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 산체스 사오르닐

Lucía Sánchez Saornil

「자유여성」을 함께 세워 이끈 울트라이스모 시인·아나키스트

1936년 4월 잡지이자 조직인 「자유여성」을 함께 세워 전국 서기를 맡았고, 조직은 1938년 147개 지부, 회원 2만 명으로 커졌다.

마드리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시인·아나키스트·여성 해방 운동가. 1916년 전화 교환원이 되었고, 1919년 스페인 첫 아방가르드 운동인 울트라이스모에 가담해 남성 필명 「루시아노 데 산사오르」로 시를 발표했다. 1931년 전국노동연맹에 들어가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신문에 여러 필명으로 글을 썼다. 1936년 4월 「자유여성」을 함께 세워 전국 서기를 맡았고, 1937년 국제 반파시즘 연대(SIA) 서기장이 되었다. 같은 해 만난 아메리카 바로소와 평생 함께 살았다. 1939년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942년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1970년 발렌시아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루시아노 데 산사오르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울트라이스모에서 「자유여성」으로

마드리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1908년 어머니를 잃었다. 1916년 마드리드 전화 회사(뒤의 텔레포니카)에 교환원으로 들어가 1927년 발렌시아로 전근되었다. 1919년 1월 스페인 첫 아방가르드 문학 운동인 울트라이스모에 가담해 《그레시아》, 《울트라》 같은 잡지에 흔히 「루시아노 데 산사오르」라는 남성 필명으로 시를 실었다.

1931년 전국노동연맹에 들어가 1930년대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신문에 「동지 X」, 「감시자」, 「연맹원」 같은 필명으로 글을 썼다. 그는 메르세데스 코마포사다와 함께 마드리드 전국노동연맹이 연 노동자 기초 교육 강좌에서 가르치다, 운동 안의 여성 혐오와 편견 때문에 여성만을 위한 강좌와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36년 4월 둘은 암파로 포치 이 가스콘과 함께 잡지이자 조직인 「자유여성」을 세웠고, 그는 전국 서기가 되었다. 「자유여성」은 전국노동연맹·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의 테두리 안에서 1938년 147개 지부와 회원 2만 명으로 커졌다.

내전이 터지자 그는 이것을 온 인류의 혁명으로 보고 반파시즘 투쟁에 뛰어들었고, 1937년 국제 반파시즘 연대(SIA) 창립에 참여해 서기장이 되었다. 같은 해 만난 아메리카 바로소와 평생 함께 살았다. 그는 성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는 누구에게도 해명할 필요가 없는 사적인 일이라 여겼고, 그를 스페인 레즈비언 운동의 선구자로 보는 해석에 스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39년 1월 말 바로소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해 피난민을 도왔고, 프랑스 경찰의 감시와 체포를 겪은 끝에 1942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1970년 6월 2일 발렌시아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