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전쟁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은 왜 1870년 여름 전쟁에 들어갔고, 스당의 항복 뒤에도 다섯 달을 더 끈 이 전쟁은 독일 통일과 알자스-로렌 병합, 파리 코뮌을 어떻게 낳았으며, 양쪽 나라의 노동자 조직과 제1인터내셔널은 이 전쟁에 어떻게 맞섰나?
에스파냐 왕위를 둘러싼 호엔촐레른 후보 문제와 비스마르크가 손질해 공개한 엠스 전보로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면서 독일군은 국경 전투에서 잇달아 이겨 바젠의 군대를 메스에 가두고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았다. 파리에서는 공화국과 국방정부가 섰고, 강베타가 지방에서 새 군대를 조직하는 동안 파리는 넉 달 동안 포위되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고 28일 휴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넘기고 50억 프랑을 물었다. 그 사이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두 차례 담화로 왕조 전쟁과 병합을 규탄했고,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전쟁 공채에 기권·반대했으며, 사회민주노동자당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는 병합에 항의하다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다.

1866년 이후의 유럽과 전쟁으로 가는 길
1866년 프로이센이 쾨니히그레츠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마인강 북쪽의 독일 국가들을 북독일연방으로 묶자, 1859년 이래 대륙의 패권국을 자처하던 프랑스 제2제정의 지위는 흔들렸다. 프로이센은 하노버·슐레스비히홀슈타인·나사우·헤센카셀·프랑크푸르트를 합병해 영토를 4분의 1 가까이 넓혔고 인구는 약 2,400만 명이 되었다. 전쟁에 끼지 못한 프랑스는 아무 보상도 얻지 못했고, 여론은 「사도바의 복수」를 외쳤다. 나폴레옹 3세는 1814년 국경으로의 복귀와 룩셈부르크·자르 지방·바이에른령 팔츠의 병합을 요구했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를 「팁 정책」이라 조롱하며 거절하고 그 문서를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헤센다름슈타트에 보여 주어 남독일 국가들과 방어 동맹을 맺는 데 썼다.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이려면 프랑스가 먼저 공격하는 모양새여야 한다고 보았다. 1867년 7월 발효한 북독일연방 헌법은 프로이센 왕을 연방 수반, 비스마르크를 연방 재상으로 삼았고, 보통선거로 뽑는 제국의회를 두었다. 이 제국의회에 1867년 작센의 아우구스트 베벨이 들어왔다. 1 2 3
직접 계기는 에스파냐 왕위였다. 1868년 이사벨 2세가 쫓겨난 뒤 빈 왕좌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분가 출신 레오폴트 공에게 제안되었고, 1870년 7월 2일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 의회와 언론은 프로이센과 에스파냐에 포위된다며 분노했다. 프랑스의 압력으로 레오폴트는 7월 11일 후보에서 물러났고, 이것만으로도 프로이센의 외교적 패배로 여겨졌다. 그러나 외무장관 그라몽 공작은 더 나아가, 프로이센 왕이 앞으로 어떤 호엔촐레른도 에스파냐 왕위에 내세우지 않겠다고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7월 13일 아침 바트엠스의 산책로에서 프랑스 대사 뱅상 베네데티가 빌헬름 1세를 붙들고 이 요구를 전하자, 왕은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거절했다. 하인리히 아베켄이 이 대화를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보고했고, 비스마르크는 왕의 유화적인 표현을 지우고 「왕은 대사를 다시 접견하기를 거부하고 당번 부관을 통해 더 할 말이 없다고 알렸다」는 요지로 줄여 그날 저녁 언론과 각국 공사관에 공개했다. 아바스 통신의 프랑스어 번역은 「부관(Adjutant)」을 하사관을 뜻하는 「adjudant」로 옮겨, 왕이 일부러 장교가 아닌 사람을 보내 대사를 모욕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비스마르크는 이 문서가 「갈리아 황소에게 붉은 천 같은 효과」를 내리라고 말했다. 2 4 5
7월 14일 프랑스 신문들은 대사의 보고가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발표문 번역을 실었다. 그라몽은 「뺨을 맞은 것 같다」고 했고, 의회의 왕당파 지도자 아돌프 티에르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이미 이겼으므로 전쟁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했으나 「반역자」「프로이센 놈」이라는 고함에 묻혔다. 총리 에밀 올리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의 책임을 받아들인다고 말했고, 1만 5천에서 2만 명의 군중이 파리에서 전쟁을 외치며 행진했다. 15일 프랑스가 동원령을 내리자 북독일연방은 그날 밤 동원을 시작했고, 바이에른·바덴·뷔르템베르크가 뒤따랐다. 입법원은 압도적 다수로 전쟁 공채를 가결했고, 7월 19일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5월 8일의 국민투표에서 찬성 733만 표를 얻어 「황제는 어느 때보다 인기가 있다」는 평을 들었던 제2제정은, 오스트리아와 덴마크·이탈리아가 가담하리라는 기대 속에 동맹 하나 없이 전쟁에 들어갔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갈린다. 일부는 비스마르크가 남독일 국가들을 연방에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프랑스를 자극했다고 보고, 다른 이들은 그가 전개되는 상황을 이용했을 뿐이며 나폴레옹 3세는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이미 전쟁을 결심한 상태였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독일 동맹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1 2 4

