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혁명과 독립전쟁
1848년 3월 피 한 방울 없이 귀족 특권과 농노제를 없앤 헝가리의 입헌 혁명은 어떻게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전면전과 독립 선언으로 치달았고, 왜 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은 헝가리가 아니라 빈의 편에 섰으며, 러시아군의 개입과 아라드의 처형 뒤 이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 문제 논쟁에 무엇을 남겼나?
1848년 3월 빈 봉기로 메테르니히가 물러나고 3월 15일 페슈트에서 페퇴피와 「3월 청년들」이 12개조를 내건 무혈 혁명을 일으키자, 버차니 정부는 4월 법으로 귀족 특권과 농노제를 폐지하고 헝가리를 사실상 독립된 입헌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민족 국가 구상은 크로아티아·세르비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인의 자치 요구와 부딪혔고, 빈의 궁정은 이들을 헝가리에 맞세웠다. 9월 옐라치치의 침공을 파코즈드에서 막은 헝가리는 코슈트의 국방위원회 아래 혼베드를 일으켰고, 빈 10월 봉기와 프라하 봉기가 진압된 뒤 프란츠 요제프와 빈디슈그레츠의 공격에 맞섰다. 1849년 봄 공세로 거의 전 국토를 되찾은 헝가리는 4월 14일 데브레첸에서 독립을 선언했지만, 니콜라이 1세가 보낸 약 20만 명의 러시아군과 하이나우의 오스트리아군에 밀려 8월 13일 빌라고시에서 항복했다.

메테르니히 체제와 헝가리의 개혁 시대
1815년 빈 회의 뒤의 유럽 질서는 오스트리아 외무장관(1809년부터)이자 국가재상(1821~1848년)이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이름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는 30년 동안 열강의 세력 균형인 「유럽 협조 체제」의 중심에 있었고, 국제 회의를 거듭하는 「메테르니히 체제」로 오스트리아를 러시아, 그리고 그보다 덜하게 프로이센과 묶어 혁명과 민족 운동을 억눌렀다.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로 독일 연방의 대학과 언론을 단속했고, 국내에서는 검열과 넓은 첩자망으로 불온한 움직임을 막았다. 3월 전기의 오스트리아는 언론 자유를 제한하고 대학 활동을 묶었으며 학생 조합을 금지했다. 19세기의 비판자들은 그가 오스트리아와 중부 유럽이 「정상적인 자유주의·입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보았다. 1 2 3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 안에서도 처지가 달랐다. 1222년 금인칙서 이래의 오래된 헌정이 왕권을 제한했고, 왕은 대관식에서 헌정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야 했으며, 자치권이 강한 주(州) 의회는 「위헌적」 왕명을 거부할 권리를 지녔다. 1526년부터 1851년까지 헝가리는 별도의 관세 국경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귀족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농민은 영주에게 부역과 공납을 바치는 봉건적 예속 아래 있었다. 1825년 의회가 다시 소집되면서 「개혁 시대」가 열렸다.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은 영국식 근대화를 설파했고, 1830년대 중반부터는 언론인 코슈트 러요시가 의회 보고 서신으로 이름을 얻었다. 코슈트는 1837년 5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의회가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 법안 처리를 거부하자 1840년 풀려났다. 4 5
1841년 코슈트가 주필을 맡은 『페슈티 히를러프』는 헝가리 최초의 정치 신문으로, 의회 민주주의의 확대, 급속한 산업화, 보편 과세, 농노제와 귀족 특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동시에 「크로아티아인·루마니아인·작센인을 서둘러 마자르화하자」고 쓰고 헝가리어를 공적 생활의 유일한 언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태도는 뒤에 비헝가리 민족들과의 충돌로 되돌아왔다. 1844년 의회는 라틴어를 밀어내고 헝가리어를 행정·입법·교육의 공용어로 정했다. 1847년 3월 15일 페슈트에서 개혁파의 여러 갈래를 하나로 묶은 「야당(엘렌제키 파르트)」이 창립되었고, 버차니 러요시 백작이 당 의장으로, 코슈트가 강령의 기초자로 나섰다. 데아크 페렌츠가 최종 문안을 다듬은 「야당 선언」은 그해 6월 채택되었고, 이 강령에서 나온 「12개조」가 이듬해 4월 법의 원칙이 되었다. 1847년 가을 코슈트는 버차니의 지원으로 페슈트 주 대표로 의회에 들어갔다. 5 4 6 7

