 어떻게 오데르강에서 베를린까지 나아가 도시를 함락했고, 그동안 총통 벙커 안의 히틀러와 측근들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최후를 맞았나? 영화 「몰락」이 그린 마지막 열흘은 사실과 얼마나 맞고, 그 화면 밖의 시민과 병사들, 사상자와 점령의 폭력, 5월 8일의 항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945년 4월 16일 붉은 군대는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에서 베를린 공세를 시작했다.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젤로 고지에서 큰 손실을 입고 사흘 만에 돌파했고,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함께 25일 베를린을 포위했다. 총통 벙커의 히틀러는 오지 않을 구원군에 매달리다 22일 패전을 인정했고, 29일 유언을 남긴 뒤 30일 자살했다. 국회의사당 전투 끝에 5월 2일 바이들링이 항복했고, 독일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했다. 소련군 전사자만 8만여 명이었다. 영화 「몰락」은 이 마지막 열흘을 벙커 안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렸다.

1945년 봄, 베를린은 왜 마지막 전장이 되었나?
1945년 1월 12일 붉은 군대는 비스와-오데르 공세를 시작했다. 네 개 전선군(전선군은 소련군의 집단군급 편제다)이 넓은 정면으로 돌파한 뒤 하루 30~40킬로미터씩 서쪽으로 나아가 동프로이센, 단치히, 포즈난을 차지했고, 2월에는 오데르강을 따라 베를린 동쪽 약 60킬로미터 선에 멈춰 섰다. 퀴스트린 교두보에서 베를린까지 가장 짧은 거리는 60킬로미터였다. 같은 시기 서쪽에서는 영미군이 라인강을 건너 루르 공업 지대를 포위했고, 4월 중순에는 선두가 엘베강에 닿았다. 독일은 원료 지대를 잃어 산업 생산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소련 참모본부 정보국은 4월 중순에도 독일군이 사단과 여단 223개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1 2 3
베를린을 누가 차지할지는 군사 문제이면서 전후 질서의 문제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세 연합국 정상은 독일을 네 점령 지구로 나누기로 했지만 베를린 점령 자체는 정하지 않았다. 앞서 합의한 소련 점령 지구의 경계는 베를린 서쪽 150킬로미터에 있었다. 처칠은 붉은 군대보다 먼저 베를린을 차지하자는 생각을 내놓았으나, 서방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전후 소련 세력권에 들어갈 도시를 치느라 병사를 잃을 이유가 없다고 보고 엘베강에서 멈췄다. 서방 연합국이 이 전투에 직접 보탠 것은 주로 1945년의 베를린 폭격이었다. 영국 공군의 모스키토 폭격기는 소련군이 시내에 들어오기 직전인 4월 20~21일 밤까지 36일 밤 연속으로 베를린을 폭격했다. 4 2 1
스탈린에게 베를린은 서둘러야 할 목표였다. 그는 서방 연합국이 자기들이 먼저 점령한 땅을 약속대로 소련 지구에 넘겨줄지 믿지 않았고, 베를린을 쥐지 않고는 그 지구를 빨리 확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히틀러와 독일 핵무기 계획 같은 전리품도 베를린에 있다고 여겼다(실제로는 우라늄과 과학자 대부분이 이미 남서부 하이거로흐로 옮겨진 뒤였다). 4월 1일 스탈린은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주코프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코네프를 모스크바로 불러 이틀 안에 공격 계획을 내라고 했다. 주공은 퀴스트린에서 곧장 베를린으로 향하는 주코프의 몫이었지만, 스탈린은 코네프에게도 진격이 빠르면 남쪽에서 베를린으로 들어갈 여지를 남겼다. 4월 3일 공격일이 4월 16일로 정해졌다. 북쪽 오데르강 하류에는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섰다. 1 4
세 전선군은 병력 약 250만 명(폴란드 제1군 78,556명 포함), 전차 6,250대, 항공기 7,500대, 야포와 박격포 41,600문, 카튜샤 다연장 로켓 차량 3,255대를 모았다. 맞선 독일군은 하인리치의 비스와 집단군(제3기갑군과 제9군)과 남쪽 중부 집단군의 제4기갑군이었다. 무장친위대와 친위대 병력이 섞여 있었고, 14~16세 소년과 60세까지의 남자로 채운 국민돌격대도 ‘마지막 동원’으로 들어와 있었다. 연료와 탄약이 모자랐고 하늘은 소련 공군이 쥐고 있었다. 소련 선전도 이때 방향을 틀었다. 독일군의 소련 침공 뒤 소련 선전은 독일 병사 모두를 나치로 그렸고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모든 독일인에 대한 증오를 설파했지만, 베를린 작전 직전에는 계급적 국제주의의 논조로 돌아갔다. 1 5 4
독일 쪽에서는 3월 9일 「제국 수도 방어 준비를 위한 기본 명령」이 나왔다. 클라우제비츠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33쪽짜리 문서는 둘째 항에서 “제국 수도는 마지막 한 사람, 마지막 한 발까지 지킨다”고 못 박았다. 베를린을 바깥 구역 A~H와 정부 구역 Z(‘성채’)로 나누고, 바깥 차단 지대에서 순환 철도선 안쪽까지 네 겹의 고리를 그렸으며, 민간인에게 계엄과 사형 조항을 적용했다. 3월 20일 비스와 집단군 사령관은 힘러에서 독일군 최고의 방어 전술가로 꼽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로 바뀌었다. 하인리치는 소련군 주공이 오데르강을 건너 동서 고속도로를 따라올 것이라 정확히 보고, 강가 대신 오데르강에서 17킬로미터 서쪽의 젤로 고지에 세 겹의 방어선을 쌓게 했다. 상류 저수지의 물을 터서 봄 해빙으로 젖은 범람원을 늪으로 만들기도 했다. 6 1



젤로 고지에서 포위까지: 베를린의 운명은 어떻게 도시 밖에서 정해졌나?
4월 16일 새벽 붉은 군대는 이 전쟁에서 가장 강한 포격으로 공세를 열었다. 오데르 전선에서는 5미터마다 포 한 문이 있었다는 계산이 나올 정도였다. 공격이 시작되자 포화는 방어선 깊숙이 옮겨 갔고, 돌파 구역에서는 대공 탐조등 143대를 켜 적의 시야를 가리고 아군의 길을 밝혔다. 그러나 하인리치가 주공 정면의 전방 진지를 미리 고지 위로 물려 놓았기 때문에 포격의 상당 부분은 빈 진지를 때렸다. 첫날 보병이 범람원에서 막히자 초조해진 주코프는 오데르강 동쪽에 대기시켰던 두 전차군을 투입했는데, 부대가 뒤섞이면서 혼란이 더 커졌다.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나흘째인 4월 19일에야 젤로 고지의 마지막 선을 뚫었다. 4 2 1
젤로 고지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대규모 정면 공격전 가운데 하나였다. 폴란드 제1군을 포함한 소련군 100만 명 가까이와 전차·야포 2만여 문이 ‘베를린의 관문’을 지키는 독일군 약 10만 명과 전차·야포 1,200문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약 3만 명, 독일군은 약 1만 2천 명이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4월 1일부터 19일 사이에 소련군이 잃은 전차는 2,807대가 넘었고, 그중 적어도 727대가 젤로 고지에서 나왔다. 남쪽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나이세강 방어선을 빠르게 뚫었고, 리발코의 제3근위전차군이 제9군의 등 뒤 뤼벤까지 내달리자 스탈린은 4월 17일 코네프에게 남쪽에서 베를린을 쳐도 좋다고 허락했다. 두 원수의 경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 5 4
4월 19일이 지나자 프랑크푸르트(오데르) 북쪽 젤로 일대와 남쪽 포르스트 일대의 독일 동부 전선은 사라졌다. 두 소련 전선군은 독일 제9군을 프랑크푸르트 서쪽의 거대한 포위망에 가두었다.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인 4월 20일,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포병이 처음으로 베를린 시내를 포격했고, 포격은 도시가 항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전투 동안 소련 포병이 베를린에 퍼부은 포탄의 무게는 서방 연합군 폭격기가 이 도시에 떨어뜨린 폭탄 전체보다 많았다. 같은 날 북쪽에서는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슈테틴과 슈베트 사이에서 만토이펠의 제3기갑군을 공격했다. 1 7
4월 24일 두 전선군의 선두가 베를린 남동쪽에서 만나 포위를 마쳤고, 25일 정오 무렵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제4근위전차군 부대가 하펠강을 건너 서쪽에서 제1벨라루스 전선군 제47군 부대와 만나 고리를 닫았다. 같은 4월 25일, 자도프의 제5근위군 제58근위소총사단이 엘베강 토르가우 부근에서 미국 제1군 제69보병사단과 만났다. 이 ‘엘베의 날’로 독일은 둘로 갈렸다. 이 무렵이면 도시 안의 방어는 함락을 잠시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 전투의 결정적 단계는 이미 도시 밖에서 치러졌고 독일군은 거기서 졌다. 1 8 9
포위된 제9군은 서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4월 24일부터 5월 1일까지 이어진 할베 포위전에서 제9군은 숲을 뚫고 세 겹의 소련군 선을 넘어 벵크의 제12군 쪽으로 나아갔다. 수만 명의 피란민이 함께 움직였다. 할베 묘지에는 전투 뒤 독일군 3만 명 가까이가 묻혔고, 돌파를 막으려던 소련군도 약 2만 명이 죽었다. 민간인 희생은 1만 명에 이르렀을 수 있지만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살아서 제12군 전선에 닿은 독일군은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문헌마다 수치가 다르다. 10 1
총통 벙커는 어떤 곳이었고, 그 안의 지휘부는 무엇을 믿고 있었나?