국경 전투에서 스당까지
양쪽 군대의 차이는 동원에서 드러났다. 프로이센 총참모부는 철도를 이용한 동원 계획을 해마다 고쳐 두었고, 헬무트 폰 몰트케는 7월 5일 동원령이 내려진 지 닷새 만에 전시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왕명에 준하는 명령권을 얻었다. 독일군은 마인츠 남쪽에 세 개 군을 집결시켰다. 슈타인메츠의 제1군, 프리드리히 카를 공의 제2군, 프로이센 황태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제3군이었다. 프랑스군은 경쟁하는 민간 철도회사의 노선과 군사 통제 없는 수송 때문에 역마다 예비병과 화차가 뒤엉켰고, 총 한 발 쏘기 전에 낙오자 10만 명을 잃었다. 개전 당시 국경에 집결한 병력은 독일 46만 2천 명에 프랑스 27만 명이었다. 프랑스 보병의 샤스포 소총은 드라이제 소총보다 사거리가 길었지만, 프로이센 포병의 크루프 강철 후장포는 프랑스의 청동 전장포보다 멀리, 빠르게 쏘았다.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메스로 가서 「라인군」의 지휘를 맡았으나 병이 깊어 말을 타지 못했고, 8월 2일 자르브뤼켄을 잠시 점령한 것이 프랑스군이 독일 땅에서 거둔 유일한 성과였다. 1 6 4
8월 4일 비상부르에서 황태자의 제3군이 두에 장군의 고립된 사단을 압도하며 첫 전투가 벌어졌고, 두에는 전사했다. 6일에는 스피슈렌에서 슈타인메츠와 프리드리히 카를의 군대가 프로사르의 제2군단을 밀어냈고, 같은 날 뵈르트(프뢰슈빌러)에서 마크마옹 원수의 3만 5천 명이 14만 명의 제3군에 맞서 싸우다 1만 명 안팎의 사상자와 9,200명의 포로를 내고 보주 산맥 너머로 물러났다. 메스 요새에 모인 아실 바젠 원수의 라인군 약 16만 명은 8월 15일 샬롱으로 후퇴하려 했으나, 16일 마르라투르에서 알벤슬레벤의 제3군단 3만 명이 네 배의 적을 상대로 비온빌을 점령해 서쪽 퇴로를 막았다. 독일 공식 전사는 이날 독일군 15,780명, 프랑스군 13,761명의 손실을 기록했다. 18일 그라블로트·생프리바 전투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다. 몰트케 휘하 188,332명이 바젠의 112,800명이 파 놓은 참호를 공격해 독일군 20,163명, 프랑스군 12,275명의 손실을 냈고, 이튿날 라인군은 메스로 물러나 포위되었다. 바젠은 8월 31일 누아스빌과 10월 7일 벨뷔에서 돌파를 시도했을 뿐 요새 안에 머물렀고, 역사가들은 그의 수동성을 비판한다. 1 7 8 9 10
나폴레옹 3세와 마크마옹은 8월 17일 샬롱군을 새로 편성해 바젠을 구하러 나섰다. 군은 프로이센군을 피해 벨기에 국경 쪽으로 북동진했으나, 몰트케는 메스 포위군에서 세 개 군단을 떼어 작센 황태자의 뫼즈군을 만들고 제3군과 함께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8월 30일 보몽에서 프랑스군을 덮쳤다. 병력 5천 명과 대포 40문을 잃은 샬롱군은 17세기의 낡은 요새 스당으로 물러났다. 9월 1일 아침 독일군은 사방에서 포위망을 닫았다. 마크마옹이 부상하자 지휘권은 뒤크로를 거쳐 뱅펜에게 넘어갔고, 마르그리트 장군의 기병대는 플루앙 마을을 향해 세 차례 돌격하다 지휘관이 치명상을 입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 아래 돌파가 불가능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요새 성벽에 백기를 올렸다. 9월 2일 11시 30분 뱅펜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프랑스군은 3,220명이 전사하고 14,811명이 다쳤으며 104,000명이 대포 558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황제는 9월 3일 카셀 근처 빌헬름스회에 성으로 보내졌고, 스당 함락 소식이 파리에 닿자 황후는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919년까지 해마다 9월 2일을 「스당의 날」로 기념했다. 11 1 10
9월 4일과 국방정부
스당 항복 소식은 9월 3일 밤 파리에 닿았고, 4일 아침부터 군중이 입법원이 있는 부르봉 궁에 몰려들어 공화국을 요구했다. 그날 오후 시청에서 레옹 강베타가 「인민은 흔들리는 의회를 앞질렀다.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인민은 공화국을 요구했다」며 공화국을 선포했다. 제2제정은 피 한 방울 없이 무너졌다. 새로 선 국방정부는 파리 수비 사령관 루이쥘 트로쉬 장군을 수반으로, 쥘 파브르를 부수반 겸 외무장관, 강베타를 내무장관으로 삼았고 쥘 페리·쥘 시몽·에르네스트 피카르·앙리 로슈포르 등 파리 선출 공화파 의원으로 채워졌다. 오를레앙파였던 트로쉬는 「종교와 재산과 가족을 단호히 지킨다」는 약속을 받고 자리를 맡았다. 보나파르트파를 뺀 여러 정파가 들어왔지만 실권은 오를레앙파와 보수파에 있었다. 미국과 에스파냐만 곧바로 이 정부를 승인했고, 비스마르크는 파리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프랑스를 대표할 수 있는지 물으며 나폴레옹 3세를 「프랑스의 정당한 통치자」라 부르고 강베타의 공화국을 「당파의 쿠데타」로 깎아내렸다. 12 13 1 14
