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Russian revolutionary democracy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는 19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으로 전제정과 농노제를 무너뜨리고 공정한 민주 사회를 세우려 한 급진 인텔리겐치야의 사상 조류다. 농노제에 반대하는 농민 혁명의 구상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결합했고, 몇몇 문제에서는 서구주의·슬라브주의와 맞섰다. 1830~1840년대에 생겨나 186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으며, 대표자로는 런던에서 《종》을 펴낸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니콜라이 오가료프,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 《동시대인》의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러시아의 말》의 드미트리 피사레프가 꼽힌다. 레닌은 이들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불렀고, 소련 학계는 오랫동안 이들을 나로드니키와 엄격히 구별했다. 1860년대 말부터 이 흐름은 혁명적 나로드니키로 이어졌다.
상세
정의와 이름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는 혁명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세우려 한 러시아 제국의 사상 조류다. 농노제에 반대하는 농민 혁명의 구상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결합했고, 몇몇 문제에서는 당대의 다른 두 주요 사조인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에 맞섰다. 1830~1840년대에 생겨나 186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으며, 주된 담당자는 인텔리겐치야, 특히 급진적인 청년층이었다.
이들을 하나의 계보로 묶는 이름에는 레닌의 평가가 깊이 배어 있다. 레닌은 게르첸, 벨린스키, 도브롤류보프, 체르니솁스키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불렀다. 1912년 게르첸 탄생 100주년에 쓴 「게르첸을 기리며」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세 세대, 세 계급을 구분했다. 첫째는 데카브리스트와 게르첸 같은 귀족·지주 출신 혁명가들로, 민중과 멀리 떨어진 좁은 집단이었다. 게르첸이 시작한 혁명적 선동은 체르니솁스키에서 인민의 의지당 투사들에 이르는 혁명적 잡계급 지식인(라즈노친치)이 이어받았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대중의 선두에 섰다는 것이다. 레닌은 게르첸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동요했다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세르노-솔로비요비치의 비판을 옳다고 보면서도, 게르첸에게서 결국 민주주의자가 우위를 차지했다고 썼다.
서클과 망명 출판
혁명적 민주주의의 사상적 전제로는 데카브리스트 운동, 특히 파벨 페스텔의 「루스카야 프라브다」에 담긴 무장봉기를 통한 전제정 타도, 공화정, 농노제 폐지 같은 생각이 꼽힌다.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검열이 강화되자 철학적 사유는 스탄케비치 서클, 게르첸-오가료프 서클, 페트라솁스키 서클 같은 좁은 동아리 안에서 자랐다. 게르첸과 오가료프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 소식에 깊은 인상을 받아 소년 시절 참새 언덕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1840년 무렵 ‘현실과의 화해’에서 돌아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이념 중의 이념”이라고 불렀다. 그는 문학이 사회적 이익에 봉사하고 사회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는 비평 기준을 세웠다. 1847년 7월 독일 잘츠브룬에서 쓴 「고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은 금서로 필사되어 러시아에 퍼졌고, 합법 출판은 1905년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다. 같은 해 러시아를 영영 떠난 게르첸은 1849년 6월 13일 파리 시위에 참여한 뒤 망명 생활을 이어 가다 런던에서 자유 러시아 인쇄소를 세웠다. 그는 1855년 연감 《북극성》을 냈고, 1856년 런던으로 건너온 오가료프와 함께 1857년부터 신문 《종》을 펴냈다. 《종》의 영향력은 농노 해방 직전에 정점에 이르러 겨울궁전에서도 정기적으로 읽혔지만,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지지하면서 발행 부수가 크게 줄었다. 그 무렵 게르첸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너무 혁명적이었고 급진파에게는 너무 온건했다.
《동시대인》과 1860년대 세대
체르니솁스키는 1854년 초 잡지 《동시대인》에 합류해 1855~1862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도브롤류보프와 함께 사실상 잡지를 이끌며 이를 혁명적 민주주의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투르게네프 등 자유주의 문인들이 이에 반발했다. 1857년부터 비평·서지 부문을 맡은 도브롤류보프는 작품을 사회 문제를 논하는 계기로 삼는 ‘실재 비평’을 폈다. 1860년대의 새 세대, 이른바 ‘60년대인’은 앞 세대의 ‘잉여 인간’ 대신 혁명가와 허무주의 운동의 ‘새로운 인간’을 내세웠고, ‘합리적 이기주의’를 윤리의 바탕으로 삼았다. 드미트리 피사레프는 1860년 12월부터 《러시아의 말》에서 일하며 곧 이 잡지의 사상적 지도자가 되었다.
체르니솁스키는 1858~1859년의 글에서 농민을 토지와 함께 아무 배상금 없이 즉시 해방하고 공동체적 토지 소유를 지켜 점차 사회주의적 토지 이용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1861년 농노 해방이 발표되자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새로운 예속으로 받아들였다. 체르니솁스키의 것으로 여겨진 격문 「지주의 농민들에게 그들의 벗이 보내는 인사」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고 썼고, 《종》 제105호는 농민들이 해방이 속임수임을 알지 못했다고 썼다. 1862년 7월 7일 체르니솁스키는 이 격문을 쓴 혐의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갇혔고, 그곳에서 쓴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1863년 《동시대인》에 실렸다. 1864년 그는 14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이를 7년으로 줄였지만, 감옥과 유형지에서 20년 넘게 보냈다. 피사레프도 로마노프 왕조 타도를 촉구한 글 때문에 1862년 7월부터 1866년 11월까지 같은 요새에 갇혔다. 《동시대인》은 1866년에 폐간되었고, 네크라소프와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1868년부터 《조국 잡기》를 이끌었다.
나로드니키로의 이행과 이웃 조류
1860년대 말부터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언어는 혁명적 나로드니키로 바뀌어 갔다. 게르첸은 러시아가 농민 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고, 자신의 견해를 ‘러시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트카초프, 표트르 라브로프의 사상이 이 새로운 흐름의 이론적 바탕을 굳혔고, 차이콥스키파와 네차예프파, 토지와 자유, 인민의 의지당이 그 뒤를 이었다. 1870년 오가료프는 세르게이 네차예프와 함께 《종》을 여섯 호 더 냈다. 소련 역사가 B. P. 코즈민은 1860년대 혁명가들과 그 후계자들 사이에 깊은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농업국 특유의 공상적 사회주의인 나로드니키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였다고 보면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와 나로드니키를 엄격히 나누는 관행이 오래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서구주의와의 관계에서 게르첸은 서구주의에서 자유주의를, 슬라브주의에서 보수주의와 대국주의를 버리고 두 사조를 독특하게 종합했다. 레닌은 게르첸을 ‘러시아’ 사회주의와 나로드니키주의의 창시자로 보면서, 토지와 함께하는 농민 해방과 공동체적 토지 소유에서 사회주의를 본 그의 학설에는 사회주의가 한 톨도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레닌은 피사레프를 좋아해 시베리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 그의 초상을 가져갔다고 크룹스카야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