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민주주의 (1848년 혁명)
Radical democrats of 1848
1848~1849년 유럽 혁명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온건 자유주의자와 달리, 군주제와 신분 특권을 없애고 인민주권과 보통선거에 바탕한 민주공화국을 요구하며 무장봉기에도 나선 급진 민주파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독일의 헤커·슈트루베·블룸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좌파, 이탈리아의 마치니·가리발디와 로마 공화국, 프랑스의 르드뤼롤랭과 산악파, 헝가리의 페퇴피, 왈라키아의 벌체스쿠가 대표적이며, 같은 시기 영국 차티스트의 청원 운동도 함께 다뤄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을 ‘소시민 민주파’로 분석했고, 『소련 대백과사전』은 이들 가운데 여럿을 ‘혁명적 민주주의자’로 소개한다.
상세
이름과 범위
1848~1849년 혁명을 이끈 세력은 곧 온건 자유주의자와 급진 민주주의자로 갈라졌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세습 황제를 둔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자유주의 중도파를 ‘절반파’, 의회주의적 전 독일 민주공화국을 요구한 민주 좌파를 ‘전체파’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연구도 공화주의 ‘민주파’와 ‘온건파’를 나누어 다룬다. 이 항목은 여러 나라에서 군주제와 신분 특권을 없애고 인민주권과 보통선거에 바탕한 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며, 의회 활동과 함께 무장봉기에도 나선 급진 민주파를 함께 다룬다. 독일어 문헌은 헤커·슈트루베·야코비·슈르츠 같은 인물을 ‘급진 민주주의적(radikaldemokratisch)’ 정치가나 혁명가로 소개한다.
독일: 바덴의 공화파와 국민의회 좌파
바덴에서는 급진 민주파와 초기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드러졌고, 민주공화국 요구가 다른 독일 연방 국가들보다 일관되게 제기되었다. 1847년 9월 12일 오펜부르크 민중 집회에서 프리드리히 헤커가 13개조의 인민 요구를 내놓았다. 헤커는 군주제 폐지와 의회공화국, 국가가 지원하되 자유롭게 경쟁하는 노동자 결사를 주장했고, 거대 자본의 무제한성과 ‘제4신분’의 궁핍 사이의 불균형을 없애자고 했다. 구스타프 슈트루베는 서른네 개 군주 가문이 독일을 다스리는 한 구원은 없다며 북아메리카를 본뜬 연방공화국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1848년 3월 프랑크푸르트 예비의회에서 이 노선을 관철하지 못하자 4월 콘스탄츠에서 의용대를 이끌고 헤커 봉기를 일으켰다가 칸데른에서 패했고, 슈트루베는 9월 뢰라흐에서 다시 봉기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민주 좌파는 ‘도이처 호프’와 그보다 더 왼쪽의 ‘도너스베르크’ 같은 원내 모임을 이루었고, 1848년 11월부터 중앙 3월 협회로 뭉쳤다. 도너스베르크는 인민주권과 미국식 국가 모델을 요구하면서도 슐레스비히·포젠·보헤미아·모라비아를 독일 국가에 넣자는 강한 민족주의를 함께 내세웠다. 좌파 지도자 로베르트 블룸은 빈 10월 봉기에서 혁명 측에 가담했다가 1848년 11월 9일 즉결 군사재판의 판결로 총살되었다. 1849년 5월 국민의회의 헌법을 관철하려는 제국헌법 운동은 작센·팔츠·바덴에서 봉기로 번졌다. 팔츠 봉기는 헌법 수호와 바이에른 왕국으로부터의 분리를 내걸었고, 바덴 혁명은 7월 23일 라슈타트 요새가 함락되며 끝났다. 그 뒤 바덴에서만 약 8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이탈리아: 마치니파 민주파와 로마 공화국
주세페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는 ‘신과 인민’을 구호로 삼아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를 중앙정부를 둔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교황령에서는 1849년 2월 9일 로마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공화국은 마치니·아우렐리오 사피·카를로 아르멜리니의 삼두정 아래 남성 보통선거 같은 원칙을 내세웠다. 주세페 가리발디와 고프레도 마멜리 등 반도 곳곳에서 온 이들이 그 방어에 나섰지만, 공화국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보낸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7월 4일 끝났다. 이탈리아어 위키백과는 1849년에 온건파의 신겔프주의 구상과 마치니파 민주파의 구상이 함께 실패했다고 정리한다.