파브르는 9월 6일 프랑스가 「영토의 한 치도, 요새의 돌 하나도 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파리 곳곳에 벽보로 붙었다. 그러나 파브르 자신은 트로쉬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믿지 않았고, 영국 대사 라이언스 경을 통해 비스마르크와 연락을 트고 배상금을 주고 독일군을 철수시키자고 내각에 제안했다가 거부당했다. 9월 18일과 19일 페리에르 성에서 파브르는 비스마르크를 만났다. 파브르는 5억 프랑의 배상을 제시했지만 영토 양보는 거부했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보복 전쟁을 막을 국경이 필요하다며 스트라스부르와 알자스, 메스를 포함한 모젤 주의 대부분을 요구했다. 국민의회 선거를 위한 휴전의 대가로 스트라스부르와 툴의 항복을 요구하자 파브르는 울며 돌아섰고, 20일 내각은 비스마르크의 조건을 전부 거부했다. 24일 정부는 지방·전국 선거를 무기한 연기했다. 강베타의 말대로 「휴전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없고, 휴전은 방어의 노력을 느슨하게 할」 터였다. 공화국은 선전포고를 다시 확인하고 전국에서 신병을 모아 「끝까지 가는 전쟁(guerre à outrance)」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겠다고 약속했다. 15 16 1
그 사이 독일군은 알자스의 요새를 공략하고 있었다. 뵈르트 전투 뒤 아우구스트 폰 베르더가 바덴군과 프로이센 향토방위군 4만 명을 이끌고 스트라스부르로 내려갔고, 8월 23일부터 시가지를 포격했다. 예술박물관과 중세 필사본을 소장한 시립도서관이 불탔고, 주교가 휴전을 간청했지만 노장 위리히 장군은 항복을 거부했다. 포탄이 모자라자 독일군은 정규 공성전으로 바꿔 9월 17일 성벽을 뚫었고, 스당의 소식을 들은 수비대는 9월 28일 항복했다. 독일군이 쏜 포탄은 202,099발, 약 4,000톤이었고 민간인 341명이 죽었으며 1만 명이 집을 잃었다. 마르크스는 9월 9일의 담화에서 스트라스부르가 「엿새 동안 함부로 끔찍하게 포격당했다」고 썼다. 스트라스부르와 툴의 함락으로 독일에서 파리 포위선까지 철도가 열렸고, 베르더의 부대는 남쪽 벨포르로 향했다. 이렇게 독일군은 9월 15일 파리 외곽에 닿았고, 몰트케가 포위 명령을 내렸다. 19일 포위망이 닫혔고 20일 파리는 나머지 프랑스에서 완전히 끊겼다. 17 18 1 13

파리 포위와 지방의 전쟁
파리에는 스당에서 빠져나온 정규군 6만 명과 기동대 9만 명, 수병 1만 3천 명, 국민방위군 35만 명 등 약 51만 3천 명의 방어 병력이 있었다. 33km의 티에르 성벽과 1840년대에 지은 16개 외곽 요새가 도시를 둘렀다. 몰트케는 도시를 강습할 생각이 없었고, 포위전을 지휘한 블루멘탈과 황태자는 민간인을 해치는 포격에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는 중립국의 개입을 두려워해 빠른 포격을 줄곧 요구했다. 트로쉬는 국민방위군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파리 총독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그의 포고는 지키지 못할 기대를 낳았다. 10월 7일 강베타는 석탄 가스를 채운 기구 「아르망 바르베스」를 타고 독일군 선 위로 날아 투르에 닿았고, 내무장관 겸 전쟁장관으로서 공병 장교 샤를 드 프레시네의 도움을 받아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를 사실상 독재적으로 통솔했다. 넉 달이 못 되는 사이에 11개 군단이 새로 편성되었고 하루 평균 보병 6천 명과 포병 2개 중대가 만들어졌다. 8월에 888,000명을 동원한 북독일연방 쪽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15%밖에 늘지 않았으므로, 11월 독일군은 메스 포위를 풀어 준 병력으로 겨우 전선의 위기를 넘겼다. 19 1 13 12 14
10월 10일 오를레앙 근처에서 독일군과 공화국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프랑 티뢰르(의용 사수)·지방 기동대·수병·알제리의 주아브 병으로 급조된 루아르군은 11일 오를레앙을 내주었지만, 11월 9일 쿨미에에서 바이에른군을 꺾고 오를레앙을 되찾았다. 그러나 10월 27일 메스의 바젠이 굶주림 끝에 17만 3천 명(출처에 따라 19만 3천 명)의 군대와 함께 항복하면서 프리드리히 카를의 제2군이 풀려났고, 독일 언론은 바젠이 「공화파의 위협」에 맞서 협력하자고 독일 측에 제안한 사실을 널리 보도했다. 11월 28일 본라롤랑드, 12월 2일 루아니에서 패한 루아르군은 12월 4일 오를레앙을 다시 잃었고, 정부 대표단은 보르도로 옮겼다. 강베타는 군을 둘로 나눠 샹지의 제2루아르군은 1871년 1월 11~12일 르망에서 사상 7천 명, 포로 2만 2천 명, 탈영 5만 명을 내며 무너졌고, 북쪽 페데르브의 북부군은 아미앵·바폼을 거쳐 1월 13일 생캉탱에서 흩어졌다. 포위된 파리에서는 메스 항복이 확인된 10월 31일 블랑키·플루랑스·들레클뤼즈가 이끄는 국민방위군 대대가 시청을 점거해 트로쉬 내각을 인질로 잡았다가 밤사이 물러났다. 정부는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도 주모자 22명을 체포해 파리 좌파의 분노를 키웠다. 1 20 10 19
동부에서는 샤를 드니 부르바키의 동부군 11만 명이 벨포르 포위를 풀려고 북상해 1월 15~17일 리젠강에서 베르더의 4만여 명과 싸웠으나 뚫지 못했고, 만토이펠의 남부군에 밀려 스위스 국경의 산악으로 내몰렸다. 부르바키는 자살을 기도했다. 프랑 티뢰르 부대는 철도와 다리를 끊고 작은 초소를 습격했지만, 독일군은 이들을 교전 자격이 없는 무장 민간인으로 여겨 붙잡는 대로 처형했고 가까운 마을에 보복했다. 스당 옆 바제유에서는 바이에른군이 주민 30명 넘게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파리에서는 말고기와 개·고양이·쥐를 거쳐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식탁에 올랐고, 1월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한 주에 3천에서 4천 명이 죽었다. 11월 30일 샹피니의 「대출격」과 12월 21일 르부르제 출격은 실패했다. 1월 5일부터 독일군은 비스마르크의 뜻대로 23일 밤 동안 12,000발을 시내에 쏘아 약 400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으나, 파리의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월 19일 뷔즈발 성을 향한 마지막 출격이 4천 명 넘는 손실로 끝나자 트로쉬는 22일 파리 총독직을 비누아 장군에게 넘겼고, 23일의 작은 봉기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1 21 22 23 24 19 13


