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독일

58 명

해당 인물

이론가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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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이론가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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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이론가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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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이론가 독일 독일 1826–1900 ○ 자연사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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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40–1913 ○ 자연사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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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46–1919 ○ 급환으로 사망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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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50–1932 ○ 자연사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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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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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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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으로 사망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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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2–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71–1919 ✕ 살해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의원, 혁명의 첫 순교자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 반전 팸플릿(1915)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차관에 유일하게 반대한 제국의회 의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을 창립했다. 1919년 1월 봉기 후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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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출간 — 이 저술로 요새금고형
  • 1912–1916제국의회 의원 — 1914년 12월 전쟁공채 표결의 유일한 반대표
  • 1916노동절 반전 시위로 체포, 징역형
  • 1918.1111월 혁명 —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사회주의공화국' 선포
  • 1918.12–1919.1스파르타쿠스단·KPD 공동 창립, 1월 봉기
  • 1919.1의용군에 체포되어 룩셈부르크와 함께 살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72–1918 ✕ 처형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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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독일 1873–1905 ✕ 살해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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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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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876–1960 ○ 자연사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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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외국 정치가 독일인 독일계 1876–1967 ○ 자연사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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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예브게니야 보그다노브나 보시

Евгения Богдановна Бош
좌익 반대파 소련 독일 1879–1925 ✕ 자살

첫 여성 소비에트 정부 수반, 혁명과 병마 사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로 진격하자 동료들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보시는 싸우지 않고 도시를 넘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강제로 대피시켜야 했다.

독일계 볼셰비키로,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를 맡아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었다. 망명 시절 레닌의 민족문제 노선에 맞섰고, 좌익 반대파 46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투병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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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가입, 볼셰비키 분파 활동
  • 1907–1911키예프에서 지하혁명운동, 키예프 위원회 서기
  • 1912–1914체포, 시베리아 유형, 탈출·망명
  • 1914–1917스위스 망명, '보지 그룹'으로 레닌과 민족문제 논쟁
  • 1917.04–07남서지역 당위원회 의장, 제6차 당 대회 대표
  • 1917.12–1918.03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 겸 내무인민비서
  • 1918–1919펜자 당위원회 의장, 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
  • 1923–1924좌익 반대파 합류, 46인 선언 서명

하인리히 브란들러

Heinrich Brandler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81–1967 ○ 자연사

혁명 봉기를 취소한 KPD 의장이자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공동 창립자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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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카자흐스탄 유배, 모스크바 VSNKh 근무
  • 1929KPD 제명, 탈하이머와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국제적 우익반대파 형성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주창
  • 1949–1956서독 귀환,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 창립·지도

파울 레비

Paul Levi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83–1930 ○ 폐렴 중 추락사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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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루돌프 뤼터스

Rudolf Lüters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83–1945 ○ 포로수용 중 사망

파르티잔전쟁을 지휘한 독일 국방군 장성

뤼터스는 파르티잔의 전투 사기가 “놀라울 만큼 높다”고 평가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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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제국군 제118보병연대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중대·대대 지휘
  • 1920–1933국가방위군 제15보병연대 및 제5사단 복무
  • 1933–1938제1프로이센보병연대 지휘, 보충군관구 감찰
  • 1941–1942제223보병사단 사단장,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3크로아티아 독일군 사령관, 네레트바·수테스카 공세 지휘
  • 1943제15산악군단 초대 군단장
  • 1944–1945군에서 명예 전역, 소련군 포로로 수용 중 사망

아우구스트 탈하이머

August Thalheimer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84–1948 ○ 자연사 · 아바나

독일공산당의 주요 이론가이자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 분석가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멤버이자 1920년대 초반 당의 주요 이론가. 1923년 '독일 10월' 봉기 계획 당시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당을 이끌었으나 실패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강의했으며, 부하린과 함께 코민테른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1929년 KPD에서 축출된 후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고, 보나파르트주의에 기초한 독자적 파시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33년 이후 프랑스·쿠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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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좌파 언론 편집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반전 선전으로 징집·투옥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초기 주요 이론가
  • 1923브란들러와 함께 KPD 공동 지도, '독일 10월' 실패로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모스크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쑨원대학에서 연구·강의
  • 1929KPD에서 제명,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이론 활동 지속

