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
1848년 팔레르모와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어떻게 몇 주 만에 유럽 50여 나라로 번졌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농민, 서로 다른 민족 운동의 일시적 연합이 왜 1849년 말까지 군주와 군대의 반혁명에 모두 무너졌으며, 그 패배는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에 무엇을 남겼는가?
1845~1847년의 흉작과 산업 불황 속에서 1848년 1월 팔레르모, 2월 파리의 봉기가 「인민의 봄」을 열었다. 3월에 빈·부더페슈트·베를린·밀라노·베네치아의 정부가 굴복해 의회와 헌법, 언론 자유와 보통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포즈난·슐레스비히·보헤미아·헝가리에서 민족들이 부딪혔고, 6월 파리의 노동자 봉기와 프라하 봉기가 진압되면서 반혁명이 시작되었다. 1849년 로마 공화국과 헝가리 독립, 독일 제국헌법 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프랑스·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군대에 꺾였다. 이 사건은 나라별 하위 사건 4편을 묶고, 하위 사건이 없는 폴란드·덴마크·스위스·도나우 공국·영국과 공산주의자동맹을 함께 다룬다.

혁명 전야: 1845~1847년의 위기와 「사회 문제」
1848년의 혁명들은 산업화가 가져온 장단기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유산이 겹친 데서 나왔다. 농촌에서는 공유지의 사유화와 인클로저로 농민들이 숲에서 나무를 얻을 관습적 권리를 잃어 갔다. 프랑스는 1827년 산림법으로 이 권리를 법적으로 없앴고, 바이에른 팔츠에서 목재 절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1821~1822년 3만 7,500명에서 1846~1847년 18만 5,000명으로 늘어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봉건제가 남아 있던 중부·동부 유럽에서는 영주에 맞선 봉기가 잦았고, 혁명 전 가장 큰 농민 봉기는 1846년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에서 일어나 폴란드 귀족의 크라쿠프 봉기를 끝장냈다. 1
도시에서는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노동시장으로 몰려 실질임금이 떨어졌다. 1848년의 노동자 대부분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수공업자였고, 길드가 무너지면서 장인과 직인이, 선대제 아래에서 상인과 하청 수공업자가 맞섰다. 1831년과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 1844년 슐레지엔 직조공 봉기가 그 불만의 표현이었다. 교육받은 중간계급도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사회학자 리엘이 「지식인 프롤레타리아트」라 부른 박봉의 하급 관리·기자·교사층이 생겼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전문직은 언론으로 옮겨 1848년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1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급진주의·민족주의가 기존 정부에 맞선 주요 흐름이었다. 자유주의자는 법 앞의 평등과 시민적 자유, 입헌군주정을 원했지만 선거권은 재산 있는 남성에게 묶으려 했다. 급진파는 남성 보통선거를 요구했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늘어나는 빈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사회 문제」를 더 무겁게 다뤘다. 그 가운데 민주주의자는 규제와 국가 개입을,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의 폐지와 재분배를 내세웠다. 선거권은 극히 좁아서, 프랑스에서는 인구 2,600만 명 가운데 0.5%인 24만 1천 명만 투표할 수 있었다. 정당이 금지된 곳에서는 신문 편집진과 비밀결사가 반대파를 이끌었고,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가 가장 유명했다. 1
직접적인 방아쇠는 1845~1847년의 경제 위기였다. 1845년 감자 역병이 북유럽의 수확을 망쳤고, 아일랜드에서는 대기근으로 800만 인구 가운데 100만 명 넘게 죽었다. 1846년 가뭄은 곡물 수확을 해쳐 식량값을 치솟게 했고, 1846~1847년 프랑스에서 400건 넘는, 1847년 독일 여러 나라에서 164건의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비싼 식량과 미국 남부의 면화 흉작이 겹쳐 1847년 산업 불황이 왔고, 경제사가 베르거와 슈푀러는 1847년 산업 충격이 가장 컸던 나라들과 1848년 혁명이 일어난 나라들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였다. 1