총통 벙커는 베를린 빌헬름 거리의 옛 총리 관저 뒤뜰 지하에 있던 방공호다. 1936년에 완성된 위쪽의 ‘전방 벙커’와, 그보다 2.5미터 낮은 곳에 1944년 완성된 총통 벙커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계단과 강철 문으로 이어졌다. 총통 벙커는 지하 약 8.5미터에 있었고 지붕 콘크리트 두께가 거의 3미터였다. 약 30개의 작은 방이 늘어선 복도 한쪽에는 발전기실과 전화 교환대, 다른 쪽에는 히틀러의 집무실과 침실, 에바 브라운의 방, 작전 회의실이 있었다. 지하수면 아래라 펌프가 쉬지 않고 돌았고 늘 눅눅했다. 히틀러는 1945년 1월 16일 이곳에 들어왔다. 4월에는 보어만과 괴벨스, 브라운이 합류했고, 마그다 괴벨스와 여섯 자녀는 위쪽 전방 벙커에 머물렀다. 비서 트라우들 융게, 간호사 에르나 플레겔, 경호원이자 전화 교환원 로후스 미슈 같은 지원 인력도 2~3십 명이 있었다. 11
4월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벙커에는 연합국이 갈라져 베를린이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으리라는 헛된 기대가 잠시 퍼졌다.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지상에 나온 것은 4월 20일 생일이었다. 그는 무너진 총리 관저 정원에서 히틀러 청소년단 소년병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달아 주었고, 그날 오후 베를린에 처음 소련 포탄이 떨어졌다. 4월 21일 히틀러는 무장친위대 장군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북쪽에서 소련군 돌출부의 측면을 치고, 남동쪽의 제9군에게 북쪽으로 공격해 협공하라고 명령했다. ‘슈타이너 분견군’은 이름뿐인 잡다한 부대였고 병력은 적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슈타이너는 공격할 수 없다고 밝혔고, 하인리치는 제9군이 당장 서쪽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포위된다고 경고했다. 1 11 12
4월 22일 오후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의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울분에 찬 분노를 터뜨렸다. 장군들을 배신자이자 무능한 자들이라고 몰아붙인 그는 처음으로 전쟁에 졌다고 말했고, 끝까지 베를린에 남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날 그는 친위대 의사 베르너 하제에게 가장 확실한 자살 방법을 물었다. 그를 진정시키려고 요들은 미군과 맞서던 발터 벵크의 제12군을 베를린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노획한 연합군 문서로 미군이 엘베강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리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이 생각에 매달렸고, 몇 시간 뒤 벵크에게 북동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벙커의 희망은 오지 않을 구원군에 걸렸다. 3 1 11
히틀러가 자살하겠다고 했다는 소식은 바깥의 후계자 후보들을 움직였다.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1941년 포고로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다며 제국 지도권을 넘겨받아도 되겠느냐는 전보를 보냈다. 보어만은 이것이 히틀러를 몰아내려는 시도라고 설득했고,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후임 공군 총사령관으로 뮌헨에서 불려 온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은 4월 26일 베를린 상공에서 소련군 대공포에 맞아 크게 다쳤고, 동행한 시험 비행사 한나 라이치가 비행기를 몰아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티어가르텐의 임시 활주로에 내렸다. 같은 무렵 히틀러는 퇴각 명령을 둘러싼 오해로 바로 전날 총살하라고 명령했던 제56기갑군단장 헬무트 바이들링을 4월 23일 베를린 방어 사령관에 앉혔다. 3 7 11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4월 22일 마지막으로 벙커를 찾아 히틀러를 만나고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3월 19일 히틀러가 퇴각할 때 모든 기반 시설을 파괴하라고 내린 「네로 명령」에 맞서 여러 지휘관에게 그것을 따르지 말라고 설득했고, 3월 말에는 파괴 권한을 넘겨받아 산업 시설 폭파를 멈췄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을 끌기 위한 방안도 내놓았다.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이 마지막 방문 때 초토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히틀러에게 고백했다고 썼지만, 역사가 리처드 J. 에번스는 그 대목을 “순전한 창작”이라고 본다. 베를린에서도 히틀러의 명령으로 다리 226개 가운데 128개가 폭파되었고, 일부 노동자는 스스로 친위대의 파괴를 막아 클링엔베르크 발전소와 상수도 시설을 지켰다. 괴벨스는 4월 25일 일기에, 베를린에서의 영웅적 죽음이 5년 안에 히틀러를 전설로, 민족사회주의를 “마지막 희생으로 축성된” 신화로 만들 것이라고 썼다. 13 1 14



시가전은 어떻게 벌어졌나: 누가 베를린을 지켰고 시민은 어디에 있었나?