프란츠 할더

Franz Halder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84–1972 ○ 자연사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획하고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주조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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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이론가 독일 독일 1885–1977 ○ 노환

아직-아닌 것의 철학자: 『희망의 원리』로 인간 해방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사유하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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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57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교수로 강제 은퇴
  • 1961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 망명 —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
  • 1967독일 서적상 평화상 수상
  • 1968–1970s68운동과 해방신학에 영향, 루디 두치케와 교류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경제 운영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숙청 처형 · 복권 1957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영국 언론인 아서 랜섬이 1919년 슈미트의 인민위원부를 방문했을 때의 인상: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극도로 깨끗하고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독일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운동 조직가였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맡았고,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지원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소비에트 노동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전시공산주의부터 네프까지 소련 노동 정책의 제도적 기틀을 수립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독립된 계급 조직에서 국가 기구로 편입시키는 국가화를 주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으나, 우익 편향에 가담했다가 곧 이탈하였고,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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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에른스트 텔만

Ernst Thälmann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86–1944 ✕ 처형

11년 독방에서도 굴하지 않은 히틀러의 개인적 정치수

“힌덴부르크를 찍는 자는 히틀러를 찍는 것이고, 히틀러를 찍는 자는 전쟁을 찍는 것이다.” — 대통령 선거(1932)

독일공산당(KPD) 의장. 함부르크 항만 노동자 출신으로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정당으로 성장시켰다. 나치 집권 후 체포되어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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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0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 SPD, USPD를 거쳐 KPD로
  • 1925–1933KPD 의장, 적색전선전사동맹 지도
  • 1925, 1932대통령 선거 출마
  • 1933게슈타포에 체포 — 11년 독방
  • 1944.8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부헨발트에서 총살

카를 코르슈

Karl Korsch
이론가 독일 독일 1886–1961 ○ 뇌질환 · 자연사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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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 1938『카를 마르크스』 출간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깊은 영향
  • 1950「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 선언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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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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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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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빌리 뮌첸베르크

Willi Münzenberg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89–1940 ✕ 의문사

나치의 실체를 출판으로 폭로한 '붉은 백만장자'이자, 스탈린과 결별한 코민테른 최고의 선전가

“슈탈린, 너는 배신자다!” —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에 대한 뮌첸베르크의 반응

코민테른 최고의 대중선전가. 국제노동자원조와 반제국주의연맹을 설립하고, 1933년 『갈색서』로 라이프치히 방화의 나치 조작을 폭로했다. 스탈린주의와 결별 후 의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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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합 서기장
  • 1919–1921청년 코민테른 초대 서기장
  • 1921–1937국제노동자원조(IAH/Межрабпом) 창립자·지도자
  • 1924–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KPD, 헤센-나사우)
  • 1927–1935반제국주의연맹 공동창립자·지도자
  • 1933–1939반파시즘 지하출판·국제연대운동 지휘 (파리)
  • 1939–1940『디 추쿤프트』 발행인, 반나치·반스탈린 독립노선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국가보안 기관 소련 독일 1889–1951 ○ 뇌졸중 · 자연사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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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에른스트 로이터

Ernst Reuter
외국 정치가 독일 독일계 1889–1953 ○ 자연사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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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발터 모델

Walter Model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91–1945 ✕ 루르 포위망에서 권총 자살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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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1–1955 ○ 옥사, 25년형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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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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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이론가 독일 독일 1892–1940 ✕ 망명 중 모르핀 과다복용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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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893–1973 ○ 자연사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 가구공 출신으로, 1912년 사민당에서 시작해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활동했고, 1945년 소련과 함께 귀국해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창당을 주도했다. 1950년부터 당 제1서기로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결단했고, 1963년 신경제체계로 동구권 최고 생활수준을 실현했다. 1971년 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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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KPD 대표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오토 그로테볼

Otto Grotewohl
정부 수반 동독 독일 1894–1964 ○ 자연사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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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4–1966 ○ 자연사