제1인터내셔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반전
제2제정은 전쟁 전부터 국제노동자협회를 적으로 대했다. 1870년 5월 국민투표 전날 정부는 「황제 암살 음모를 꾸미는 비밀결사」라는 구실로 파리·리옹·루앙·마르세유·브레스트의 협회 운영위원들을 일제히 검거했고, 6월 22일부터 7월 5일까지 열린 재판에서 음모 혐의는 근거 없음이 드러났지만 여러 회원이 사회주의 신념만으로 투옥되었다. 프랑스 지부들이 국민투표는 「국내의 전제와 국외의 전쟁」에 찬성하는 표라고 호소한 결과 대도시 노동자들은 거의 한 몸처럼 반대표를 던졌으나, 농촌의 표가 균형을 뒤집었다. 전쟁 위기가 닥치자 파리의 협회 회원들은 7월 12일 『레베유』에 「모든 나라의 노동자에게」라는 선언을 실어 「우위나 왕조를 위한 전쟁은 노동자의 눈에 범죄적 부조리일 뿐」이라며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의 분열은 라인강 양쪽에서 전제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뿐」이라고 썼다. 뇌이쉬르센 등 여러 지역 선언이 뒤따랐고, 경찰청장 피에트리는 교외 노동자들의 평화 시위가 커지자 거리 정치를 모두 금지했다. 독일에서도 7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의 노동자 대중집회가 파리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우리는 모든 전쟁, 특히 왕조 전쟁의 적」이라고 결의했고, 켐니츠에서는 작센 노동자 5만 명을 대표하는 대의원 회의가 이 전쟁을 「오로지 왕조적인」 전쟁으로 규정했으며, 베를린 지부는 「나팔 소리도 대포 소리도, 승리도 패배도 우리를 공동의 과업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고 답했다. 25
런던의 총평의회는 7월 23일 카를 마르크스가 쓴 첫 번째 담화를 냈다. 담화는 1870년 7월의 「전쟁 음모」를 1851년 12월 쿠데타의 「개정판」이라 부르고, 「제2제정의 조종은 이미 파리에서 울렸다. 그것은 시작했던 대로 희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독일 쪽에서는 방어 전쟁이지만 독일을 그 처지로 몰아넣은 것은 보나파르트와 공모해 국내의 반대를 억누르고 독일을 호엔촐레른 왕조에 병합하려 한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며, 독일 노동계급이 이 전쟁이 「엄격히 방어적인 성격」을 잃고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전쟁으로 타락하도록 둔다면 승리든 패배든 똑같이 재앙이 되리라고 경고했다.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으니 프로이센 정부가 「코사크의 도움」을 받는 순간 독일은 정당한 동정을 잃는다고도 썼다. 북독일연방 제국의회에서는 사회민주노동자당(아이제나흐파)의 두 의원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7월 21일(독일어 출처는 19일) 전쟁 공채 표결에서 기권했다. 프로이센 정부를 지지하지도 나폴레옹을 편드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으려고 베벨이 고안한 타협이었다. 파리 선언에 호응한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던 당 중앙위원회의 빌헬름 브라케와 자무엘 슈피어는 마르크스처럼 전쟁의 첫 단계를 공격에 맞선 정당한 방어로 보아 「형제에 대한 전쟁」을 거부한 두 의원과 격렬하게 부딪쳤고, 창당 1년 된 당은 깨질 뻔했다. 25 26 27 28
스당 뒤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도 전쟁 계속에 반대로 돌아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9월 1일 무렵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알자스-로렌 병합이 독일을 영원히 전쟁에서 지켜 주리라는 주장을 뒤집어, 병합은 「이 전쟁을 유럽의 제도로 만드는 최선의 수단」이며 「서쪽의 폴란드」를 붙들어 두기 위해 새 독일에 군사 전제를 영속시키고, 다가올 강화를 「프랑스가 잃은 영토를 되찾을 만큼 회복할 때까지의 휴전」으로 만들 것이라고 썼다. 9월 5일 위원회는 선언을 내어 「우리는 알자스와 로렌의 병합에 항의한다. 우리는 독일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음을 안다」며 프랑스 공화국과의 「명예로운 강화」와 루이 보나파르트의 인도를 요구했다. 사령관 포겔 폰 팔켄슈타인 장군의 명령으로 선언문은 압수되었고 위원 전원과 인쇄공까지 체포되어 「보통 범죄자처럼 쇠사슬에 묶여」 브라운슈바이크에서 1,000km 떨어진 동프로이센의 뢰첸으로 끌려갔다. 마르크스는 9월 15일 『폴 몰 가제트』에 이 사실을 알렸다. 자유주의자 요한 야코비도 병합에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9월 9일 총평의회의 두 번째 담화는 「방어 전쟁은 사실상 루이 보나파르트의 항복, 스당의 항복, 파리의 공화국 선포로 끝났다」고 선언하고, 「물질적 보장」을 내세우는 병합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군사적 고려를 국경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새 전쟁의 씨앗」을 품는다고 썼다.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에 밀어 넣는 병합은 「슬라브 민족과 로망스 민족과의 전쟁」을 부르리라는 경고였다. 담화는 공화국을 환영하면서도 오를레앙파가 군대와 경찰을 쥐었다고 경계했으며, 프랑스 노동자에게 적이 파리 문 앞에 있는 지금 정부 전복 시도는 「절망적인 어리석음」이니 공화국의 자유를 계급 조직에 쓰라고 당부했다. 29 28 18 30