1848년 3월: 빈의 봉기와 페슈트의 무혈 혁명
1845년부터 유럽을 휩쓴 감자 역병과 1845~1847년의 경제 공황은 식량 가격을 끌어올렸고, 1846년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에서는 폴란드 귀족의 봉기에 맞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귀족을 학살했다. 1848년 2월 말 파리에서 루이 필리프가 퇴위했다는 소식은 3월 1일 헝가리 의회가 열리던 포조니(오늘날 브라티슬라바)에 닿았다. 3월 3일 코슈트는 하원에서 헝가리에 책임 내각을, 오스트리아의 나머지 지역에 입헌 정부를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이 연설은 빈의 거리에서 군중 앞에 낭독되었다. 3 4 5
빈에서는 3월 13일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회 앞에 모인 학생과 시민이 메테르니히의 퇴진을 요구했다. 군대가 거리에 나왔고 오후에 적대적으로 변한 군중에게 한 부대가 발포해 5명이 죽자, 자유주의자들에 빈민까지 가세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학생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정부를 지지하는 「대학군단」을 꾸리겠다고 제안했고, 루트비히 대공은 메테르니히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메테르니히는 그날 밤 사임하고 변장한 채 빈을 떠나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빈 시민들은 그의 퇴진에 환호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명목상 자유주의적인 장관들을 앉혔고, 11월까지 다섯 명의 총리가 차례로 바뀌었다. 1 3 8
빈의 소식은 3월 14일 페슈트에 닿았다. 필바크스 커피하우스에 모이던 「3월 청년들」은 19일로 잡았던 집회를 15일로 앞당겼다. 3월 15일 아침 페퇴피 샨도르는 요커이 모르, 버시바리 팔 등과 함께 대학을 돌며 그 전날 밤 쓴 시 「민족의 노래」를 낭송했고, 요커이는 「헝가리 민족이 원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12개조를 읽었다. 언론 자유, 부더페슈트의 독립된 책임 정부, 해마다 열리는 의회, 법 앞의 시민적·종교적 평등, 국민군, 평등 과세, 부역 폐지, 배심제, 국립은행, 헌법에 대한 군대의 서약과 외국 군대 철수, 정치범 석방, 트란실바니아와의 통합이 그 내용이었다. 군중은 란데레르 인쇄소에서 검열 없이 두 문서를 찍어 냈고, 오후 3시 국립박물관 앞 집회를 거쳐 부더의 총독부 위원회로 건너가 12개조에 서명을 받아 냈으며 정치범 탄치치 미하이를 풀어 주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이날 3월 15일은 오늘날 헝가리의 세 국경일 가운데 하나다. 4 9 10 11

4월 법과 버차니 정부, 농노 해방
3월 17일 황제 페르디난트(헝가리 왕으로는 페르디난트 5세)는 헝가리 최초의 책임 내각을 승인했다. 총리 버차니 러요시는 3월 23일 내각을 의회에 소개했고, 코슈트는 재무장관, 세체니와 데아크도 장관이 되었다. 코슈트를 빼면 모두 세체니의 온건 노선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포조니 의회가 3월에 통과시킨 개혁 법안들은 4월 11일(10일이라는 자료도 있다) 대주교 궁에서 왕의 재가를 받아 「4월 법」이 되었다. 4월 법은 헝가리 귀족의 모든 특권을 없앴고, 의회에 책임지는 정부, 국민위병, 국가 예산과 대외 정책에 대한 헝가리의 통제, 농노제 폐지를 정했다. 헝가리는 사실상 팔라틴을 매개로만 오스트리아와 묶인 독립국이 되었다. 4 12 7
새 선거법(1848년 제5조)은 옛 신분제 의회를 대의제 의회로 바꾸었다. 헝가리는 프랑스(1791)와 벨기에(1831)에 이어 유럽 대륙에서 세 번째로 민주적 의회 선거법을 만든 나라였고, 영어판 위키백과는 이 법의 선거권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었다고 적는다. 6월에 치른 첫 총선에서는 개혁 세력이 이겼다. 의회가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3월 18일 발표된 농노제 폐지였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는 여전히 귀족이었다. 페퇴피는 페슈트의 열기가 식고 혁명이 귀족 정치인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의회의 목표와 방법을 비판했고, 고향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의 동지 탄치치는 새 정부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7 3 4 10
