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루마니아

시민권 15 · 민족·국가 16 · 사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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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15전체보기

율리우 마니우

Iuliu Maniu
외국 정치가 루마니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1873–1953 ○ 옥사

트란실바니아 통합을 이끈 국민농민당의 지도자, 1947년 종신형을 받고 시게트 감옥에서 죽다

1947년 11월 11일 부쿠레슈티 군사법원은 일흔네 살의 마니우에게 종신 중노동형을 선고했다. 그가 마지막 변론에서 남긴 말은, 자기가 한 일은 모두 루마니아 인민을 위한 것이었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한 문장이었다.

트란실바니아 설라지의 그리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헝가리 의회의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1918년 12월 알바이울리아 대집회 뒤 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으로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이끌었고, 1926년 농민당과 합쳐 국민농민당을 세워 1928~30년과 1932~33년 총리를 지냈다. 카롤 2세의 개인 통치와 1938년 왕정 독재에 맞섰고, 안토네스쿠 시기에는 베사라비아 회복까지는 지지했으나 드네스트르를 넘는 전쟁에 반대해 1944년 8월 23일 쿠데타 준비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그로자 정부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는 야당의 중심이었고 1946년 선거 조작에 항의했다. 1947년 7월 당 지도부가 터머더우 비행장에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것을 빌미로 국민농민당이 해산되었고, 그는 10~11월 재판에서 「반역」 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3년 2월 시게트 감옥에서 80세로 죽어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0헝가리 의회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
  • 1918–1920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
  • 1926국민농민당 창당
  • 1928–1930총리
  • 1932–1933총리
  • 19448월 23일 쿠데타 준비 참여
  • 1945–1947그로자 정부에 맞선 야당 지도자
  • 1947터머더우 사건, 당 해산, 종신형
  • 1953시게트 감옥에서 사망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반혁명 세력 루마니아 루마니아 1882–1946 ✕ 처형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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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반혁명 세력 루마니아 루마니아인 1882–1950 ○ 자연사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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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페트루 그로자

Petru Groza
사회주의권 지도자 루마니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1884–1958 ○ 자연사

공산당원이 아닌 지주 변호사로 공산 정권의 첫 총리와 국가원수를 지낸 「붉은 부르주아」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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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26–1927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33농민전선 창설
  • 1935체베아 협정, 공산당과 제휴
  • 1944–1945부총리
  • 1945–1952총리
  • 194712월 30일 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 1952–1958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국가원수)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6전체보기

율리우 마니우

Iuliu Maniu
외국 정치가 루마니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1873–1953 ○ 옥사

트란실바니아 통합을 이끈 국민농민당의 지도자, 1947년 종신형을 받고 시게트 감옥에서 죽다

1947년 11월 11일 부쿠레슈티 군사법원은 일흔네 살의 마니우에게 종신 중노동형을 선고했다. 그가 마지막 변론에서 남긴 말은, 자기가 한 일은 모두 루마니아 인민을 위한 것이었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한 문장이었다.

트란실바니아 설라지의 그리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헝가리 의회의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1918년 12월 알바이울리아 대집회 뒤 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으로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이끌었고, 1926년 농민당과 합쳐 국민농민당을 세워 1928~30년과 1932~33년 총리를 지냈다. 카롤 2세의 개인 통치와 1938년 왕정 독재에 맞섰고, 안토네스쿠 시기에는 베사라비아 회복까지는 지지했으나 드네스트르를 넘는 전쟁에 반대해 1944년 8월 23일 쿠데타 준비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그로자 정부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는 야당의 중심이었고 1946년 선거 조작에 항의했다. 1947년 7월 당 지도부가 터머더우 비행장에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것을 빌미로 국민농민당이 해산되었고, 그는 10~11월 재판에서 「반역」 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3년 2월 시게트 감옥에서 80세로 죽어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0헝가리 의회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
  • 1918–1920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
  • 1926국민농민당 창당
  • 1928–1930총리
  • 1932–1933총리
  • 19448월 23일 쿠데타 준비 참여
  • 1945–1947그로자 정부에 맞선 야당 지도자
  • 1947터머더우 사건, 당 해산, 종신형
  • 1953시게트 감옥에서 사망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반혁명 세력 루마니아 루마니아 1882–1946 ✕ 처형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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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반혁명 세력 루마니아 루마니아인 1882–1950 ○ 자연사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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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페트루 그로자

Petru Groza
사회주의권 지도자 루마니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1884–1958 ○ 자연사

공산당원이 아닌 지주 변호사로 공산 정권의 첫 총리와 국가원수를 지낸 「붉은 부르주아」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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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26–1927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33농민전선 창설
  • 1935체베아 협정, 공산당과 제휴
  • 1944–1945부총리
  • 1945–1952총리
  • 194712월 30일 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 1952–1958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국가원수)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7전체보기

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1941–1945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1942–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 17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와 돈강 하류 및 볼가강 주변에서 벌어진 독일·추축국과 소련의 대규모 전투다. 독일은 블라우 작전으로 남부의 석유와 교통로를 장악하려 했고,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별도 목표로 밀어붙이면서 공세가 분산됐다.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은 8월 말 도시에 도달해 폐허가 된 시가지를 공격했지만, 바실리 추이코프의 제62군은 볼가강을 건너오는 증원과 근접전으로 버텼다. 소련군은 11월 19일부터 천왕성 작전을 개시해 루마니아군이 지키던 독일군 측면을 북쪽과 남쪽에서 돌파하고 11월 23일 칼라치 부근에서 연결했다. 포위된 독일군은 구출과 공중 보급에 실패한 뒤 1943년 1월부터 항복했고, 2월 2일 전투가 끝났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4–1948

루마니아: 8월 23일에서 인민공화국까지

1944년 8월 23일 국왕 미하이 1세가 이온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 측으로 돌아서면서 루마니아는 전쟁의 반대편에 섰다. 9월 12일 모스크바 휴전협정으로 소련군 사령부가 이끄는 연합국 통제위원회가 들어섰고, 서너테스쿠와 러데스쿠의 연립정부는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민주전선의 요구와 부딪혔다. 1945년 2월 말 소련 외무부차관 비신스키가 부쿠레슈티에 와서 정부 교체를 요구했고, 3월 6일 페트루 그로자 정부가 세워져 토지개혁을 공포했다. 국왕은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법령 서명을 거부했으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 뒤 야당 각료 두 명이 추가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946년 11월 19일 총선의 공식 결과는 정부 블록 69.8%였고, 후대에 공개된 당 내부 문서는 다른 수치를 남겼다. 1947년 평화조약 발효 뒤 국민농민당이 해산되고 마니우가 재판을 받았으며, 12월 30일 국왕이 퇴위해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2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루마니아노동자당으로 합쳤다.

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1989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