바이들링이 쓸 수 있는 병력은 크게 줄어든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사단 몇 개를 합쳐 약 4만 5천 명이었다. 여기에 베를린 경찰, 징집된 히틀러 청소년단 소년들, 그리고 국민돌격대가 더해졌다. 국민돌격대는 1944년 9월 군에 있지 않은 16~60세 남자를 징집해 만든 민병대로, 베를린의 4만 명 가운데 상당수는 1차 세계대전 참전자인 노인이었다. 바이들링은 바깥 구역을 A~H 여덟 구역으로 나눴지만 구역 지휘관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없었다. 히틀러는 친위대 여단장 빌헬름 몬케를 총리 관저와 총통 벙커가 있는 정부 구역 Z의 지휘관으로 세웠고, 병력은 2천여 명이었고 그 중심은 라이프슈탄다르테 사단의 히틀러 경호 대대 800명이었다. 다른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4월 24일 베를린에 닿은 것은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가 이끈 프랑스인 친위대 지원병 320~330명뿐이었다. 이들은 ‘노르틀란트’ 사단에 붙어 끝까지 싸웠다. 7 15 1
시민은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전투가 시작될 때 베를린에는 약 270만 명이 남아 있었고 그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남자는 주로 16세 이하 아이와 60세 넘은 노인이었다. 이 밖에 최대 3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강제로 끌려온 ‘동방 노동자’였고 방공호와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3월 초부터는 베를린 방어를 맡은 괴벨스의 명령으로 수만 명의 시민, 주로 여성이 대전차호를 팠다. 마지막 며칠까지도 친위대와 야전 헌병은 즉결 재판과 처형으로 탈영병과 비판적인 시민을 쏘았다. 괴벨스는 방어군 신문 ‘판처베어’를 내어 총통에 대한 충성과 최후 승리를 외쳤다. 4 8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이후 여러 ‘요새 도시’에서 다듬은 시가전 방식으로 싸웠다. 약 80명의 전투단이 6~8명씩 돌격조를 짜고 야포의 직접 지원을 받았다. 독일 무장친위대는 거리 모퉁이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대신 위층과 지붕에 저격수와 기관총을, 지하실 창에는 판처파우스트(어깨에 메고 쏘는 일회용 대전차 무기)를 든 병사를 두어 전차를 노렸고, 히틀러 청소년단과 국민돌격대도 이를 따라 했다. 소련군은 전차를 길 양쪽에 붙여 서로 엄호하게 하고, 152밀리와 203밀리 곡사포를 직사로 쏘아 건물을 허물었으며, 벽에 구멍을 뚫어 집에서 집으로, 지붕에서 지붕으로 나아갔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이 효과적이었지만, 피란하지 못한 시민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많은 비전투원이 죽었다. 7
4월 23~24일 추이코프의 제8근위군과 카투코프의 제1근위전차군, 베르자린의 제5충격군이 남동쪽에서 들어왔다. 24일 아침 텔토 운하를 건너는 공격에는 정면 1킬로미터마다 650문꼴인 포 3천 문이 동원되었다. 26일에는 템펠호프 공항을 두고 ‘뮌헤베르크’ 기갑사단과 싸웠다. 북쪽과 서쪽에서는 보그다노프의 제2근위전차군, 쿠즈네초프의 제3충격군, 리발코의 제3근위전차군이 조여 왔다. 두 전선군의 경쟁은 아군 오인 사격으로까지 번졌다. 앤터니 비버는 추이코프가 리발코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군의 왼쪽 날개를 리발코 부대 앞으로 밀어 넣어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4월 27~28일 코네프 부대 대부분은 프라하 공세를 위해 남쪽으로 돌려졌고, 도심 점령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다. 7 4
4월 28일 독일군이 쥔 땅은 알렉산더 광장에서 샤를로텐부르크까지 폭 5킬로미터도 안 되는 띠로 줄었다. 소련군의 진격을 늦추려고 란트베어 운하 밑의 칸막이가 폭파되어 지하철 터널에 물이 들어찼는데, 이 사건의 피해는 문헌마다 크게 다르다. 수천 명이 익사했다는 당시의 증언이 있는 반면, 1945년 10월 터널의 물을 뺀 뒤 나온 시신은 대부분 익사가 아니라 부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는 조사도 있고, 사망자를 1~2백 명으로 보는 서술도 있다. 4월 30일부터는 폴란드 제1보병사단(‘코시치우슈코’ 사단)이 보병이 모자란 소련 전차부대를 도와 샤를로텐부르크의 바리케이드와 베를린 공과대학, 티어가르텐역을 빼앗았다. 무너진 전차여단 가운데는 사상률이 90퍼센트를 넘은 곳도 있었다. 7 1 4

국회의사당의 붉은 깃발은 어떻게 승리의 상징이 되었나?
국회의사당은 1933년 2월 화재 뒤 쓰이지 않은 채 폐허로 남아 있었다. 나치에게 이 건물은 의회 민주주의의 약함을 뜻했고, 독일군은 이곳을 특별히 중요한 거점으로 보지 않았지만 상당한 수비대를 두었다. 반면 소련에게 국회의사당은 제3제국 그 자체의 상징이었고, 모스크바의 5월 1일 메이데이 행진 전에 빼앗기를 바랐다. 4월 28일 밤 쿠즈네초프의 제3충격군 부대가 손상된 몰트케 다리를 건넜고, 29일부터 포병 지원 없이 내무부 건물을 방마다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치며 나아갔다. 30일 아침 공격은 해자처럼 물이 찬 쾨니히 광장과 2킬로미터 떨어진 동물원 대공포탑 위의 128밀리 대공포에 막혔다. 1 7 16
4월 30일 오후 6시 제150소총사단의 세 연대가 포격 엄호 속에 정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수병과 친위대, 히틀러 청소년단이 섞인 약 1천 명의 수비대가 위층에서 총을 쏘아 중앙 홀은 살육장이 되었고, 싸움은 잔해로 미로가 된 건물 안에서 방에서 방으로 이어졌다. 모스크바는 그날 밤 10시 50분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올렸다고 발표했지만, 비버는 “5월 1일 전에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는 데 매달린 소련 선전의 과장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여러 조가 여러 시각에 깃발을 꽂았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지하실의 독일군은 5월 1일 밤까지 버텼고, 약 300명이 항복했으며 200명이 죽고 500명이 다쳐 쓰러져 있었다. 소련군이 건물 전체를 장악한 것은 5월 2일이었다. 7 16 1
전 세계에 알려진 사진, 두 소련 병사가 국회의사당 지붕에 깃발을 꽂는 장면은 건물을 빼앗은 다음 날인 5월 2일 종군 사진가 예브게니 할데이가 연출해 찍은 것이다. 할데이는 삼촌이 식탁보 세 장으로 꿰매 준 큰 깃발을 들고 올라가 지나가던 병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식 이야기는 이 사진을 그루지야인 멜리톤 칸타리야와 러시아인 미하일 예고로프가 처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올린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할데이 자신의 말로는 깃발을 다는 병사는 18세의 알렉세이 코발료프였다. 사진이 연출이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소련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베를린 전투와 동부 전선 전체가 소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는 상징이 되었다. 폴란드는 5월 2일 폴란드군이 베를린 전승 기념탑에 국기를 올린 날을 기려 국기의 날로 지킨다. 16 1

히틀러와 벙커의 사람들은 마지막 사흘을 어떻게 보냈나?