빈 쪽에서도 농촌의 봉건 질서가 무너졌다. 갈리치아에서는 1848년 4월 17일, 부코비나에서는 7월 1일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헝가리를 뺀 오스트리아 쪽 지역의 대표 383명으로 구성되어 7월 22일 처음 열린 제국의회(라이히스타크)에서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출신의 스물다섯 살이 채 안 된 농민의 아들 한스 쿠들리히가 7월 26일 「지금부터 신민 관계는 그에 딸린 모든 권리·의무와 함께 폐지된다」는 동의안을 냈다. 9월 7일 황제의 칙허장이 이 결정을 공포했지만, 농민은 해방의 대가로 보상금 부담(그룬트엔틀라스퉁)을 떠안아야 했다. 제국의회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남긴 채 10월 크렘지어(크로메르지시)로 옮겼다가 1849년 3월 7일 강제 해산되었다. 3 13 14 15




프라하 슬라브 회의와 비헝가리 민족들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루테니아인, 슬로베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세르비아인이 함께 사는 나라였고, 혁명 속에서 이들 모두가 자치나 독립, 또는 다른 민족에 대한 우위를 꾀했다. 보헤미아에서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하자고 했지만,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체코인으로서 독일의 일에 관심이 없다며 4월 「프랑크푸르트에 보내는 편지」로 예비의회 참석을 거절했다. 그는 남독일과 슬라브 국가들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강한 오스트리아를 원했고, 이 노선은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로 불렸다. 3 16 17
6월 2일부터 프라하에서 열린 슬라브 회의는 거의 모든 슬라브 민족의 대표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회의였다. 팔라츠키가 의장을 맡았고, 폴란드·루테니아, 남슬라브, 체코·슬로바키아의 세 분과로 나뉘었으며, 바쿠닌도 대표로 참석했다. 6월 10일 무렵 채택된 「유럽 민족들에게 보내는 선언」은 슬라브인 억압의 종식과 크기·힘에 관계없는 모든 민족의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6월 12일 성령강림절 미사 뒤 행진하던 군중을 군대가 첼레트나 거리에서 막으면서 학생과 급진 민주파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첫날 빈디슈그레츠 장군의 아내가 창가에서 유탄에 맞아 죽었고, 빈디슈그레츠는 14~15일 밤 군대를 블타바강 왼쪽으로 물려 구시가지를 포격했다. 17일 반란군이 항복할 때까지 봉기 측 43명이 죽고 63명이 다쳤으며 군 측 사상자는 사망 14명, 부상 71명이었다. 계엄령이 내려졌고 국민위원회는 해산되었으며 슬라브 회의 대표들은 돌려보내졌다.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반혁명의 첫 승리였다. 18 17 19 3
헝가리 안에서도 마자르인은 중부 지역에서만 다수였다. 크로아티아 의회(사보르)는 3월 22일 요시프 옐라치치를 반(태수)으로 뽑았고, 옐라치치는 4월 19일 크로아티아 지역의 통합과 헝가리로부터의 분리를 선포했다. 세르비아인은 5월 13~15일 스렘스키카를로브치의 「5월 의회」에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를 선포했고, 코슈트가 「자기 정부와 국가를 가진 민족만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세르비아인을 별개의 민족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6월부터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트란실바니아에서는 4~5월 블라지(벌라주펄버)의 집회에 4만 명이 넘는 루마니아인이 모여 헝가리와의 통합에 반대했지만, 5월 29일(30일이라는 자료도 있다) 콜로즈바르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통합을 비준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4월 「슬로바키아 민족의 요구」가 나왔고, 9월부터 슈투르 류도비트 등이 이끄는 슬로바키아 의용군이 헝가리 정부에 맞섰으나 모은 병력은 2,000명 정도였고 더 많은 슬로바키아인이 혼베드에서 싸웠다. 빈의 궁정은 이들 민족 운동에 상충하는 약속을 내걸며 헝가리 정부와 맞세웠다. 4 20 21 22 3


옐라치치의 침입, 파코즈드, 빈 10월 봉기