11월 26일 북독일연방 제국의회가 추가 전쟁 공채를 다룰 때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프랑스 영토의 어떤 병합도 포기하는」 강화 제안을 내놓고 공채에 반대표를 던졌다. 토론은 두 의원에 대한 반역 비난으로 번졌고, 소란과 특히 리프크네히트를 겨냥한 폭행이 뒤따랐다. 12월 17일 두 사람은 당 기관지 『폴크스슈타트』의 둘째 편집자 아돌프 헤프너와 함께 체포되었다. 리프크네히트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이 체제에는 한 사람도, 한 푼도 주지 않는다」는 구호로 맞았고, 이 말은 비스마르크 국가에 대한 당의 반대를 상징하는 표어가 되었다. 1871년 3월 3일 새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베벨이 당선되자 정부는 압력에 밀려 3월 28일 세 사람을 일단 풀어 주었다. 베벨은 제국의회에서 파리 코뮌을 국제 노동계급이 치를 긴 싸움의 「전초전」이라 불렀다. 전쟁이 끝나 국가반역죄(Landesverrat)로는 재판할 수 없게 되자 비스마르크는 내란죄(Hochverrat)로 바꿔 기소를 밀어붙였다. 1872년 3월 11일부터 26일까지 라이프치히 배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헤프너는 무죄,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유죄 정족수인 배심원 8명의 찬성으로 유죄가 되어 요새금고 2년을 선고받았고 베벨의 의원직은 박탈되었다. 리프크네히트는 법정에서 스스로를 「혁명의 병사」라 불렀고, 검찰이 『공산당 선언』을 조서에 올린 덕에 절판되었던 이 책을 합법적으로 다시 펴낼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1월 보궐선거에서 베벨은 첫 선거보다 4,000표 넘게 더 얻어 다시 당선되었다. 31 27 26

베르사유의 제국 선포와 휴전
8월과 9월의 승리는 남독일 군주들을 북독일연방으로 끌어들였다. 1870년 11월 바덴·헤센·뷔르템베르크·바이에른이 조약을 맺었고, 12월 8일 연방 참의원은 연방의 이름을 「독일 제국」으로 바꾸고 프로이센 왕을 독일 황제로 삼기로 했으며, 9~10일 제국의회가 황제 칭호를 바치기로 의결했다. 새 헌법은 1871년 1월 1일 발효했다. 빌헬름 1세는 황제 칭호가 프로이센 왕의 칭호를 가릴까 꺼렸고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를 원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군주들과 오스트리아 황제가 반발할 것이라며 「독일 황제」로 정했다. 선포일은 1701년 프로이센 초대 왕의 대관 기념일인 1월 18일로 잡았다. 그날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는 각 연대 대표단이 전투로 찢긴 군기를 들고 들어찼고, 한가운데 옥좌 대신 야전 제단을 놓고 예배를 올린 뒤 비스마르크가 선포문을 읽었다. 빌헬름의 유일한 사위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가 헌법상 칭호를 피해 「빌헬름 황제 폐하」를 외쳤고 참석자들이 세 번 따라 외쳤다. 빌헬름은 종교적 성격을 강조했고, 비스마르크는 황제가 제후들 위에 서지 않고 스스로를 전우들과 함께 승리한 사령관으로 여겼다고 공공연히 비판했다. 포위된 적국 수도의 궁전에서 치러진 이 의식은 프랑스에 국가적 굴욕으로 기억되었다. 32 33 3 24
겨울 동안 독일 수뇌부의 긴장도 커졌다. 몰트케와 블루멘탈은 외곽 요새를 차례로 무너뜨리는 체계적 공성을, 비스마르크는 신속한 종전을 원했고, 긴 포위가 경제를 짓누르고 프랑스에 새 군대를 만들 시간을 주며 중립국을 끌어들일 것을 걱정했다. 1월 25일 빌헬름 1세는 몰트케를 눌러 앞으로 모든 작전을 비스마르크와 상의하라고 명했고, 비스마르크는 곧바로 대구경 크루프 공성포로 시내를 포격하게 했다. 1월 23일 각료회의에서 전면 휴전 교섭의 권한을 받은 파브르는 그날 저녁 베르사유로 갔다. 비스마르크는 국민방위군이 봉기할까 걱정하는 그에게 「봉기를 도발하라, 아직 그것을 진압할 군대가 있을 때」라고 조언했다. 합의된 조건은 파리 외곽 요새의 인도, 1개 사단을 뺀 정규군의 무장해제, 국민방위군의 무장 유지, 2억 프랑의 배상금, 2월 19일까지의 휴전과 국민의회 선거였다. 27일 자정 파리에서 포성이 멎었고, 28일 파브르와 비스마르크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쥐라·두·코트도르 세 주는 벨포르 공성을 유지하려는 프랑스 측 요청으로 휴전에서 제외되었다. 파브르는 보르도 정부에 이를 알리지 않았고, 이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클랭샹 휘하의 동부군은 휴전을 믿고 멈췄다가 만토이펠의 남부군에 포위되었다. 2월 1일 8만 7천 명의 마지막 프랑스군은 퐁타를리에에서 레베리에르를 거쳐 스위스로 넘어가 무장해제되고 억류되었다. 국민방위군이 무기를 간직한 것은 뒤에 파리 코뮌 봉기를 가능하게 했다. 19 15 1 16
보르도의 강베타는 1월 29일 전보로 항복 소식을 받고 격분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6일 강베타는 사임하고 지방 군대의 지휘권을 정부에 넘겼다. 2월 8일 43개 주가 점령된 가운데 치른 국민의회 선거는 모든 공공 집회가 금지되어 파리에서만 선거운동이 가능했고, 강화를 약속한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가 큰 다수를 얻었다. 강베타는 8개 주에서 당선되었지만, 티에르는 여러 선거구(출처에 따라 23곳 또는 86곳)에서 동시에 뽑혔다. 2월 12일 보르도에 모인 의회는 티에르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19일 의원들은 공화정이냐 왕정이냐를 묻지 않기로 하는 「보르도 협약」을 맺었다. 2월 26일 베르사유에서 가조약이 서명되었고, 3월 1일 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 병사 3만 명이 검은 천을 두른 침묵의 파리에서 승전 행진을 한 뒤 이틀 만에 동쪽 교외로 물러났다. 같은 날 국민의회는 황제의 폐위를 공식 선언하고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풀어 주었고, 그는 3월 20일 영국으로 건너가 켄트의 치즐허스트에 자리 잡았다가 1873년 1월 9일 방광 결석 수술 끝에 죽었다. 마지막 말은 「스당에서 우리가 비겁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였다고 한다. 15 13 34 12 19 4