4월 27일이면 베를린과 바깥의 통신은 거의 끊겨, 벙커는 전화선과 공영 라디오에 기대 소식을 들었다. 4월 28일 히틀러는 로이터를 인용한 BBC 보도로 친위대 전국지도자 힘러가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를 통해 서방 연합국에 항복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힘러는 헝가리 유대인 학살을 멈추는 대가로 부분 항복을 제안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를 반역으로 여기고 힘러의 체포를 명령했으며, 벙커에 있던 힘러의 친위대 연락관이자 에바 브라운의 제부 헤르만 페겔라인은 탈영 혐의로 친위대 즉결 재판을 거쳐 총리 관저 정원에서 총살되었다. 그날 밤 그라임과 라이치는 연습기를 타고 베를린을 빠져나갔다. 벙커에서 한 블록 떨어진 포츠담 광장까지 들어온 소련군을 공군으로 공격하고 “배신자” 힘러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3 14 7 11
4월 29일 자정이 지나 히틀러는 벙커의 지도실에서 에바 브라운과 간소한 민사 혼례를 올렸다. 이어 비서 트라우들 융게를 다른 방으로 불러 개인 유언과 정치적 유언을 받아쓰게 했고, 새벽 4시 무렵 크렙스, 부르크도르프, 괴벨스, 보어만이 증인으로 서명했다(받아쓰기가 혼례 전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서명 시각은 일치한다). 정치적 유언에서 히틀러는 전쟁의 책임을 “국제 유대인과 그 조력자”에게 돌리고, 독일인에게 인종법을 지키며 “모든 민족의 독살자인 국제 유대인”에게 가차 없이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이 문서를 그가 끝까지 유대인 절멸을 자기 업적으로 내세운 증거로 읽는다. 유언은 괴링과 힘러를 반역자로 당에서 내쫓고,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괴벨스를 총리에 지명했다. 3 11 14
29일 오후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르티잔에게 처형되고 그 시신이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언에도 적었듯, 그는 자기와 아내가 “구경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힘러가 친위대 의사 슈툼프에거를 통해 준 청산가리 앰플을 의심하게 된 그는 하제에게 시켜 기르던 개 블론디에게 시험했고, 개는 바로 죽었다. 그날 밤 크렙스는 요들에게 벵크의 선봉이 어디 있느냐고 무전으로 물었고, 30일 새벽 돌아온 답은 벵크의 선봉이 슈빌로 호수 남쪽에서 막혀 베를린 공격을 이어 갈 수 없으며 제9군 주력은 포위되었다는 것이었다. 4월 28일 밤 벵크는 이미 카이텔에게 전 전선에서 밀려났다고 보고했고, 카이텔은 구원 시도를 그만두어도 좋다고 허락한 뒤였다. 3 11 7
4월 30일 오전 소련군은 벙커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몬케는 정부 구역이 이틀을 버티지 못한다고 보고했고, 바이들링은 수비대의 탄약이 그날 밤 떨어질 것이라며 다시 돌파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허락은 오후 1시 무렵 떨어졌다. 점심 뒤 히틀러와 브라운은 보어만, 괴벨스, 비서들과 작별했고, 오후 2시 반쯤 집무실로 들어갔다. 부관 오토 귄셰가 문 앞을 지켰다. 시종 하인츠 링게와 보어만이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소파에 앉은 채 죽어 있었다. 귄셰의 증언으로 히틀러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자기 권총을 쏘았고,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었다. 오후 3시 반 무렵의 일이다. 두 시신은 히틀러의 지시대로 담요에 싸여 비상구로 정원에 옮겨졌고 휘발유를 부어 태웠다. 소련군의 포격 속에 저녁 6시 반까지 이어진 화장 뒤 남은 유해는 얕은 포탄 구덩이에 묻혔다. 3 11 17
유언에 따라 총리가 된 괴벨스는 보어만과 함께 되니츠에게 히틀러의 죽음을 알렸다. 5월 1일 새벽 4시 무렵 육군 참모총장 한스 크렙스가 제8근위군 사령관 추이코프를 찾아가 히틀러의 죽음을 알리고 휴전과 ‘평화 협상’을 꺼냈다. 스탈린은 사건 13시간 뒤 이 소식을 보고받고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으며, 크렙스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오후 6시 새 독일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소련군은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그날 늦은 오후 마그다와 요제프 괴벨스는 여섯 자녀를 죽였다. 친위대 치과의사 헬무트 쿤츠는 아이들에게 모르핀을 주사했을 뿐이고 청산가리는 마그다와 슈툼프에거가 먹였다고 진술했다. 저녁 8시 반 무렵 부부는 정원으로 올라가 목숨을 끊었는데, 총을 쏘았는지 청산가리를 깨문 뒤 확인 사격을 받았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3 11 7 8 18
5월 1일 밤 11시 무렵 바이들링의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북서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몬케가 이끈 첫 무리에는 융게와 다른 비서들, 영양사 콘스탄체 만치아를리, 의사 에른스트귄터 솅크 등이 있었다. 비서 세 사람은 엘베강까지 갔지만 나머지는 이튿날 쇤하우저 거리의 지하실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혀 스메르시(소련 방첩 기관)의 심문을 받았다. 보어만은 슈프레강을 건넜으나 그날 죽었다.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 아르투어 악스만은 바이덴다머 다리 근처에서 보어만의 시신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다른 서술은 그가 레르터 역 근처에서 소련군에게 막히자 독약을 먹었다고 한다. 1972년 발견된 그의 유해는 1998년 DNA로 확인되었다. 벙커에 남은 크렙스와 부르크도르프는 5월 2일 새벽 자살했다. 머리에 총을 쏘았다는 서술과, 시신에 상처가 없어 독약을 먹었다는 미슈의 증언과 소련군 검시 기록이 엇갈린다. 19 11 14 20




5월 2일 베를린 항복에서 5월 8일까지: 전쟁은 어떻게 끝났나?
5월 2일 새벽 1시 소련군은 제56기갑군단이 휴전을 요청하는 무전을 잡았다. 그날 아침 소련군이 총리 관저를 점령했고, 바이들링은 오전 6시 참모들과 함께 항복했다. 8시 23분 추이코프 앞에 선 그는 베를린 수비대에게 소련군에 항복하라고 명령했고, 추이코프와 제1벨라루스 전선군 부사령관 소콜롭스키의 지휘 아래 항복 명령을 글로 썼다. 명령은 확성기와 라디오로 도심의 독일군 부대에 전해졌다. 동물원 대공포탑의 수비대 350명이 걸어 나왔고, 일부 친위대가 항복을 거부한 건물은 포격으로 무너졌다. 아침 9시 벙커의 전기 기술자 요하네스 헨첼이 들어오는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그는 위층 야전 병원에 전기와 물을 대려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1 11 2 7
도시 밖에서는 싸움이 이어졌다. 할베 포위망을 빠져나온 제9군 생존자와 피란민을 받아들인 벵크의 제12군은 서쪽 엘베강으로 물러났다. 역사가 앤터니 비버는 벵크의 동쪽 공격이 처음부터 베를린 주민과 수비대에게 미군 쪽으로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려는 것이었다고 본다. 5월 7일 오후 벵크는 소총 사격을 받으며 엘베강을 건너 미국 제9군에 항복했다. 북쪽에서는 만토이펠의 제3기갑군과 티펠스키르히의 제21군이 5월 2~3일 미군에 항복했다. 1일 밤 함부르크 방송은 히틀러가 수도를 지키다 영웅으로 죽었다고 거짓으로 알리며 후계자 되니츠를 소개했다. 되니츠는 영미군에게만 부분 항복하면서 동쪽의 부대를 서쪽으로 빼내는 길을 택했다. 이 전략으로 독일군 약 180만 명이 소련군 포로가 되는 것을 피했지만, 동쪽에서는 5월 8일까지 피가 흘렀다. 1 21 3
플렌스부르크에 자리 잡은 되니츠 정부는 나치즘을 부정하지도, 당을 해산하지도, 지도자들을 구금하지도 않았기에 소련도 미국도 그를 독일 국가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다. 5월 4일 뤼네부르크 황야에서 북서 독일·네덜란드·덴마크의 독일군이 영국군에, 5일에는 바이에른의 독일군이 미군에 항복했다. 소련이 서방이 단독 강화를 노린다고 의심할 것을 안 아이젠하워는 더 이상 부분 항복을 받지 않고 모든 연합국에 대한 동시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5월 7일 새벽 2시 41분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요들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 대표 수슬로파로프 장군도 서명했지만, 모스크바의 승인을 받지 못한 서명이었다. 22
소련은 랭스 문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문안이 연합국이 합의한 것과 다르고 수슬로파로프에게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이유는 항복이 소련 인민의 결정적 기여를 온전히 보여 주는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이어야 하며, 독일 침략에 짓밟힌 해방 지역이 아니라 침략이 시작된 곳 베를린에서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랭스 문서는 독일군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포로가 되라고 분명히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곧바로 동의했다. 5월 8일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의 소련 군정 본부에서 주코프가 주재한 가운데 카이텔이 육해공군 대표와 함께 서명했고, 서방 쪽은 테더가, 프랑스와 미국 대표는 증인으로 서명했다. 실제 서명은 9일 새벽 1시 가까이 이루어졌지만 문서는 8일로 소급되었고, 소련의 공식 발표는 8일 밤 10시 43분이었다. 항복은 중부 유럽 시간 8일 밤 11시 1분에 발효되었고,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이미 9일이었다. 소련과 러시아가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기념하는 까닭이다. 22 1

이 전투의 대가는 얼마였고, 점령 직후 베를린 시민은 무엇을 겪었나?