파리를 넘겨 파괴 명령을 거부한 독일 장군

1944년 8월 25일 그는 파리 주둔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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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왕립 작센군 제107보병연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19–1939제국방위군 장교, 제16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
  • 1939–1940제16공수보병연대 지휘관, 폴란드·네덜란드 전역
  • 1941–1942제16보병연대 지휘관, 크림·세바스토폴 전투
  • 1943제11기갑사단 및 제48기갑군단 지휘관, 동부전선
  • 1944제76기갑군단·제84군단 지휘관, 이탈리아·노르망디
  • 1944대파리 Wehrmacht 사령관 겸 파리 군정관, 8월 25일 항복
  • 1944–1947트렌트파크와 미국 포로수용소에 억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

Friedrich Ebert junior
사회주의권 지도자 독일 독일계 1894–1979 ○ 자연사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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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국가보안 기관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 도쿄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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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33상하이 정보망
  • 1933–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5–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1944.11체포, 도쿄에서 처형
외국 정치가 독일 독일계 1897–1977 ○ 자연사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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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란게마크

Георгий Эрихович Лангемак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독일 1898–1938 ✕ 처형 · 복권 1955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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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 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 1923–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 1928–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 1934–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 1937–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 1955/1991사후 복권(1955), 사회주의노동영웅 추서(1991)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98–1956 ○ 심장마비로 사망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로 연극을 계급투쟁의 무기로 만든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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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 수상
  • 1924베를린으로 이주, 도이체스 극장 연극부 조수
  • 1928『서푼짜리 오페라』 초연, 1920년대 베를린 최대 흥행작
  • 1933나치 독일을 떠나 15년간의 망명 시작
  • 1947할리우드에서 HUAC에 증언, 다음날 미국을 떠남
  • 1949헬레네 바이겔과 동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 창립
  • 1954스탈린 평화상 수상
이론가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으로 사망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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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비소련 혁명가 동독 독일 1907–2000 ○ 자연사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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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아네마리 도에르

Annamarie Doherr
외국 정치가 서독 독일인 1909–1974 ○ 심장마비로 사망

울브리히트의 '장벽 부인'을 끌어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기자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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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함부르크 대학 법학 수학 시작
  • 1934함부르크 국제정치 연구소 견습
  • 1936함부르크 세계경제자료원 근무
  • 1942Wirtschafts-Ring 편집자로 베를린 이주
  • 1943Transocean-Europapress 중앙편집부 편집자
  • 1945소련 통제 베를린 방송(Berliner Rundfunk) 합류
  • 1946베를린 방송 'Zeitecho' 편집장
  • 1949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서베를린 특파원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사회주의권 지도자 독일 독일 1912–1994 ○ 망명지 사망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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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71–1989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총서기
  • 1976–1989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89대중 시위 속에서 실각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913–1991 ○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

나치의 리옹 게슈타포 책임자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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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친위대 입대, 보안방첩대 복무
  • 1940–1941암스테르담 보안방첩대, 유대인·공산주의자 탄압
  • 1942디종 파견, 점령 프랑스 보안 업무
  • 1942–1944리옹 게슈타포장, 레지스탕스 탄압과 유대인 강제이송
  • 1947–1951미군 방첩대 정보원
  • 1951–1983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활동
  • 1987리옹 재판, 반인도적 범죄 유죄 및 종신형
  • 1991리옹 교도소에서 사망
외국 정치가 독일 독일계 1913–1992 ○ 자연사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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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보리스 빅토로비치 라우셴바흐

Борис Викторович Раушенбах
이론가 소련 독일계 1915–2001 ○ 자연사

수용소에서 보스토크까지: 우주비행 제어의 개척자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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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 수학 및 글라이더 연구
  • 1937–1941RNII (로켓연구소) 엔지니어 — 코롤료프 휘하 유도탄 비행제어
  • 1942–1946타길라그 강제수용소 수감 — 볼호비티노프 설계국에 계산 제공
  • 1946–1948니즈니타길 특별정착 — 켈디시 산하 계산국 근무
  • 1948–1954NII-1 연구원 — 켈디시 지도하 진동 연소 이론 연구
  • 1955–1959OKB-1 — 코롤료프 지도하 우주선 방향제어 선구적 연구
  • 1960–1973OKB-1 부서장 — 루나·보스토크·화성·금성·소유즈 유도체계 총괄
  • 1959–197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교수 및 이론역학 주임
  • 1978–2001과학아카데미 우주개척자 유산위원회 위원장 · 예술이론·신학 연구