프랑크푸르트 조약과 알자스-로렌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이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알자스의 바랭·오랭 두 주를 벨포르와 그 주변을 빼고, 로렌에서는 모젤 주의 대부분과 샤토살랭·사르부르를 포함한 뫼르트 주의 3분의 1, 보주 주의 살과 시르메크 칸톤을 넘겼다. 마을과 도시 1,694곳, 144만 7천 헥타르, 주민 159만 7천 명이었고, 프랑스는 광업과 제철 잠재력의 20%를 잃었다. 병합지 주민에게는 1872년 10월 1일까지 프랑스 국적을 지키고 이주할지 남아서 독일 국민이 될지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 배상금은 금 50억 프랑으로 5년 안에 갚아야 했고 1871년에 10억 프랑을 먼저 내야 독일군이 철수를 시작했으며, 완납까지 프랑스 일부가 점령되었다. 이 액수는 인구 비례로 나폴레옹 1세가 1807년 프로이센에 물린 배상금과 똑같이 맞춘 것이었다. 프랑스는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를 인정했다. 프랑스는 기한보다 빨리 배상금을 치렀고, 독일군은 1873년 9월 물러났다. 독일 군부는 보주 산맥까지의 알자스와 티옹빌에서 메스에 이르는 길목을 미래의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한 필수 지역으로 보았고. 새 국경은 대체로 언어 경계를 따랐지만 프랑스어권 메스의 병합은 프랑스에서 분노를 일으켰고, 철과 석탄 같은 자원은 병합의 동기로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5 1
병합지는 1871년 6월 28일 「제국령 알자스-로렌」이 되어 연방 구성국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영토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주민을 먼저 「독일화」해야 한다고 보아 처음에는 점령지처럼 다루었다. 주민의 약 90%가 독일어 방언을 썼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의심했고, 1872~73년 문화투쟁이 이 지역에 미치자 가톨릭 교회는 저항의 통로가 되었다. 프랑스 국적을 택한 사람은 160,878명으로 전체의 10.4%였고 오랭에서는 20.3%에 이르렀으나, 실제로 프랑스로 떠난 사람은 약 5만 명이었다. 일부 추정은 선택자를 28만 명, 이주자를 13만 명까지 잡는다. 1874년 이 지역에 제국의회 의석 15석이 주어지자 당선자 가운데 6~10명이 병합에 반대하는 「항의 의원」이었고, 이들은 「의견을 묻지 않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독일 제국에 편입된 알자스-로렌 주민에게 이 병합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달라」는 프랑스어 동의안을 냈으나 큰 표차로 부결되었다. 1918년 프랑스로 돌아갈 때도 주민 투표는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병합을 원했는지, 군부와 여론의 물결에 떠밀렸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비스마르크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마지못해 양보했다」고 보며, 병합을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는다. 프랑스를 영구적인 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36 5 35
독일은 장교 33,101명과 병사 1,113,254명을 프랑스에 보내 전투에서 28,306명을 잃었고(전사 17,585명, 부상으로 사망 10,721명), 병으로 12,147명이 더 죽었는데 장티푸스 사망자만 6,965명이었다. 부상자는 89,732명이었다. 프랑스의 전투 사망자는 77,000명(전사 41,000명, 부상 사망 36,000명)이고 병사(病死)가 45,000명을 넘어 총 사망자는 138,871명이었으며, 부상자 137,626명, 포로 383,860명에 더해 90,192명이 스위스에, 6,300명이 벨기에에 억류되었다. 프로이센군의 포로 처형(도르나흐에서 프랑스 병사 200명 이상)과 민간인 폭력도 기록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파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포위 중 노동자 구역의 국민방위군은 장교를 선출하고 정부 명령을 거부할 만큼 정치화되어 있었고, 1871년 3월 18일 정규군이 몽마르트르의 대포를 거두려 하자 저항하며 장군 둘을 죽였다. 정부와 군은 베르사유로 물러났고 파리에는 코뮌이 섰다. 5월 21~28일 「피의 주간」에 정규군이 파리를 되찾았고, 정부군이 죽인 코뮌 가담자는 7천에서 3만 명으로 추산되다가 묘지 매장 기록을 조사한 최근 연구에서는 6천에서 1만 명으로 잡힌다. 생존자들은 1880년 강베타가 낸 법안으로 사면되었다. 1 15

평가
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서술은 지금도 갈린다. 비스마르크 자신이 회고록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은 자연히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뒤따른다고 늘 생각했다」고 써서 치밀한 계획의 신화를 키웠고, 일부 역사가는 그가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프랑스를 자극했다고 본다. 반면 엠스 전보가 전쟁의 원인으로 한 역할은 사소했으며 나폴레옹 3세가 이기리라 믿고 이미 전쟁을 택했다는 견해가 있고, 프랑스 역사가 프랑수아 로트와 피에르 밀자는 황제가 호전적 언론과 여론에 떠밀렸다고 본다. 독일에서는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토비아스 아란트는 스당까지의 전쟁을 고전적 「내각 전쟁」으로 보고, 그 뒤 국방정부의 민간인 동원과 병합 요구로 전쟁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자이퍼트는 후방의 동원과 선전을 근거로 이 전쟁을 20세기 총력전으로 가는 한 단계로 분류하지만, 크리스티네 크뤼거는 후방은 총력전의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포로를 인도적으로 다루고 세계대전과 달리 비교적 빨리 대결을 끝낸 점을 들어 반박한다. 1 2 5 24 4