사상자 수치는 연구마다 크게 다르고 모두 추정치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가 공개된 소련 문서로 집계한 바로는, 젤로 고지와 할베를 포함한 베를린 작전(4월 16일~5월 2일)에서 소련군은 81,116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280,251명이 다치거나 병들어, 손실이 모두 35만여 명이었다. 전차와 자주포도 약 1,997대를 잃었다. 존 에릭슨은 5월 8일까지 세 전선군의 사상자를 304,877명으로 잡는다. 독일군 전사자는 독일 연구에서 9만 2천~10만 명으로 보지만, 소련 사령부의 보고는 전사 약 40만 명, 포로 38만~48만 명을 주장했고, 이 수치는 부풀려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작전 전체에서 민간인 약 12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며, 지금도 공사장에서 알려지지 않은 집단 매장지가 나온다. 1 2 8 4
소련 군 당국은 시내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생활 기반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주코프는 4월 27일 베르자린을 점령 지역의 독일 민정 조직 책임자로 세웠고, 블록마다 독일인 책임자를 두어 잔해를 치우게 했다. 베르자린의 명령으로 붉은 군대의 급식소가 문을 열어 많은 독일 군인과 시민이 그 음식을 받았고, 범주별 배급량과 배급표가 정해졌으며, 병원과 약국에 의약품이 공급되었다. 그래도 굶주림은 계속되어 6월 베를린 시민은 하루 1,240칼로리 배급의 64퍼센트밖에 받지 못했고, 100만 명 넘게 집이 없었다. 소련군은 항복 뒤 집집을 돌며 소방관과 철도원까지 제복 입은 사람을 모두 체포했다. 1 7 8
같은 시기 소련군 병사들은 대규모로 독일 여성을 강간했다. 이것은 기록과 증언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베를린에서만 적어도 10만 명이 강간당했다는 추정은 그 뒤 몇 달 동안 급증한 낙태 건수와 병원 기록에 근거한 것이며, 그 여파로 약 1만 명이 죽었다고 본다. 의사들의 추정을 모은 코닐리어스 라이언은 2만~10만 명으로 썼다. 독일 전역으로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200만 명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므로 모든 수치는 추정이다. 다른 연합국 군대도 강간을 저질렀고(미군에 대해서도 연구가 있다), 학자 다수는 그 대부분이 소련 점령군에 의한 것이었다고 본다. 1945년 5월 2일 제1벨라루스 전선군 군 검사 야체닌의 보고서는 무분별한 총살과 약탈이 크게 줄었으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하다고 적었다. 베르자린은 약탈과 강간에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처벌을 정했다. 23 4 8 1
연구자들은 원인을 여러 겹으로 설명한다. 노먼 나이마크는 증오 선전, 고향에서 겪은 고통, 흔한 과음을 꼽고, 1945년 중반 이후 적발된 병사는 체포부터 처형까지 처벌받았지만 강간은 1947~48년 겨울 소련 군정이 병사를 막사에 격리할 때까지 이어졌다고 쓴다. 비버는 복수심만이 아니라 여성까지 전리품으로 여긴 의식을 지적하며, 소련군이 수용소와 강제 노동에서 풀려난 소련·폴란드 여성까지 강간했다고 쓴다. 역사가 올레크 부드니츠키는 닫힌 나라에서 온 병사 수백만 명이 처음 본 독일의 부유함에 분노했다고 말한다. “그토록 부유한 독일인들이 왜 러시아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독일이 소련 땅에서 벌인 학살과 파괴에 대한 복수의 감정, 전쟁이 남긴 둔감함과 자기 지휘부의 가혹한 대우도 함께 거론된다. 동프로이센에서 이를 목격한 솔제니친은 “우리가 복수하러 독일에 왔다는 것을 너도 잘 안다”고 썼다. 23 1 4
이 문제의 기억도 정치에 얽혔다. 처음에 소련과 동독 선전은 강간의 대부분을 소련군으로 변장한 독일인의 짓이라고 했고, 러시아의 마흐무트 가레예프 장군은 비버의 저작을 “괴벨스의 선전보다 나쁘다”고 비난했다. 2015년에는 러시아 일부 학교에서 비버의 책이 금지되었다. 반대로 러시아의 올레크 르제셉스키 교수는 독일 민간인에 대한 범죄로 붉은 군대 장교 4,148명과 “상당수의” 병사가 처벌받았다고 반박했다. 한편 나치 선전은 10년 넘게 소련군을 “아시아의 무리”로 그리는 인종적 고정관념을 퍼뜨렸고, 히틀러는 4월 16일 “유대-볼셰비키 숙적”이 독일 여성을 욕보이고 남자를 시베리아로 끌고 갈 것이라며 병사들을 몰아붙였다. 피해 여성 대부분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1954년 마르타 힐러스의 일기 『베를린의 한 여인』이 나왔을 때 독일 사회는 그것을 외면했고, 이 책은 저자가 죽은 2001년 뒤에야 다시 나와 널리 읽혔다. 23 14 8
영화 「몰락」은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빼거나 바꾸었나?
「몰락」(Der Untergang)은 베른트 아이힝거가 각본과 제작을, 올리버 히르슈비겔이 연출을 맡은 2004년 독일 영화다. 브루노 간츠가 히틀러,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가 융게, 코리나 하르포우흐와 울리히 마테스가 괴벨스 부부를 연기했다. 각본의 바탕은 역사가 요아힘 페스트의 『몰락』(Der Untergang, 2002)과 융게의 회고록 『마지막 시간까지』(Bis zur letzten Stunde, 2002)이며, 슈페어의 회고록 『제3제국의 내부』(영어판 Inside the Third Reich), 게르하르트 볼트와 솅크, 지크프리트 크나페의 회고도 참고했다. 1955년 「최후의 10일」 이후 처음으로 독일 영화가 히틀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융게가 1942년 11월 늑대굴 사령부에서 비서로 뽑히는 장면으로 시작해, 늙은 융게가 다큐멘터리 「사각지대: 히틀러의 비서」에서 “이 괴물을 제때 알아보지 못한” 젊음이 변명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실제 인터뷰로 끝난다. 24 20
줄거리의 큰 뼈대는 이 글에서 본 사실과 대체로 맞는다. 4월 20일의 생일과 첫 포격, 슈타이너의 공격이 없었다는 보고에 이은 분노, 괴링의 전보와 체포 명령, 힘러의 협상과 페겔라인 처형, 혼례와 유언, 블론디 독살 시험, 크렙스와 추이코프의 협상, 괴벨스 자녀의 죽음, 바이들링의 항복이 차례로 나온다. 하루 전 총살 명령을 받았던 바이들링이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 되는 반전도 기록과 맞는다. 히틀러가 장군들에게 고함치는 장면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남아 있고, 이 장면은 훗날 자막만 바꾼 수많은 패러디 영상의 소재가 되었다. 벙커 간호사 에르나 플레겔은 작은 오류가 있지만 대체로 정확하다고 평했고, 미슈는 사실은 맞지만 “미국식으로” 과장되었다며 벙커 안은 대개 조용했고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했다. 24 20
바뀐 부분도 분명하다. 영화의 히틀러 청소년단 소년 페터 크란츠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향 마을에서 독일 병사들을 구했다는 12세 소년 알프레트 체히를 바탕으로 만든 인물이다. 영화에서 융게는 페터와 함께 자전거로 베를린을 빠져나가지만, 실제의 융게는 5월 1일 몬케의 무리와 함께 벙커를 떠나 엘베강까지 갔다가 서방 연합군 진영에 닿지 못해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6월 9일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감옥에서 소련군 경비병들에게 독일군이 그들 가족에게 저지른 일을 듣고서야, 그녀는 동부 전쟁에 대해 안다고 믿은 것 대부분이 선전부가 들려준 이야기였음을 깨달았다. 크렙스와 부르크도르프가 총으로 자살하는 장면, 마그다 괴벨스가 총에 맞아 죽는 듯한 장면은 독살이었다는 증언과 어긋나고, 괴링 전보의 영화 속 문안도 실제 전보와 거의 다르다. 미슈는 아이들을 벙커에 두고 죽이기로 한 것이 부부의 공동 결정이 아니라 마그다의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24 20 19
무엇을 빼고 누구를 어떻게 그렸는지가 더 큰 논쟁거리였다. 아이힝거는 홀로코스트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고 수용소의 비참을 영화로 보여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 작가 자일스 맥도너는 친위대 장교 몬케와 솅크를 호의적으로 그렸다고 비판했다. 몬케는 영국군 포로를 학살한 보름하우트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되었고, 솅크는 다하우 수용소의 약초 농장을 만들었으며 그가 관여한 영양제는 마우트하우젠-구젠 수용소 수감자 370명에게 시험되어 일부가 기아 부종으로 죽었다. 히르슈비겔은 이 혐의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볼프강 슈뢰터는 영화가 슈페어의 범죄 가담을 언급하지 않아 슈페어 신화를 퍼뜨린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슈페어의 ‘고백’ 장면은 에번스가 창작이라고 본 회고록 대목을 따른 것이다. 소련군의 강간도 넌지시 비칠 뿐 분명히 다루지 않는다. 24 20 25 13 23
개봉 전후 독일에서는 “괴물을 인간으로 보여 줘도 되는가”(《빌트》)라는 물음이 퍼졌다. 히틀러 전기 작가 이언 커쇼는 비서에게 다정하다가도 다음 순간 수백만 명의 죽음을 냉혹하게 결정하는 히틀러를 그린 이 영화를 “훌륭한 역사극”이라고 평하고, 극우 주변부 말고는 누구도 이 히틀러에게 공감하기 어렵다고 썼다. 역사가 헤르만 그라믈도 파괴 의지와 현실 부정을 정확히 그렸다고 보았다. 반면 역사가 미하엘 빌트는 지킬 수 없는 ‘진정성’의 약속으로 영화가 스스로를 사료처럼 꾸민다고 비판했고, 한스 몸젠과 하네스 헤어도 비판에 가세했다. 빔 벤더스는 폭력을 거리낌 없이 보여 주는 영화가 히틀러와 괴벨스의 죽음만은 비켜 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예우를 했다고 지적했다. 입문자에게 이 영화는 벙커 안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마지막 열흘이며, 바깥 도시의 시민과 소련 병사, 그리고 이 정권이 저지른 범죄의 전모는 화면 밖에 있다는 점을 기억할 만하다. 24 20

베를린 전투와 히틀러의 죽음은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되나?