「인민의 봄」: 팔레르모에서 파리·빈·베를린으로
혁명의 물결은 1848년 1월 12일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1846년 대폴란드 봉기와 1847년 11월 스위스 분리동맹 전쟁이 개혁을 둘러싼 폭력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인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2월 22~24일 파리의 봉기였다. 개혁 연회 금지에 맞선 시위가 혁명으로 번져 루이 필리프가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식은 한 주 만에 대륙에 퍼졌고, 메테르니히는 「다 끝났다」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편 사건이 이 과정을 자세히 다룬다. 1 2
몇 주 사이에 뮌헨·빈·부더와 페슈트·베네치아·크라쿠프·밀라노·베를린에서 봉기가 이어졌다. 요구는 어디서나 비슷했다. 대의제 의회, 언론과 결사의 자유, 남성 보통선거, 국민위병으로 인민을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빈에서는 3월 13~15일 충돌 끝에 메테르니히가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헌법을 약속했다. 곧이어 헝가리 의회가 합스부르크 군주국 안에서 헝가리의 주권을 얻어 냈다. 빈의 소식이 북이탈리아에 닿자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혁명 정부가 섰고,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해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베를린에서는 3월 18일 짧지만 치열한 바리케이드전 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군대를 물리고 자유주의 내각을 세웠다. 1
봄의 몇 달 동안 넓은 선거권으로 새 의회들이 뽑혔다. 프랑스 제헌의회, 오스트리아 제국의회, 헝가리 의회와 합스부르크 영토의 다른 다섯 의회, 그리고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첫 의회인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5월 18일 파울 교회에서 열렸다. 검열이 풀리자 정치 클럽과 신문이 쏟아졌고, 정치 클럽보다는 덜 조직되었지만 노동자 결사도 처음으로 퍼졌다. 동시대인이 「혁명적 열광」이라 부른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의 사제는 자유의 나무를 축복했고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과 헝가리인이 서로 끌어안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기계 파괴와 세리 습격이, 농촌에서는 공유지 점거와 영주 습격이 함께 일어났다. 1 3



민족들의 충돌: 포즈난·슐레스비히·보헤미아
늦봄부터 민족 갈등이 혁명을 가르기 시작했다. 프로이센령 포즈난 대공국에서는 1846년 봉기를 준비하다 사형을 선고받은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 등이 베를린 혁명으로 3월 19~20일 사면되어 「폴란드 군단」을 만들었고, 독일 혁명의 흑적금 깃발 아래 러시아에 맞선 공동 투쟁이 이야기되었다. 3월 20일 포즈난에서도 폴란드 민족위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폴란드인이 「민족적 재편」을 요구하자 현지 독일인은 독립을 원하는 폴란드인을 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국왕은 폴란드 대표단에게 자치를 약속하면서 비밀리에 진압을 준비시켰다. 4 5
4월 11일 야로스와비에츠 협정으로 폴란드 측은 자치 약속을 받고 의용군 대부분을 해산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남은 부대는 4월 30일 미워스와프에서 승리했으나 5월 8일 항복 협정이 맺어졌고, 미에로스와프스키의 주력은 5월 9일 바르도에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포즈난 요새에는 대부분 농민인 1,500명이 갇혀 학대를 받았다. 7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폴란드 논쟁」에서 한때 폴란드에 우호적이던 의원들도 폴란드 재건을 「광기」라 불렀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신라인 신문」은 이 배신을 독일 혁명의 시금석으로 다뤘다. 4 6