수치는 출처마다 다르다. 메스에서 항복한 병력은 전쟁 개관 항목이 173,000명, 메스 포위 항목이 193,000명(장교 6,000명과 병사 167,000명이 포로가 되고 환자 2만 명이 남았다)으로 적는다. 그라블로트의 프랑스군 병력은 112,800명이지만 나폴레옹 3세 항목은 메스에 갇힌 바젠의 군대를 175,000명으로 쓴다. 알자스-로렌에서 프랑스 국적을 택한 사람은 공식 집계 160,878명과 최대 28만 명의 추정이 나란히 있다. 1871년 2월 선거에서 티에르가 당선된 선거구는 23곳 또는 86곳으로 나오고,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의 전쟁 공채 기권일은 영어 출처가 7월 21일, 독일어 출처가 7월 19일이며, 두 사람의 체포 시점을 영어 베벨 항목은 1871년 12월로 적지만 리프크네히트 항목과 독일어 재판 항목은 1870년 12월 17일로 적는다. 코뮌 희생자는 7천에서 3만 명이라는 전통적 추정과 6천에서 1만 명이라는 매장 기록 연구가 맞선다. 이 글은 각 지점에서 범위를 함께 적었다. 1 10 4 36 34 12 26 27 31
사회주의 운동에 이 전쟁은 두 가지 선례를 남겼다. 하나는 교전국 양쪽의 노동자 조직이 서로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고, 총평의회가 두 차례 담화로 「왕조 전쟁」을 규탄한 뒤 전쟁이 방어의 성격을 잃는 순간 승자의 병합에 반대한 일이다.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의 「물질적 보장」 비판을 넘어, 병합이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에 밀어 넣어 「슬라브 민족과 로망스 민족과의 전쟁」을 부르리라 내다보았고, 통일된 독일 제국을 「의회의 형식으로 가린 군사 전제」라 불렀다. 뒤의 역사가들도 병합을 비스마르크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지만, 복수심(revanchism)이 1880년대에는 가라앉았고 알자스-로렌 회복이 1차 세계대전 개전 뒤에야 프랑스의 전쟁 목표가 되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의회에서의 표결이다.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의 기권과 반대,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의 쇠사슬, 라이프치히의 요새금고형은 「이 체제에는 한 사람도, 한 푼도」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표어로 만들었고, 1871년 이후 독일 민족주의가 프랑스에 맞서 「제국의 적」(폴란드인·덴마크인·가톨릭·사회민주주의자)을 배제하며 자신을 규정하게 되자 이 표어는 당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베벨이 1913년 재산세를 조건으로 군사 예산에 찬성해 1914년의 전쟁 공채 표결을 예고했듯이, 1870년의 선례는 1914년에 지켜지지 않았다. 25 18 37 5 1 27 24 26
결과
프랑스는 제2제정을 잃고 제3공화국을 얻었으며, 약 13만 9천 명이 죽고 38만 명 넘게 포로가 되었다. 독일은 프로이센 주도로 통일되어 대륙의 최강국이 되었고, 알자스-로렌은 1918년까지 제국령으로 남아 프랑스의 보복심과 독일 포위 외교의 원천이 되었다. 국민방위군이 무기를 간직한 파리에서는 1871년 3월 코뮌이 일어났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전쟁 공채 반대와 라이프치히 재판으로 「이 체제에는 한 사람도, 한 푼도」라는 전통을 얻었으나, 1914년에는 이 전통을 지키지 못했다.
연표와 지도
- 11870-07-13엠스 전보
바트엠스에서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대사의 요구를 거절했고, 비스마르크가 보고 전보를 줄여 그날 저녁 공개했다.
- 21870-07-19프랑스의 선전포고
입법원이 전쟁 공채를 가결한 뒤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남독일 국가들이 곧바로 프로이센 편에 섰다.
- 31870-07-21베벨·리프크네히트의 전쟁 공채 기권
북독일연방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의 두 의원이 전쟁 공채 표결에 기권했다(독일어 출처는 19일).
- 1870-07-23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첫 담화
마르크스가 쓴 담화는 전쟁을 왕조 전쟁으로 규탄하고, 독일 노동자에게 방어 전쟁이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전쟁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라고 경고했다.
- 41870-08-04비상부르 전투
황태자의 제3군이 두에 사단을 압도하며 첫 전투가 벌어졌다.
- 51870-08-06뵈르트와 스피슈렌
마크마옹의 군대가 뵈르트에서 패해 보주 너머로 물러났고, 같은 날 스피슈렌에서 프로사르 군단이 밀려났다.
- 61870-08-18그라블로트·생프리바 전투
전쟁 최대의 전투. 독일군 20,163명, 프랑스군 12,275명의 손실을 냈고 바젠의 라인군은 메스로 물러났다.
- 71870-09-02스당 항복
나폴레옹 3세가 샬롱군 104,000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 81870-09-04공화국 선포와 국방정부 수립
파리 시청에서 강베타가 공화국을 선포했고 트로쉬를 수반으로 하는 국방정부가 섰다.
- 91870-09-05브라운슈바이크 선언 (1870)
사회민주노동자당 중앙위원회가 알자스-로렌 병합에 항의하고 공화국과의 명예로운 강화를 요구했다. 위원 전원이 체포되어 뢰첸으로 끌려갔다.
- 1870-09-09총평의회의 두 번째 담화
마르크스는 방어 전쟁이 스당에서 끝났다고 선언하고 병합이 새 전쟁의 씨앗이라고 경고했다.