소련에게 베를린 점령은 대조국전쟁의 마지막 장이었다. 소련 땅을 침략한 나라의 수도에서 전쟁을 끝냈다는 사실이 곧 승리의 의미였다. 베를린과 그 근교에서 싸운 402명이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주코프와 코네프는 각각 세 번째와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4월 22일부터 5월 2일까지 베를린 점령에 참가한 약 110만 명에게 ‘베를린 점령’ 메달이 주어졌다. 국회의사당의 깃발 사진은 이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폴란드도 자국 군대가 베를린 전투에 참가한 것을 기념한다. 1 16
비판적 평가도 있다. 독일어권 서술은 독일이 이미 진 전쟁에서 히틀러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라고 명령해 수천 명의 소년과 노인을 국민돌격대로 희생시켰다는 점과 함께, 스탈린 역시 미군보다 먼저 베를린을 차지해 선전상의 승리를 얻으려고 서둘러 수많은 병사를 희생시켰다고 지적한다. 젤로 고지에서 주코프의 성급한 전차 투입이나 도심을 둘러싼 두 원수의 경쟁은 이 비용을 키운 요인으로 꼽힌다. 다른 한편 두 원수가 동시에 밀고 들어간 것이 베를린의 함락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함께 있다. 또 역사가 요하네스 휘르터는 이 전투의 군사적 경과는 자세히 연구되었지만, 그 지옥 속 시민의 운명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4
히틀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상당 부분 소련 자신이 만든 것이다. 스메르시는 5월 초 정원에서 히틀러와 브라운의 치아 유해를 찾아냈고, 히틀러 치과의사의 조수 케테 호이저만과 기공사 프리츠 에히트만이 11일까지 그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소련은 정보를 막고 엇갈린 이야기를 냈다. 6월 5일에는 시신을 검사해 보니 청산가리로 죽었다고 했다가, 9일에는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고 탈출했을 것이라고 했으며, 스탈린은 7월에 그가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의도적인 기만 공작으로 본다. 영국 정보 당국의 의뢰를 받은 휴 트레버로퍼의 조사는 1947년 『히틀러의 마지막 날들』로 나왔고, 서독 법원은 증인 42명을 따로따로 신문한 끝에 1956년 그가 1945년 4월 30일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데 “조금의 의심도 없다”며 사망 증명서를 냈다. 3
그 뒤의 과학적 검증도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 1972년 법치의학자들이 소련이 공개한 자료로 치아 유해가 진짜임을 확인했고, 2017년 프랑스 법의학자 필리프 샤를리에가 러시아 문서고의 치아와 턱뼈 조각이 1944년 히틀러의 엑스선 사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밝혔다. 한때 히틀러의 것이라던 두개골 조각은 2009년 검사에서 여성의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것은 소련의 잘못된 분류일 뿐 생존의 증거가 아니다. 2025년에는 집무실 소파의 혈흔이 친척의 DNA와 비교되어 히틀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FBI와 CIA도 1950년대 중반까지 생존 제보를 조사했으나 어느 것도 믿을 만하다고 보지 않았다. 히틀러가 살아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음모론이다. 1970년 KGB 의장 안드로포프의 승인으로 마그데부르크에 묻혀 있던 괴벨스 가족 등의 유해는 파내어 태워진 뒤 강에 뿌려졌다. 신나치의 성지가 될까 두려워서였다. 3 11
전투의 결과는 전후 유럽의 모습을 정했다. 연합국은 독일을 네 점령 지구로 나누었고, 4개국은 6월 5일 베를린 선언으로 독일에 대한 최고 권력을 넘겨받았다. 소련 점령 지구는 이후 동독이 되었고, 독일의 분단은 미국과 소련이 이끈 두 진영의 냉전으로 이어졌다. 그 분단은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장벽으로 눈에 보이게 되었다. 총통 벙커가 있던 자리는 소련군이 총리 관저 건물을 헐어 버린 뒤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1980년대 말 주택 단지를 지으면서 남은 지하 구조도 대부분 부서졌다. 2006년에야 그 자리에 추모가 아닌 평범한 역사 기록으로서 안내판 하나가 세워졌다. 그 제막식에는 벙커에 마지막까지 있었던 로후스 미슈가 참석했다. 22 3 19 11
결과
베를린 함락으로 민족사회주의 독일은 지휘 능력을 잃었고, 히틀러의 자살과 5월 2일 수비대 항복에 이어 5월 8일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무조건 항복해 유럽의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소련군은 공식 집계로 8만여 명이 죽는 등 35만 명이 넘는 손실을 입었고, 민간인도 십만 명 이상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점령 직후 소련군의 대규모 강간과 약탈이 시민을 덮쳤다. 독일은 네 점령 지구로 나뉘었고, 히틀러의 죽음은 소련의 기만 공작 탓에 오래 의혹에 싸였으나 증언과 유해 검증으로 확인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45.03.09베를린 방어 기본 명령
독일군이 「제국 수도 방어 준비를 위한 기본 명령」을 냈다. 클라우제비츠 작전이라 불린 이 문서는 베를린을 마지막 한 사람, 마지막 한 발까지 지키라고 하며 도시를 A~H 구역과 정부 구역 Z로 나누고, 시민에게 계엄과 사형 조항을 적용했다.
- 21945.03.20하인리치의 비스와 집단군 지휘
힘러를 대신해 방어 전술의 대가로 꼽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비스와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소련군 주공이 오데르강을 건너 고속도로를 따라올 것이라 보고, 강가를 버리고 젤로 고지에 세 겹의 방어선을 쌓게 했다. 상류 저수지의 물을 터서 범람원을 늪으로 만들기도 했다.