헬무트 그뢰트루프

Helmut Gröttrup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독일 독일 1916–1981 ○ 자연사

페네뮌데에서 고로도믈랴까지, R-7의 개념적 선조를 설계한 독일인 로켓 기술자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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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V-2 유도 제어 부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
  • 1945–1946뷰로 그뢰트루프 소장, 블라이헤로데 (소련 점령지구)
  • 1946노르트하우젠 연구소 독일 측 책임자, 이후 중앙공장 총책임자
  • 1946–1950NII-88 분소 1호 소장, 고로도믈랴 섬
  • 1954–1958연구원, SEL (슈투트가르트)
  • 1970–1980GAO 전무이사, 기제케 앤 데브리언트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국가보안 기관 독일민주공화국 독일 1923–2006 ○ 자연사

냉전 정보전의 장기 설계자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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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3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
  • 1933–1943소련 망명, 모스크바와 코민테른 학교에서 수학
  • 1943–1945모스크바 독일인민방송 편집자·방송원
  • 1949–1951독일민주공화국 모스크바 대사관 초대 참사관
  • 1952–1986대외정보기관 IWF와 HVA 국장
  • 1953–1986국가보안부 장관 제1차관
  • 1986–1990퇴임 후 회고록 집필과 개혁 논쟁 참여
  • 1990–2006망명과 재판을 거쳐 베를린에서 사망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외국 정치가 미국 독일 1923–2023 ○ 자연사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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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귄터 샤보프스키

Günter Schabowski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929–2015 ○ 국경 사망 유죄 · 사면

베를린 장벽을 실수로 무너뜨린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

기자회견에서 '언제 발효됩니까?'라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즉시, 지체 없이.'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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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FDGB 기관지 『트리뷔네』 편집자로 언론 경력 시작
  • 1952SED 입당
  • 1967–1968모스크바 CPSU 당학교 수학
  • 1978–1985SED 중앙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 1981–1989SED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후보위원, 1984년 정위원
  • 1985–1989SED 동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 1989.11.09기자회견에서 여행규정 즉시 발효 발언으로 장벽 붕괴 촉발
  • 1997–2000국경 사망 사건으로 3년형, 1년 복역 후 사면
외국 정치가 독일 독일 1930–2017 ○ 자연사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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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937– ○ 수감 후 석방 (2003년)

호네커를 계승했으나 장벽을 열고 50일 만에 몰락한 동독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입당
  • 1971–1974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 조직 의장
  • 1974–1983자유독일청년단(FDJ) 중앙평의회 제1서기
  • 1983–1989SED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 안보·청년·체육 담당 서기
  • 1984–1989국가평의회 부의장
  • 1989.10–12SED 총서기
  • 1989.10–12국가평의회 의장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97국경 사망 사건으로 금고 6년 6개월 선고

프레더릭 켐프

Frederick Kempe
연구자 미국 독일계 1954– ○ 현역

냉전 위기를 추적한 저널리스트 역사가

프레더릭 켐프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자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배경과 유럽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정치와 대서양 관계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1961』은 새로 공개된 미국·소련·독일 문서와 인터뷰를 엮어 베를린 장벽 건설과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의 전차 대치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약함으로 해석하고 흐루쇼프의 선택을 제약 조건 속에 놓았으며, 그 비대칭적 논지는 독립 서평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7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졸업
  • 1981『월스트리트 저널』 런던 특파원으로 입사
  • 1984『월스트리트 저널』 빈 지국 개설
  • 1990『월스트리트 저널』 베를린 지국장
  • 1992–1997『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 간부, 중부유럽 경제평론 창간
  • 2002–2005세계판 『월스트리트 저널』 유럽 편집자
  • 2007–애틀랜틱 카운슬 회장 겸 최고경영자
  • 2011『베를린 1961』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