북쪽에서는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와 독일 민족주의가 부딪히는 곳이 되었다. 3월 코펜하겐에서는 3월 21일 크리스티안스보르로의 행진 끝에 프레데리크 7세가 국민자유당 내각을 세웠고, 덴마크는 이듬해 의회제 헌법을 얻어 반동이 되돌리지 못한 드문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부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통합하려 하자 같은 3월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어 주민이 봉기해 임시정부와 군대를 세웠고, 독일 연방과 프로이센이 군대를 보냈다. 이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8월 26일 프로이센이 열강의 압력 속에 덴마크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인 말뫼 휴전으로 끊겼고, 이 휴전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무력함을 드러내 9월 봉기를 불렀다. 1849년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1850년 이스테드 전투와 1852년 런던 의정서로 덴마크 왕의 주권이 확인되었다. 1 7
다민족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독일인·헝가리인·체코인·폴란드인·크로아티아인·우크라이나인·루마니아인·슬로바키아인·슬로베니아인·세르비아인·이탈리아인이 저마다 자치나 독립, 때로는 다른 민족에 대한 우위를 추구했다. 보헤미아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참여해 대독일에 들어가려는 독일계 주민과, 팔라츠키가 내세운 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 곧 합스부르크 군주국 안에서 체코의 자치를 꾀하는 노선이 맞섰다. 체코인은 6월 2~12일 프라하에서 슬라브 회의를 열었다. 갈리치아에서는 1848년 5월 2일 루테니아 최고회의가 세워져 갈리치아를 폴란드계 서부와 우크라이나계 동부로 나누자고 요구했다. 헝가리에서는 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이 마자르 민족국가에 맞섰고, 이 대립은 헝가리 편 사건이 다룬다. 1 8




혁명의 가장자리: 스위스·도나우 공국·영국·아일랜드
스위스는 혁명이 먼저 이긴 곳이었다. 1845년 가톨릭 7개 주가 중앙집권에 맞서 분리동맹을 맺자 연방 의회는 1847년 10월 이를 위헌으로 선언하고 무력 해산을 명했다. 뒤푸르 장군의 연방군 10만 명은 11월 3일부터 몇 주 만에 분리동맹군을 꺾었고, 사망자는 100명 안팎이었다. 1848년 새 헌법으로 스위스는 주들의 느슨한 연합에서 연방 국가로 바뀌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미리 개혁을 내주어 혁명을 피했다. 벨기에는 파리의 벨기에인 망명자 약 6,000명의 「벨기에 군단」을 3월 리스캉투에서 막았고, 3월 초 마르크스를 브뤼셀에서 추방했다. 9 1
러시아 보호 아래 「조직 규약」 체제로 다스려지던 도나우 공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몰다비아의 봉기가 실패한 뒤, 왈라키아에서는 비밀결사 「형제단」을 중심으로 니콜라에 벌체스쿠 등 젊은 지식인과 장교들이 6월 21일 이슬라즈 선언으로 보야르 특권 폐지와 농노 해방, 자치를 내걸었다. 공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물러나고 임시정부가 섰지만 토지 개혁을 둘러싸고 급진파와 보수파가 갈라졌다. 9월 18일 군중은 조직 규약과 보야르 명부를 불태웠다. 러시아의 압력 속에 9월 25일 오스만군이 부쿠레슈티에 들어와 혁명을 끝냈고, 러시아·오스만의 점령은 1851년까지 이어졌다. 10 11 1
영국에서는 1838년 인민헌장을 내건 노동자 정치개혁 운동, 차티즘이 1848년 세 번째 정점에 올랐다. 파리 혁명 소식 뒤 3월 맨체스터·글래스고·더블린에서 시위와 빵 폭동이 일어났고, 4월 10일 케닝턴 커먼에서 집회를 연 뒤 세 번째 청원을 의회로 가져가는 행진이 계획되었다. 의회는 4월 7일 선동 행위를 사형이나 유형에 처할 중죄로 정했고 특별 경찰 10만 명을 모았다. 퍼거스 오코너는 최대 5만 명 앞에서 연설한 뒤 행진을 취소했고 청원은 마차 세 대에 실려 의회로 갔다. 6월 이후 무장 계획을 꾸민 이들은 처벌받았고, 집회 조직자 윌리엄 커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형당했다. 차티즘은 1848년 뒤 빠르게 쇠퇴했다. 12 13
대기근 속의 아일랜드에서는 청년 아일랜드파가 1848년 범죄 예방법에 반발해 7월 봉기를 일으켰지만 사우스티퍼레리 발링개리에서 경찰 약 50명과의 총격전에서 실패했고, 지도자들이 체포되며 무너졌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큰 혁명을 겪지 않았다. 니콜라이 1세는 대신 헝가리와 도나우 공국에 개입했고, 국내에서는 비밀경찰을 늘리고 검열을 강화했다. 1848년의 물결은 유럽 밖에도 닿아 누에바그라나다의 개혁, 칠레의 1851년 혁명, 브라질 페르남부쿠의 프라이에이라 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1




반혁명의 여름과 가을 (1848년 6~12월)