- 31945.04.01스탈린의 모스크바 회의
스탈린이 주코프와 코네프를 모스크바로 불러 이틀 안에 베를린 공격 계획을 내라고 했다. 주공은 퀴스트린에서 곧장 나아갈 주코프에게 맡겼지만, 코네프에게도 빠르면 남쪽에서 베를린으로 들어갈 여지를 남겼고, 4월 3일 공격일을 16일로 정했다.
- 41945.04.12루스벨트 사망 소식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총통 벙커에 들어왔다. 연합국이 서로 갈라지고 베를린이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으리라는 헛된 기대가 잠시 퍼졌지만,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의 진격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히틀러는 조언자들의 만류에도 이미 베를린에 남기로 한 뒤였다.
- 51945.04.16오데르 공세 개시
새벽 붉은 군대가 이 전쟁에서 가장 강한 포격과 대공 탐조등 143대로 공격을 열었다. 하인리치가 전방 진지를 미리 물려 포격의 상당 부분이 빈 진지를 때렸고, 주코프는 첫날 두 전차군까지 넣었지만 젤로 고지 앞에서 막혔다. 폴란드 제1군도 이 공세에 함께했다.
- 1945.04.17코네프에게 열린 베를린
나이세강 방어선을 빠르게 뚫은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에서 리발코의 제3근위전차군이 독일 제9군 뒤의 뤼벤까지 내달렸다. 스탈린은 코네프에게 남쪽에서 베를린을 공격해도 좋다고 허락했고, 두 원수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주코프는 이 결정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 61945.04.19젤로 고지 돌파
나흘째에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젤로 고지의 마지막 선을 뚫었다. 소련군 약 3만 명, 독일군 약 1만 2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베를린 앞에는 흩어진 독일군 부대만 남았고 제9군은 포위될 처지에 놓였다. 4월 1~19일 소련군의 전차 손실은 2,807대를 넘었다.
- 71945.04.20히틀러의 생일과 첫 포격
히틀러가 56번째 생일에 마지막으로 지상에 나와 총리 관저 정원에서 히틀러 청소년단 소년병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주었다. 그날 제1벨라루스 전선군 포병이 처음으로 베를린 시내를 포격했고, 포격은 도시가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 같은 날 클라우제비츠 작전이 발동되었다.
- 81945.04.22히틀러의 패전 인정
슈타이너의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가 장군들을 비난하며 처음으로 전쟁에 졌다고 말하고, 베를린에 남아 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요들의 제안에 따라 벵크의 제12군에 베를린 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날 그는 하제에게 가장 확실한 자살 방법도 물었다.
- 91945.04.23바이들링의 베를린 방어 사령관 임명
히틀러가 퇴각 명령을 둘러싼 오해로 바로 전날 총살 명령을 내렸던 제56기갑군단장 헬무트 바이들링을 베를린 방어 사령관에 앉혔다. 그가 맡은 병력은 지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약 4만 5천 명에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이었다. 하루 전 임명된 전임자 케터는 곧바로 물러났다.
- 101945.04.24–
05.01 할베 포위전베를린 남동쪽 숲에 갇힌 독일 제9군이 피란민과 함께 서쪽 벵크의 제12군 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할베 묘지에 독일군 3만 명 가까이가 묻혔고 소련군도 약 2만 명이 죽었으며, 살아서 빠져나간 독일군은 2만 5천~3만 명으로 전한다.
- 111945.04.25베를린 포위 완성과 엘베의 날
두 소련 전선군이 베를린 서쪽에서 만나 포위의 고리를 닫았다. 같은 날 자도프의 제5근위군 부대가 토르가우 부근 엘베강에서 미국 제1군 부대와 만나 독일은 남북으로 갈렸고, 벙커에 남은 연합국 분열의 기대도 꺼졌다. 이 만남은 미소 협력의 상징으로 남았다.
- 121945.04.26그라임과 라이치의 착륙
괴링 대신 공군 총사령관으로 불려 온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이 베를린 상공에서 대공포에 맞아 다쳤다. 동행한 시험 비행사 한나 라이치가 비행기를 몰아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티어가르텐의 임시 활주로에 내려 두 사람은 벙커로 갔다. 이틀 뒤 두 사람은 다시 베를린을 빠져나갔다.
- 131945.04.28힘러의 협상과 페겔라인 처형
로이터를 인용한 BBC 보도로 힘러가 베르나도테를 통해 서방에 항복을 제안한 사실이 알려졌다. 히틀러는 힘러의 체포를 명령했고, 힘러의 연락관이자 에바 브라운의 제부 헤르만 페겔라인은 탈영 혐의로 즉결 재판을 받고 총살되었다. 힘러는 헝가리 유대인 학살을 멈추는 대가로 부분 항복도 제안했다.
- 141945.04.29혼례와 유언
자정이 지나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혼례를 올리고 융게에게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새벽 4시 무렵 서명된 정치적 유언은 전쟁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괴링과 힘러를 내쫓았으며, 되니츠를 대통령에, 괴벨스를 총리에 지명했다. 증인은 크렙스, 부르크도르프, 괴벨스, 보어만이었다.
- 151945.04.30히틀러의 자살
오후 3시 반 무렵 히틀러가 집무실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었다. 두 시신은 그의 지시대로 정원으로 옮겨져 휘발유로 태워졌다. 같은 날 저녁 소련 제150소총사단이 국회의사당 안으로 돌입했다. 부관 귄셰가 집무실 문을 지켰다.
- 161945.05.01크렙스의 협상과 괴벨스 일가의 죽음
새벽 크렙스가 추이코프를 찾아가 히틀러의 죽음을 알리고 휴전을 꺼냈으나 스탈린은 무조건 항복만 요구했다. 오후 괴벨스 부부가 여섯 자녀를 죽이고 저녁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밤에는 벙커 사람들이 돌파를 시도했다. 저녁 6시 새 정부가 항복을 거부하자 소련군은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 171945.05.02베를린 수비대 항복
소련군이 총리 관저를 점령했고 바이들링이 오전 6시 항복한 뒤 추이코프 앞에서 수비대에 항복 명령을 내렸다. 국회의사당 건물 전체가 소련군 손에 들어왔고, 그날 할데이는 지붕의 깃발 사진을 연출해 찍었다. 폴란드군도 전승 기념탑에 깃발을 올렸다.
- 181945.05.07랭스 항복 문서와 벵크의 엘베 도하
새벽 2시 41분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요들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으나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벵크는 제9군 생존자와 피란민을 이끌고 엘베강을 건너 미군에 항복했다. 소련 대표 수슬로파로프의 서명은 모스크바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 191945.05.08카를스호르스트의 무조건 항복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가 주재한 가운데 카이텔과 육해공군 대표가 최종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서명은 9일 새벽에 이루어졌지만 8일로 소급되었고, 항복이 발효된 밤 11시 1분은 모스크바 시간으로 이미 5월 9일이었다. 서방 쪽은 테더가 서명했다.
관련 인물 42명
소련 (붉은 군대·폴란드 제1군)14명
집행 · 지휘9
퀴스트린 교두보에서 주공을 맡아 젤로 고지를 큰 손실 끝에 돌파하고 베를린 도심을 점령했다. 5월 8일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최종 항복 서명을 주재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이반 코네프1897–1973나이세강을 빠르게 돌파해 4월 17일 남쪽에서 베를린을 칠 허락을 받았고, 포위를 완성했다. 주코프와 경쟁하다 4월 말 부대 대부분을 프라하 공세로 돌렸다.
제2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베를린 북쪽 오데르강 하류에서 만토이펠의 제3기갑군을 공격해 엘베강과 발트해 쪽으로 밀어냈다. 1월에는 약탈과 강간에 군법회의나 총살로 처벌하겠다는 명령을 냈다.
제8근위군 사령관바실리 추이코프1900–1982남동쪽에서 템펠호프와 란트베어 운하를 거쳐 도심으로 들어갔다. 5월 1일 크렙스의 휴전 제안을 받았고, 5월 2일 바이들링의 항복을 받아 수비대 항복 명령을 쓰게 했다.