패배 뒤 민주파 안에서는 노선 논쟁이 일었다. 카를로 피사카네와 주세페 몬타넬리 등은 민족운동이 민중의 이익에 맞는 사회 개조와 결합해야 한다며 마치니를 비판했고, 마치니는 행동당을 세워 봉기 노선을 이어 갔다. 가리발디는 1860년 천인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원정에 나서 양시칠리아 왕국을 이탈리아 왕국에 합치는 길을 열었는데, 정복지를 국왕에게 넘긴 그를 마치니는 배신자로 여겼다.
프랑스·헝가리·왈라키아·영국
프랑스에서는 알렉상드르 르드뤼롤랭이 1843년 창간한 《라 레포름》이 공화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강령을 내건 이들의 기관지가 되었다. 루이 블랑, 페르디낭 플로콩 등이 참여한 이 신문의 사람들에게 정치 개혁은 곧 사회 개혁이어야 했다. 르드뤼롤랭은 2월 혁명 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으로서 남성 보통선거를 포고로 도입했으나, 184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5%를 얻는 데 그쳤다. 1849년 그는 200명이 넘는 의원으로 이루어진 산악파를 이끌었고, 6월 13일 정부 전복 시도가 진압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헝가리에서는 시인 샨도르 페퇴피가 ‘3월 청년들’의 지도자로서 1848년 3월 15일 페슈트 혁명의 중심에 섰다. 그의 시 「민족의 노래」는 12개조와 함께 그날 민중의 뜻을 담은 대표 문서가 되었고, 그는 1849년 7월 31일 페헤레지하저 부근에서 숨졌다. 왈라키아의 니콜라에 벌체스쿠는 1843년 비밀결사 프러치아(‘형제애’)를 함께 세웠고, 1848년 부쿠레슈티 혁명의 임시정부에 참여해 농민에게 토지를 주는 것과 보통선거를 요구했다. 1849년에는 데브레첸에서 러요시 코슈트를 만나 루마니아와 헝가리 혁명가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은 1838년부터 1857년까지 정치 개혁을 요구한 노동계급 운동으로, 1839년·1842년·1848년에 가장 강했다. 《노던 스타》를 펴낸 퍼거스 오코너가 이끈 차티스트들은 1848년 4월 10일 런던 케닝턴 커먼 집회 뒤 세 번째 청원을 의회로 가져가려 했고, 운동은 그 뒤 빠르게 쇠퇴했다.
패배 이후: 망명과 그 뒤의 행로
패배한 민주파 상당수는 처음 프랑스·영국·스위스로, 뱃삯을 마련할 수 있는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치니는 1850년 런던에서 유럽 민주 중앙위원회를 세웠고, 『소련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르드뤼롤랭도 마치니·코슈트와 함께 이 망명 조직을 만들었다. 미국으로 간 독일 망명자들은 포티에이터스로 불렸다. 헤커는 1856년부터 일리노이 공화당에서 노예제 폐지와 링컨 당선을 위해 활동했고, 바덴 혁명군의 전쟁장관이었던 프란츠 지겔은 남북전쟁에서 북군 소장이 되었다. 1850년 스판다우 감옥에서 스승 고트프리트 킨켈을 탈출시킨 카를 슈르츠는 1877~1881년 미국 내무장관을 지냈다.