여름이 되자 혁명 연합이 깨졌다. 파리에서는 4월 23일 선거가 보수 다수파를 의회로 보냈고, 5월 15일 급진파의 의회 습격 시도 뒤 정부는 좌파 지도자를 가두고 클럽과 신문을 닫고 뤽상부르 위원회를 해산했다. 6월 21일 국립 작업장 폐쇄가 노동자들의 6월 봉기를 불렀고, 4만~5만 명이 파리 곳곳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제헌의회에게 독재 권한을 받은 카베냐크 장군이 이를 피로 진압했다. 같은 6월 프라하에서는 빈디슈그레츠의 도발로 터진 봉기가 포격으로 진압되어 합스부르크 반혁명의 첫 승리가 되었다. 1 8
북이탈리아에서는 라데츠키가 7월 24일 쿠스토차에서 사르데냐군을 꺾어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영토를 거의 되찾았다. 힘을 되찾은 빈의 보수파는 크로아티아 총독 옐라치치를 헝가리로 보냈다. 9월 11일 헝가리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10월 6일 빈에서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나 급진파가 3주 동안 도시를 장악했지만, 옐라치치와 빈디슈그레츠의 군대가 10월 31일 이를 진압했다. 독일에서는 말뫼 휴전에 대한 분노가 9월 서부 독일의 봉기로 이어졌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중앙권력은 제후국 군대의 진압을 도왔다. 빈 봉기에 가담한 프랑크푸르트 의원 로베르트 블룸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처형되면서 의회의 권위는 더 무너졌다. 1 2 14
1848년 말 「인민의 봄」은 사실상 끝났다.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군대를 등에 업고 11월 9일 국민의회를 브란덴부르크로 옮긴 뒤 해산하고 흠정 헌법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2월 2일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혁명기의 양보에 매이지 않을 군주를 세운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2월 10일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75%의 표로 대통령에 뽑혔다. 질서 회복을 바란 보수파, 증세에 분노한 농민, 6월의 카베냐크를 미워한 도시 노동자가 함께 그를 찍었다. 1 3




두 번째 물결과 종말 (1849)
1848년 말 혁명은 시작된 곳, 곧 파리·빈·베를린·밀라노에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1848년에 넓어진 정치 활동은 급진파가 대도시 밖에서 조직할 길을 열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좌파는 지방으로 눈을 돌려 1849년 선거에서 농촌 노동자의 지지를 넓혔다. 이탈리아 중부에서는 급진파가 토스카나와 교황령에서 권력을 잡아 2월 토스카나 공화국과 로마 공화국을 선포했다. 사르데냐는 급진파가 선거에서 이긴 뒤 오스트리아와 다시 싸웠지만 3월 노바라에서 결정적으로 패했고 카를로 알베르토가 퇴위했다. 1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3월 7일 군대가 크렘지어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정부가 흠정 「3월 헌법」을 공포했다. 제국 전체에 적용되는 이 헌법은 헝가리의 자치를 없앴고, 헝가리는 4월 14일 데브레첸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폐위와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봄 공세로 헝가리군이 국토 대부분을 되찾자 오스트리아는 「무정부 상태에 맞선 성스러운 투쟁」을 내세워 러시아의 개입을 청했다. 러시아군 20만 명이 오스트리아군 17만 5천 명과 함께 헝가리군 17만 명에 맞섰다. 오스트리아는 대가를 내주지 않았고 러시아도 요구하지 않았다. 1 14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3월 프로이센 왕을 세습 황제로 하는 연방 입헌군주제와 남성 보통선거를 담은 제국헌법을 마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뽑았다. 그는 의회에 왕관을 줄 권한이 없다며 거부했고, 이에 맞서 5월부터 7월까지 제국헌법 운동의 봉기가 드레스덴·팔츠·바덴 등지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덴 5월 봉기는 5월 3~9일 이어졌다. 미에로스와프스키가 지휘한 바덴·팔츠 봉기군은 가장 오래 버텼지만 7월 23일 라슈타트가 항복하면서 독일 혁명이 끝났다. 1 3 5
