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마라뇬

Gregorio Marañón

스페인 성개혁 연맹을 이끈 내분비학자이자 자유주의 지식인

1932년 세계 성개혁 연맹의 스페인 지부인 스페인 성개혁 연맹 의장이 되었으나, 연맹은 동성애를 강령에 넣지 않은 가장 보수적인 지부였다.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의사·과학자·역사가. 40년 동안 마드리드 중앙병원 내분비학 강좌를 이끌며 스페인 내분비학을 세웠다. 1926년 『성생활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돈 후안을 남성다움의 원형이 아니라고 했다. 1931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공화국을 위한 지식인 연합」을 세웠고, 1932년 스페인 성개혁 연맹 의장이 되었으나 가톨릭 윤리에 따라 인공 피임과 국가의 성교육에는 반대했다. 1936년 말 망명했다가 1942년 돌아와 프랑코 시대에도 존중받았고, 1960년 마드리드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내분비학과 성개혁

산탄데르 출신 마누엘 마라뇬의 아들로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아버지의 벗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 같은 문인들과 어울렸다. 라몬 이 카할 등에게 의학을 배워 1910년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독일에서 공부했고, 1911년 갑상선 질환과 혈액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가 되었다. 40년 동안 마드리드 중앙병원 내분비학 강좌를 이끌며 스페인 내분비학을 세웠고, 1922년 왕립 의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24년 「돈 후안의 생물학을 위한 노트」와 1926년 『성생활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돈 후안을 남성다움의 원형이 아니라고 보았다.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가 들어서자 우나무노와 가까웠던 그는 독재와 부딪쳤다. 1931년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라몬 페레스 데 아얄라와 「공화국을 위한 지식인 연합」을 세웠으나, 뒤에 공화국이 모든 스페인 사람을 아우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932년 세계 성개혁 연맹의 스페인 지부 「과학적 기초 위의 스페인 성개혁 연맹」이 세워지자 의장이 되었고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가 서기를 맡았다. 이 지부는 가장 보수적이었고 동성애를 강령에 넣지 않은 몇 안 되는 지부였다. 그는 가톨릭 가치에 따라 공화국 시기 인공 피임과 국가의 아동 성교육에 반대했고, 성교육은 부모의 몫이라고 보았다. 당시 국제 우생학 흐름에 호응해 1933년 제1회 우생학 대회에 참여했지만, 높은 영아 사망률에서 출발해 가톨릭 윤리와 어긋나지 않는 교육을 해법으로 내세웠다.

내전이 터지자 1936년 12월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갔고, 1937년 12월 파리에서 공화국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음을 밝혔다. 라틴아메리카를 오가다 1942년 가을 돌아와 1946년 내분비학 강좌로 복귀했다. 프랑코 정권은 그의 이름을 대외 이미지에 이용했지만 대체로 그를 존중했다.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를 포함해 다섯 개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고, 1960년 3월 27일 마드리드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