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상세 이력 보기
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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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상세 이력 보기
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