- 101870-09-19파리 포위 시작
독일군이 파리를 에워쌌고 20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전날 파브르는 페리에르에서 비스마르크를 만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 111870-09-28스트라스부르 함락
한 달 넘는 포격과 공성 끝에 위리히 장군이 요새를 넘겼다. 민간인 341명이 죽었다.
- 121870-10-07강베타의 기구 탈출
내무장관 강베타가 기구로 포위망을 넘어 투르에서 지방의 전쟁을 지휘했다.
- 131870-10-27메스 항복
바젠이 굶주린 라인군과 함께 항복했다. 17만 3천에서 19만 3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 141870-10-31파리 시청 점거
메스 항복이 확인되자 블랑키·플루랑스·들레클뤼즈가 이끄는 대대들이 시청을 점거해 트로쉬 내각을 인질로 잡았다가 물러났다.
- 151870-11-09쿨미에 전투
루아르군이 바이에른군을 꺾고 오를레앙을 되찾았다.
- 161870-11-26베벨·리프크네히트의 전쟁 공채 반대
두 의원이 병합 없는 강화를 제안하고 추가 공채에 반대표를 던져 반역자로 몰렸다.
- 171870-12-04오를레앙 재함락
본라롤랑드와 루아니에서 패한 루아르군이 오를레앙을 다시 내주었고 정부 대표단은 보르도로 옮겼다.
- 181870-12-17베벨·리프크네히트·헤프너 체포
세 사람이 국가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영어 베벨 항목은 1871년 12월로 적는다).
- 191871-01-05파리 포격 시작
독일군이 23일 밤 동안 약 12,000발을 시내에 쏘았다. 사상자는 약 400명이었다.
- 201871-01-12르망 전투
샹지의 제2루아르군이 사상 7천 명, 포로 2만 2천 명, 탈영 5만 명을 내며 무너졌다.
- 211871-01-17리젠 전투
부르바키의 동부군이 벨포르 구원에 실패하고 스위스 국경으로 밀려났다.
- 221871-01-18독일 제국 선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선포되었다.
- 231871-01-19뷔즈발 전투
파리 수비군의 마지막 출격이 4천 명 넘는 손실로 끝났고, 트로쉬가 22일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 241871-01-28베르사유 휴전 협정
파브르와 비스마르크가 서명했다. 요새 인도, 정규군 무장해제, 2억 프랑, 국민방위군의 무장 유지가 조건이었다.
- 251871-02-01동부군의 스위스 억류
휴전에서 제외된 줄 몰랐던 동부군 8만 7천 명이 퐁타를리에에서 스위스로 넘어가 무장해제되었다.
- 261871-02-08국민의회 선거
43개 주가 점령된 가운데 치른 선거에서 강화를 약속한 왕당파가 큰 다수를 얻었다. 강베타는 6일 사임했다.
- 271871-02-26베르사유 가조약
티에르 정부가 가조약에 서명했고 3월 1일 독일군이 파리에서 승전 행진을 했다.
- 281871-03-18몽마르트르의 대포와 코뮌
정규군이 대포를 거두려 하자 국민방위군이 저항했고, 정부는 베르사유로 물러났다.
- 291871-05-10프랑크푸르트 조약
알자스와 로렌 일부의 할양, 50억 프랑의 배상, 완납까지의 점령이 확정되었다.
- 301871-06-28제국령 알자스-로렌 설치
병합지는 연방 구성국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영토가 되었다.
- 311872-03-26라이프치히 내란죄 재판 판결
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요새금고 2년을 선고받았고 헤프너는 무죄였다. 베벨의 의원직은 박탈되었다.
관련 인물 16명
프랑스 제2제정과 국방정부8명
지도부4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고 9월 2일 스당에서 군대와 함께 항복해 빌헬름스회에에 억류되었다. 1873년 영국 망명지에서 죽었다.
국방정부 수반·파리 총독루이쥘 트로쉬1815–18969월 4일 국방정부의 수반이 되어 파리 방어를 지휘했으나 출격이 모두 실패하자 1871년 1월 22일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국방정부 부수반·외무장관쥘 파브르1809–1880「한 치의 영토도」 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페리에르에서 비스마르크를 만났고, 1871년 1월 28일 휴전 협정과 5월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교섭했다.
국방정부 내무장관·투르 대표단레옹 강베타1838–18829월 4일 공화국을 선포했고, 10월 7일 기구로 파리를 벗어나 지방에서 새 군대를 조직했다. 휴전에 반대하다 1871년 2월 6일 사임했다.
참여3
7월 의회에서 전쟁에 반대했고 10~11월 중립국을 돌며 휴전을 교섭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었다.
10월 31일 봉기 지도자루이 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메스 항복이 확인된 10월 31일 플루랑스·들레클뤼즈와 함께 파리 시청을 점거했다가 물러났다.
10월 31일 봉기 지도자샤를 들레클뤼즈1809–187110월 31일 시청 점거에 가담했고, 포격 속에서 「1870년의 프랑스인은 전투가 축제였던 갈리아인의 후손」이라고 선언했다.
프로이센·북독일연방·남독일 국가들3명
지도부2
제1인터내셔널과 반전 사회주의자들4명
참여4
1870년 7월 23일과 9월 9일 총평의회 담화를 써서 왕조 전쟁을 규탄하고 알자스-로렌 병합에 반대했으며,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의 체포를 영국 신문에 알렸다.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에 보낸 편지의 공동 집필자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1870년 9월 1일 무렵 마르크스와 함께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병합이 강화를 휴전으로 만들 것이라고 썼다.
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7월 전쟁 공채 표결에서 기권하고 11월 26일 병합 없는 강화를 제안하며 반대표를 던졌다. 12월 체포되었고 1872년 라이프치히에서 요새금고 2년을 선고받았다.
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빌헬름 리프크네히트1826–1900베벨과 함께 기권·반대했고 「이 체제에는 한 사람도, 한 푼도」라는 구호를 냈다. 1872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혁명의 병사」를 자처하며 요새금고 2년을 받았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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