1849년 여름 남은 혁명 정권은 로마·베네치아·헝가리뿐이었다. 로마 공화국은 7월 프랑스 원정군에게 무너졌다. 혁명을 낳은 나라의 제2공화국이 다른 나라의 공화국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베네치아는 1년 넘는 포위 끝에 8월 오스트리아에 항복했다. 러시아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린 헝가리는 6월 말부터 패배를 거듭하다 8월 13일 빌라고시에서 괴르게이가 러시아군에 항복했고, 코마롬 요새의 마지막 수비대가 10월 2~5일 항복하면서 1848년 혁명은 끝났다. 10월 6일 아라드에서 헝가리 장군 13명이, 페슈트에서 전 총리 버차니가 처형되었다. 1 14


공산주의자동맹과 노동자 운동
1848년에 등장한 가장 작은 조직 가운데 하나가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에 가장 큰 흔적을 남겼다. 공산주의자동맹은 1847년 6월 1일 런던에서 카를 샤퍼가 이끈 망명 독일 수공업자의 비밀결사 의인동맹과, 마르크스·엥겔스가 주도한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가 합쳐 생겼다. 의인동맹은 1839년 5월 파리 봉기에 가담했다가 런던으로 중심을 옮긴 조직이었다. 동맹의 위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7년 말 쓴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말 런던에서 독일어 23쪽 소책자로 익명 출간되었다. 3월 4일 마르크스가 벨기에에서 추방되었고, 3월 20일 무렵 1천 부가 파리에, 4월 초 독일에 닿았다. 15 16
혁명 동안 동맹은 비밀 조직의 성격을 잠시 버렸지만 효과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선언의 영향은 사실상 독일, 그것도 쾰른의 동맹원들과 마르크스가 편집한 「신라인 신문」에 그쳤다. 동맹원들이 세운 노동자 형제회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적 노동자 조직이 되었다. 엥겔스는 1849년 6~7월 바덴 전역에서 아우구스트 빌리히의 부관으로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1849년 5월 신문이 금지되고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되면서 지도부는 런던으로 옮겨 갔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6월 봉기가 진압되기 직전에 나왔다. 15 16
1849년 말 런던에서 재건된 동맹은 1850년 「신라인 신문 평론」을 냈다. 마르크스는 1850년 「중앙위원회의 동맹원에게 보내는 담화」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권력을 잡을 준비가 될 때까지 부르주아 민주 혁명 세력을 밀어주되 독자 조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연속혁명론을 폈다. 그러나 그해 말 곧 혁명을 다시 일으키자는 빌리히·샤퍼파와, 국제 노동운동을 길게 건설하자는 마르크스·엥겔스파가 갈라졌다. 1850년 프로이센 첩보원 슈티버가 동맹원 명부를 빼냈고, 1851년 중앙위원회 동맹원들이 체포되어 1852년 11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3~6년형을 받았다. 동맹은 그 직후 해산했다. 15 1 16




평가
1848년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넓게 번진 혁명의 물결이었다. 50여 나라가 영향을 받았지만 혁명가들 사이에 의미 있는 조정이나 협력은 없었다. 수만 명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망명했으며, 대부분의 혁명은 빨리 진압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농노제 폐지, 덴마크 절대왕정의 종식, 네덜란드의 대의 민주제 도입, 스위스 연방 국가의 탄생, 프랑스 남성 보통선거는 남았다. 프로이센 융커가 1852~1855년 영주 경찰권을 되찾고 오스트리아의 체포가 1850년 7만 건에서 1854년 100만 건으로 늘어난 것처럼 반동도 깊었다. 1
해석은 처음부터 갈렸다. 자유주의 민주주의자는 1848년을 길게 보아 자유·평등·우애를 보장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민족주의자는 신생 민족들이 낡은 다민족 제국을 거부한 「희망의 봄」으로 기억했다. 공산주의자는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고 노동계급을 배신한 혁명으로 보았다. 1848년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시각은 비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도 흔하며, 온건한 부르주아 혁명가와 급진파의 갈등이 실패에 큰 몫을 했다는 데 많은 연구가 동의한다.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1848년 이후를 정부가 공론장과 대중을 관리하는 「통치의 혁명」의 시기로 보았고, 프리실라 로버트슨은 혁명가들의 목표 다수가 1870년대까지 주로 혁명의 적들 손으로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을 이끈 언드라시와 데아크도 1848년의 혁명가였다. 