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티 미클로시

Horthy Miklós
헝가리 헝가리 1868–1957 ○ 망명지에서 사망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1944년까지 헝가리를 다스린 섭정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반유대주의 국가정책과 1944년 추방

호르티 섭정기 헝가리 정부는 유대인을 공적·경제적·문화적 생활에서 배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1920년 대학 입학 정원 제한법에 이어 1938년 법은 일부 직종과 경제 부문에서 유대인 비율을 제한했고, 1939년 법은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며 참정권과 고용 제한을 강화했다. 1941년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혼인 및 성관계를 금지했다. 정부는 1939년부터 유대인 남성을 군사노동대에 강제 편입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 노동부대원들을 전선 인근 동유럽, 특히 우크라이나에 배치했다. 이들은 차별 표식을 달고 군복·식량·의료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1944년 3월 독일 점령 전에 약 2만 5천~4만 2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44년 3월 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독일 추방 전문가들과 함께 유대인 등록, 황색별 착용, 지방의 통과 게토 수용과 철도 이송을 조직했다. 5월 15일부터 7월 9일까지 헝가리 헌병대와 독일 당국은 약 43만 7천 명을 147대의 열차로 추방했고, 약 42만 명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보내졌다. 호르티는 7월 7일 추방 중지를 명령했으며, 부다페스트 주변에서 이틀 더 계속된 이송은 7월 9일 중단됐다.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헝가리 정부 협력자들은 뒤에도 소규모 이송을 이어갔다. 8월 호르티는 총리 스토여이를 해임하고 새 내각을 구성했다. 10월 15일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지만 독일 당국은 그를 구금하고 아들의 목숨을 위협해 페렌츠 살러시가 이끄는 화살십자당 정부를 세우도록 강요했다. 이 정부 아래 헝가리는 독일 편에서 전쟁을 계속했고, 화살십자당 민병대는 부다페스트 유대인들을 다뉴브강에서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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