제1근위전차군 사령관미하일 카투코프1900–19764월 24일 포 3천 문의 엄호 속에 텔토 운하를 건넜고, 추이코프와 함께 템펠호프 공항과 란트베어 운하를 넘어 도심으로 들어갔다.
제3근위전차군 사령관파벨 리발코1894–1948제9군 뒤의 뤼벤까지 내달려 코네프가 베를린을 칠 길을 열었고, 남서쪽에서 시내로 들어갔다. 도심으로 가는 길을 추이코프 부대에 막혔다.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세묜 보그다노프1894–1960베를린 북쪽을 돌아 지멘스슈타트 쪽에서 시내로 들어갔고, 폴란드 제1군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공격했다.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드미트리 렐류셴코1901–1987코네프의 전차군으로 나이세강 돌파 뒤 북서쪽으로 나아가 베를린 서쪽 포위망을 닫는 데 참여했다.
폴란드 제1군 사령관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1902–1973폴란드 제1군을 이끌고 젤로 고지 공격에 참가한 뒤 베를린 북쪽을 돌아 엘베강으로 나아갔다. 폴란드 제1군 병력은 베를린 시내의 티어가르텐 전투에도 참가했다.
참여4
5월 2일 추이코프와 함께 바이들링이 수비대 항복 명령을 글로 쓰게 했다.
제5근위군 사령관알렉세이 자도프1901–1977그의 제58근위소총사단이 4월 25일 토르가우 부근 엘베강에서 미국 제1군 부대와 처음 만났다.
소련 최고사령부 연락 창구알렉세이 안토노프1896–1962항복 협상 동안 아이젠하워와 연락하며 랭스 문서를 받았고, 소련은 그 문서를 인정하지 않고 베를린에서 다시 서명하게 했다.
종군 작가일리야 에렌부르크1891–1967모든 독일인에 대한 증오를 설파한 그의 구호에서, 베를린 작전 직전 소련 선전은 계급적 국제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국민돌격대)26명
지도부3
1월 16일부터 총통 벙커에서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냈다. 4월 22일 처음 패전을 인정했고, 29일 유언을 남긴 뒤 30일 오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전장관·베를린 방어 책임자요제프 괴벨스1897–1945시민을 대전차호 공사로 내몰고 끝까지 싸우라고 선동했다. 유언에 따라 하루 동안 총리였고, 항복을 거부한 채 5월 1일 아내와 함께 자녀를 죽이고 자살했다.
히틀러의 후계 대통령카를 되니츠1891–1980유언으로 대통령이 되어 플렌스부르크에 정부를 꾸렸다. 서방에만 부분 항복하며 동쪽 부대를 서쪽으로 빼내다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였다.
집행 · 지휘8
벙커 밖에서 벵크와 부세에게 구원 공격을 재촉하다 4월 28일 밤 벵크의 공격 중단을 허락했다. 5월 8일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최종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국방군 작전참모장알프레트 요들1890–19464월 22일 벵크의 제12군을 베를린으로 돌리자고 제안했고, 30일 새벽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5월 7일 랭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베를린 방어 사령관헬무트 바이들링1891–1955하루 전 총살 명령을 받았다가 4월 23일 베를린 방어를 맡았다. 30일 돌파 허락을 받았고, 5월 2일 추이코프에게 항복해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했다.
비스와 집단군 사령관고트하르트 하인리치1886–1971젤로 고지 방어를 설계해 전방 진지를 미리 물렸다.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제3기갑군의 퇴각을 허락해 4월 말 해임되었다.
육군 참모총장한스 크렙스1898–1945벙커에서 구원군을 독촉하고 유언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5월 1일 추이코프를 찾아가 휴전을 꺼냈다가 무조건 항복 요구에 빈손으로 돌아왔고, 2일 벙커에서 자살했다.
정부 구역 전투 지휘관빌헬름 몽케1911–2001총리 관저와 벙커가 있는 구역 Z를 2천여 명으로 지켰다. 4월 30일 이틀을 버티지 못한다고 보고했고, 5월 1일 밤 첫 돌파조를 이끌다 붙잡혔다.
제12군 사령관발터 벵크1900–1982히틀러가 마지막 희망을 건 구원군이었으나 슈빌로 호수에서 막혔다. 할베에서 빠져나온 제9군 생존자와 피란민을 이끌고 5월 7일 엘베강을 건너 미군에 항복했다.
슈타이너 분견군 사령관펠릭스 슈타이너1896–19664월 21일 북쪽에서 소련군을 반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병력이 없어 공격하지 못했다. 이 보고가 4월 22일 히틀러의 분노와 패전 인정을 불렀다.
참여11
괴링의 전보를 반역으로 몰았고 유언의 집행인이 되었다. 5월 2일 벙커를 빠져나가다 죽었으며, 유해는 1972년 발견되어 1998년 확인되었다.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1900–19453월까지 비스와 집단군을 지휘했다. 베르나도테를 통해 서방에 항복을 제안한 것이 알려지자 히틀러가 체포를 명령하고 유언에서 반역자로 내쫓았다.
제국 원수·공군 총사령관헤르만 괴링1893–1946히틀러가 자살을 말하자 후계자로서 지도권을 넘겨받겠다는 전보를 보냈다가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체포 명령을 받았다.
군수장관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네로 명령」에 맞서 산업 시설 파괴를 막으려 했고, 4월 22일 마지막으로 벙커를 찾았다. 그때 히틀러에게 명령 불복종을 고백했다는 회고록 대목은 창작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석 장관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1887–1977괴벨스가 죽은 뒤 되니츠 정부에서 정부 수반 격인 수석 장관을 맡았다.
히틀러의 육군 수석 부관빌헬름 부르크도르프1895–1945히틀러의 유언에 증인으로 서명했고, 히틀러의 시신을 확인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5월 2일 크렙스와 함께 벙커에서 자살했다.
마지막 공군 총사령관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1892–1945괴링 대신 공군 총사령관으로 불려 와 4월 26일 베를린 상공에서 다친 채 벙커에 닿았다. 28일 밤 힘러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이치와 함께 빠져나갔다.
시험 비행사한나 라이치1912–1979다친 그라임 대신 비행기를 몰아 4월 26일 티어가르텐의 임시 활주로에 내렸고, 28일 밤 그라임과 함께 연습기로 베를린을 빠져나갔다.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아르투어 악스만1913–1996히틀러의 시신을 본 사람 가운데 하나다. 히틀러가 입안에 총을 쏘았다는 그의 주장은 치아 유해에 화약 흔적이 없어 부정되었다. 돌파 때 바이덴다머 다리 근처에서 보어만의 시신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히틀러의 아내에바 브라운1912–19454월 벙커에 들어와 히틀러와 함께 죽기를 택했다. 4월 29일 히틀러와 혼례를 올렸고, 30일 오후 청산가리를 먹고 그와 함께 죽었다.
괴벨스의 아내마그다 괴벨스1901–1945여섯 자녀와 함께 전방 벙커에 머물며 아이들을 빼내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5월 1일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독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격 · 기록3
히틀러의 유언을 받아 적었고 벙커의 마지막 날들을 증언했다. 5월 1일 몬케의 무리와 빠져나갔다가 6월 체포되었다. 그녀의 회고록과 인터뷰가 영화 「몰락」의 바탕이 되었다.
히틀러의 친위대 부관오토 귄셰1917–2003히틀러가 자살할 때 집무실 문을 지켰고 시신을 확인했으며 화장을 지켜보았다. 5월 2일 소련군에 붙잡혀 히틀러의 죽음에 관해 오래 심문받았다.
총리 관저 응급 병원 의사에른스트귄터 솅크1904–1998총리 관저 지하 응급 병원에서 일하다 몬케의 돌파조와 함께 붙잡혔다. 그의 회고가 영화 「몰락」에 쓰였고, 영화가 그를 호의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