1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1848년은 이론의 실험실이었다. 마르크스는 혁명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실망했고, 프랑스의 6월 봉기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대전투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계급 균형 위의 국가 권력으로 분석했다(프랑스 편). 엥겔스는 독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를 두려워해 제후들과 타협했다고 보았다(독일 편). 1850년 담화의 연속혁명 구상은 반세기 뒤 러시아 혁명가들의 논쟁, 특히 트로츠키의 이론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엥겔스가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며 남슬라브인 등을 「역사 없는 민족」이라 부른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둘러싼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다(헝가리 편). 1 16
패배 뒤 「포티에이터스」(48년 사람들)라 불린 수많은 망명자가 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캐나다·영국·미국으로 흩어졌다. 미국으로 간 약 4,000명 가운데 다수가 노예제에 반대했고, 빌리히·헤커·슈트루베 등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웠다. 런던은 마르크스·엥겔스뿐 아니라 마치니·코슈트·게르첸 등 여러 나라 망명자의 중심이 되었고, 그 만남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1850~1860년대에 거의 잊혔다가 파리 코뮌과 제1인터내셔널을 거친 1870년대 초에야 다시 널리 읽혔다. 1848년의 바리케이드와 패배는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다시 등장했다. 17 1 16
결과
1849년 10월 코마롬 요새의 항복으로 혁명들은 끝났다. 수만 명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망명했으며, 군주들은 흠정 헌법과 계엄으로 질서를 되찾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농노제 폐지, 덴마크 절대왕정의 종식, 스위스 연방 국가, 프랑스 남성 보통선거는 남았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은 혁명이 아니라 1860~1870년대 비스마르크와 카보우르의 손으로 이뤄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지의 배신과 연속혁명의 교훈을 끌어냈고, 그 분석은 1871년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가들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 11847.11스위스 분리동맹 전쟁
뒤푸르의 연방군 10만 명이 11월 3일부터 몇 주 만에 가톨릭 7개 주의 분리동맹을 꺾었다. 1848년 헌법으로 스위스는 연방 국가가 되었다.
- 21848.01.12팔레르모 봉기
시칠리아에서 부르봉 왕가에 맞선 봉기가 일어나 1849년 5월까지 이어지는 임시정부가 섰다. 1848년 혁명의 첫 불꽃이었다.
- 1848.02「공산당 선언」 출간
공산주의자동맹의 위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선언이 2월 말 런던에서 독일어 소책자로 익명 출간되었다.
- 31848.02.22파리 2월 혁명
개혁 연회 금지에 맞선 시위가 24일까지 혁명으로 번져 루이 필리프가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41848.03.13빈 봉기와 메테르니히 사임
13~15일 충돌 끝에 메테르니히가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페르디난트 1세가 헌법을 약속했다.
- 51848.03.15페슈트의 12개조
페슈트와 부더의 대중 시위가 언론 자유와 책임 내각 등 12개조를 받아들이게 했다.
- 61848.03.18베를린 바리케이드전
짧고 치열한 시가전 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군대를 물리고 자유주의 내각을 세웠다. 같은 날 밀라노 5일이 시작되었다.
- 71848.03.20포즈난 폴란드 민족위원회
베를린 혁명으로 사면된 폴란드 정치범들이 「폴란드 군단」을 만들었고, 포즈난에서 민족위원회가 세워졌다.
- 81848.03.21코펜하겐 행진
크리스티안스보르로의 행진 끝에 프레데리크 7세가 국민자유당 내각을 세워 절대왕정이 끝났다.
- 91848.04.10케닝턴 커먼 차티스트 집회
특별 경찰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오코너가 최대 5만 명 앞에서 연설하고 의회 행진을 취소했다.