남은 이들의 행로는 갈렸다. 요한 야코비는 1861년 독일 진보당에 들어갔다가 1872년 사회민주노동자당에 입당하며, 그 원칙과 “1848년 민주주의의 원칙은 같다”고 말했다. 가리발디는 국제노동자협회를 두고 “인터내셔널은 미래의 태양”이라고 했고 파리 코뮌을 지지했다. 반면 마치니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했고 파리 코뮌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
마르크스가 1848~1849년 쾰른에서 펴낸 《신라인 신문》의 부제는 ‘민주주의의 기관지’였다. 신문은 통일되고 분할할 수 없는 민주적 독일 공화국과, 폴란드의 통일과 독립을 되찾기 위한 대러시아 전쟁을 주장했다. 편집진의 엥겔스는 1849년 바덴 봉기에도 직접 가담했다.
패배 뒤인 1850년 3월 마르크스가 쓴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담화」는 민주파를 ‘소시민층의 당’으로 규정하고 세 갈래로 나누었다. 가장 앞선 대부르주아 일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좌파와 슈투트가르트 잔여 의회를 대표로 삼은 ‘민주적·입헌적 소시민’, 그리고 스위스식 연방공화국을 이상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붉은 사회민주파라 부르는 ‘공화주의적 소시민’이다. 담화는 이들이 국가 지출 삭감, 대토지 소유자와 부르주아에 대한 과세, 공공 신용기관 같은 요구를 내걸지만 노동자는 임금노동자로 남겨 두려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자당은 “타도하려는 분파에 맞서서는 그들과 함께 가고, 그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굳히려는 모든 일에서는 그들에 맞선다”고 했다. 민주파가 혁명을 되도록 빨리 끝내려 할 때 노동자의 과제는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이 여기서 나왔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1849년 2월 프랑스 소시민층의 민주파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손잡아 생겨난 ‘사회민주주의’를 다루었다. 그는 그 특징을 민주공화제 제도를 “자본과 임금노동이라는 두 극단을 함께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대립을 누그러뜨려 조화로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하는 데서 찾았고, 이를 “소시민층의 한계 안에서의 사회 변혁”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민주파 대표자들이 모두 상점 주인인 것은 아니며, 그들을 소시민의 대표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사고가 소시민이 생활에서 넘지 못하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마치니와 마르크스는 서로를 비판했고, 마르크스는 마치니를 ‘민주주의 교회의 교황’이라고 불렀다.
『소련 대백과사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소련 대백과사전』(1969~1978)은 페퇴피와 벌체스쿠를 ‘혁명적 민주주의자’로, 가리발디를 이탈리아를 ‘아래로부터’ 통일하려 한 민족해방운동 ‘혁명적 민주주의 날개’의 지도자로 소개한다. 마치니는 그 운동의 ‘좌익 공화주의·민주주의 흐름’의 지도자이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로, 르드뤼롤랭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로 적었다. 같은 말은 1830~1860년대 러시아의 게르첸·체르니솁스키 등에게도 쓰였는데, 이 흐름은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항목에서 따로 다룬다. 이런 분류에는 다른 견해도 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가리발디 항목은 그가 마치니파나 왕정파와 손잡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어느 흐름에 속한다고 할 수 없고, 그가 혁명적 민주주의 견해를 온전히 공유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쓴다. 루마니아 공산주의 이념가들은 마르크스의 몇몇 저작에 기대어 벌체스쿠를 루마니아 공산주의 이상의 선구자로 보았다.
이웃 항목과의 구별
‘산악파 (1848–1851)’는 이 가운데 프랑스 제2공화국 의회의 르드뤼롤랭 그룹만을 가리키고, ‘산악파’는 1793년 국민공회의 급진 파벌이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는 같은 계열의 이름을 쓰지만 러시아 인텔리겐치야의 사상 조류다. 혁명 전체의 경과는 1848년 혁명과 나라별 사건에서, 미국 망명자는 포티에이터스에서, 같은 혁명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자동맹 (1847–1852)에서 다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d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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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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