- 101848.05.09바르도 항복
4월 30일 미워스와프에서 이겼던 미에로스와프스키의 주력이 바르도에서 무기를 내려놓아 대폴란드 봉기가 끝났다.
- 111848.05.18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개원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첫 의회가 파울 교회에서 열렸다.
- 121848.06.02프라하 슬라브 회의와 봉기
6월 2~12일 슬라브 회의가 열렸고, 빈디슈그레츠의 도발로 터진 봉기는 포격으로 진압되었다.
- 131848.06.21이슬라즈 선언
왈라키아 혁명가들이 보야르 특권 폐지와 자치를 내건 강령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 141848.06.22파리 6월 봉기
국립 작업장 폐쇄에 맞서 4만~5만 명이 26일까지 싸웠고 카베냐크가 이를 진압했다.
- 151848.07.24쿠스토차 전투
라데츠키가 사르데냐군을 꺾어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영토를 거의 되찾았다.
- 1848.08.26말뫼 휴전
프로이센이 덴마크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여 슐레스비히 전쟁을 멈췄고, 독일에서는 「배신」에 대한 분노가 9월 봉기를 불렀다.
- 161848.09.25오스만군의 부쿠레슈티 진입
러시아의 압력 속에 오스만군이 왈라키아 혁명을 끝냈다. 러시아·오스만 점령은 1851년까지 이어졌다.
- 171848.10.06빈 10월 봉기
헝가리 독립전쟁의 시작에 맞춰 빈에서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났고 10월 31일 옐라치치와 빈디슈그레츠에게 진압되었다.
- 1848.12.02프란츠 요제프 즉위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혁명기의 양보에 매이지 않을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 1848.12.10루이 나폴레옹 대통령 당선
나폴레옹의 조카가 75%의 표로 프랑스 첫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 181849.02로마 공화국 선포
교황이 가에타로 달아난 뒤 급진파가 로마 공화국과 토스카나 공화국을 선포했다.
- 191849.03.07크렘지어 제국의회 해산
오스트리아군이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정부가 흠정 3월 헌법을 공포해 헝가리의 자치를 없앴다.
- 201849.03.23노바라 패전
사르데냐가 오스트리아에 결정적으로 패했고 카를로 알베르토가 퇴위했다.
- 211849.04.14헝가리 독립 선언
데브레첸에서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폐위하고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 221849.05.03드레스덴 5월 봉기
국왕의 제국헌법 거부에 맞선 제국헌법 운동이 9일까지 드레스덴에서 싸웠다.
- 1849.07로마 공화국 함락
프랑스 원정군이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 231849.07.23라슈타트 항복
가장 오래 버틴 바덴 봉기군이 항복해 독일 혁명이 끝났다.
- 241849.08.13빌라고시 항복
괴르게이가 러시아군에 항복해 헝가리 독립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 251849.08베네치아 항복
1년 넘는 포위 끝에 산마르코 공화국이 오스트리아에 항복했다.
- 261849.10.06아라드 처형
헝가리 장군 13명이 아라드에서, 전 총리 버차니가 페슈트에서 처형되었다. 코마롬의 마지막 수비대는 2~5일 항복했다.
- 271852.11쾰른 공산주의자 재판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동맹원들이 3~6년형을 받았고 동맹은 곧 해산했다.
관련 인물 37명
혁명과 민족 운동20명
지도부12
1848년 대폴란드 봉기를 지휘했고 시칠리아 혁명군 참모장을 거쳐 1849년 바덴·팔츠 봉기군을 이끌었다.
왈라키아 혁명의 급진파 지도자니콜라에 벌체스쿠1819–1852임시정부 장관을 지내며 토지 개혁과 보통선거를 주장했고, 1849년 코슈트와 루마니아인 사이를 중재하려 했다.
프랑스 임시정부 위원, 뤽상부르 위원회 의장루이 블랑1811–1882노동권과 「노동의 조직」을 내건 사회주의자로 노동자 대표의 뤽상부르 위원회를 이끌었다.
프랑스 임시정부 외무장관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2월 혁명 뒤 임시정부의 얼굴이 되었고 혁명의 수출을 배제했다.
헝가리 혁명의 지도자코슈트 러요시1802–1894국방위원회를 이끌고 1849년 4월 데브레첸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패전 뒤 망명했다.
헝가리군 사령관괴르게이 아르투르1818–19161849년 봄 공세를 이끌었고 8월 13일 빌라고시에서 러시아군에 항복했다.
바덴 공화파 봉기 지도자프리드리히 헤커1811–18811848년 4월 슈트루베와 공화국을 내건 헤커 봉기를 일으켰고 망명 뒤 미국 남북전쟁에서 싸웠다.
바덴 의용군 지휘관아우구스트 빌리히1810–18781849년 엥겔스를 부관으로 바덴에서 싸웠고 1850년 동맹 분열에서 즉각 봉기파를 이끌었다.
청년 이탈리아 창립자, 로마 공화국 3두주세페 마치니1805–1872혁명 전 비밀결사의 본보기였고 1849년 로마 공화국을 이끌었다.
로마 공화국 방어 지휘관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1849년 프랑스 원정군에 맞서 로마를 지켰다.
산마르코 공화국 대통령다니엘레 마닌1804–18571848년 베네치아 공화국을 세우고 1849년 8월 항복까지 포위를 버텼다.
차티즘 지도자퍼거스 오코너1796–18551848년 4월 10일 케닝턴 커먼 집회에서 600만 명이 서명했다는 청원을 내걸었으나, 행진이 금지되자 군중에게 해산을 요청해 영국의 1848년을 무혈로 끝냈다. 의회 조사는 진짜 서명을 200만 명이 안 된다고 보았다.
참여6
엥겔스와 「공산당 선언」을 쓰고 쾰른에서 「신라인 신문」을 펴냈다. 1850년 담화로 연속혁명론을 폈다.
「공산당 선언」 공저자, 바덴 전역 참전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1849년 6~7월 바덴 전역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파리의 혁명가루이 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1848년 5월 15일 시위 뒤 투옥되었다.
헝가리 3월 15일의 시인페퇴피 샨도르1823–18491848년 3월 15일 페슈트에서 「민족의 노래」를 낭송했고 1849년 전사했다.
드레스덴 5월 봉기 가담자미하일 바쿠닌1814–1876프라하 슬라브 회의에 참석했고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다.
의인동맹 지도자, 공산주의자동맹 창립자카를 샤퍼1812–1870망명 독일 수공업자의 의인동맹을 이끌었고, 1847년 6월 런던에서 동맹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뀔 때 앞장섰다. 1850년 곧 봉기를 다시 일으키자는 빌리히·샤퍼파를 이끌었다.
군주·군대와 반혁명10명
지도부3
집행 · 지휘5
제헌의회에게 독재 권한을 받아 파리 6월 봉기를 피로 진압했다.
프라하·빈 진압 사령관알프레트 빈디슈그레츠1787–18621848년 6월 프라하를 포격하고 10월 빈 봉기를 진압했다.
크로아티아 총독요시프 옐라치치1801–18591848년 9월 헝가리를 침공하고 10월 빈 봉기 진압에 가담했다.
북이탈리아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요제프 라데츠키 폰 라데츠1766–18581848년 쿠스토차와 1849년 노바라에서 사르데냐군을 꺾었다.
프로이센 첩보원빌헬름 슈티버1818–18821850년 공산주의자동맹의 동맹원 명부를 빼냈고, 이는 1851년 중앙위원회 동맹원 체포와 1852년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으로 이어졌다
진영 밖
지도부2
참여4
프랑크푸르트 의회 참여를 거부하고 합스부르크 군주국 안의 체코 자치를 내세웠으며 프라하 슬라브 회의를 이끌었다.
교황비오 9세1792–1878개혁 교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848년 전쟁에서 빠졌고 가에타로 달아났다가 프랑스군의 힘으로 돌아왔다.
헝가리 법무장관, 1867년 대타협의 주역데아크 페렌츠1803–18761848년의 혁명 정부 각료가 1867년 대타협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사르데냐 총리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1810–1861혁명이 실패한 뒤 이탈리아 통일은 1860년대 카보우르의 외교와 전쟁으로 이뤄졌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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