여름 내내 헝가리 정부는 옐라치치에 맞서 궁정의 지지를 얻으려고 북이탈리아에 병력을 보내겠다고까지 제안했지만, 8월 말 빈의 제국 정부는 헝가리 군대 창설 계획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8월 29일 버차니와 데아크가 빈에 가서 옐라치치를 멈춰 달라고 청했으나, 9월 11일 옐라치치는 드라바강을 건너 헝가리에 쳐들어왔다. 병력은 영어판 위키백과가 5만 명, 헝가리어판이 3만 5천 명으로 적는다. 버차니 내각은 코슈트·세메레·메사로시를 빼고 물러났다가 다시 꾸려졌고, 팔라틴 이슈트반 대공은 황제의 명령으로 헝가리를 떠났다. 코슈트는 마을과 도시를 돌며 의용병을 모았고, 혼베드는 그의 작품이었다. 9월 28일 헝가리 전군 지휘권을 받은 람베르크 백작이 페슈트에서 군중에게 살해되었다(27일이라는 자료도 있다). 12 4 23 22
9월 29일 모거 야노시 장군이 이끄는 헝가리군은 세케슈페헤르바르 근처 파코즈드에서 옐라치치를 막아 냈다. 옐라치치는 사흘 휴전을 청한 뒤 오스트리아 국경 쪽으로 물러났고, 10월 7일에는 괴르게이 아르투르와 페르첼 모르 대령이 이끄는 부대가 오조러에서 9,000명의 크로아티아 군단을 항복시켰다. 파코즈드는 헝가리 군대의 상징이 되었다. 같은 무렵 의회는 국방위원회(OHB)를 세웠고, 코슈트가 위원장이 되어 9월 말부터 사실상의 정부를 이끌었다. 10월 2일 버차니는 황제와의 평화적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리와 의원직을 모두 내놓았다. 10월 3일 황제의 선언 뒤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의 아라드·테메시바르 요새는 제국 편으로 돌아섰다. 4 20 24 12
10월 6일 빈에서는 헝가리 진압에 나서려던 부대의 출발을 노동자·학생·반란 병사들이 막으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피가 흘렀고 전쟁장관 라투르 백작이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으며, 황제와 궁정은 이튿날 올뮈츠(올로모우츠)로 달아났다. 빈디슈그레츠와 옐라치치가 이끈 약 7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크로아티아군이 10월 26일 포격을 시작했다. 헝가리 지휘관들은 국경을 넘기를 망설이다 코슈트의 압박으로 진격했으나, 10월 30일 슈베하트에서 패했다. 이튿날 제국군이 도심을 휩쓸었다. 방어를 지휘한 폴란드 장군 유제프 벰은 탈출해 헝가리로 갔지만, 메센하우저, 언론인 베허, 옐리네크, 그리고 의원 면책특권을 내세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급진파 의원 로베르트 블룸은 처형되었다. 양측 사상자는 모두 약 2,000명이었다. 엥겔스는 이 패배가 「역사 없는」 슬라브 민족들의 반혁명 지원 탓이라고 보았고, 그의 「신라인 신문」 논설은 여기서 출발했다. 8 4 25 26 27


프란츠 요제프의 즉위와 겨울 전역
빈을 되찾은 뒤 페르디난트 1세는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 공을 정부 수반으로 앉혔고, 슈바르첸베르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페르디난트를 설득해 퇴위시켰다. 1848년 12월 2일 올뮈츠에서 열여덟 살의 조카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했다. 헝가리 쪽 자료는 이 교체의 목적을 분명히 적는다. 4월 법에 서명한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공격을 명령할 수 없었지만, 서명하지 않은 프란츠 요제프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새 황제는 3월의 양보를 모두 거두고 코슈트와 헝가리 정부를 법 밖에 두었다. 헝가리 의회는 12월 7일 의회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헝가리 왕좌에 앉을 수 없다며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헌정상 페르디난트가 여전히 합법적인 왕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1867년에야 헝가리 왕으로 대관했다. 3 28 29 5 4
12월 14일 빈디슈그레츠가 이끄는 주력군이 헝가리 국경을 넘었다. 세르비아·트란실바니아·크로아티아 병력까지 합친 제국 측은 15만 명 가까이, 헝가리 쪽은 10만 명 남짓이었다. 제국군은 포조니와 죄르를 별 저항 없이 차지했고 12월 30일 모르에서 페르첼을 무찔렀다. 코슈트는 미국 공사 스타일스에게 중재를 부탁했지만 빈디슈그레츠는 모든 조건을 거부했다. 정부와 의회는 새로 놓인 페슈트~솔노크 철도를 이용해 데브레첸으로 옮겼고, 코슈트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가지고 갔다. 제국군은 1849년 1월 5일 페슈트에 들어왔다(싸움 없이 넘겨준 날을 1월 4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의회의 데브레첸 이전에 반대하고 빈디슈그레츠에게 보낸 대표단에 참여했던 버차니는 1월 8일 페슈트에서 체포되었다. 괴르게이는 북부 산악 지대로 물러나며 제국군 주력을 끌어당겼고, 2월 5일 브러니스코 고개를 돌파했다. 4 29 19 12
트란실바니아에서는 10월 18일 푸흐너 장군이 공공연히 헝가리 정부에 맞섰고, 루마니아인 봉기군과 함께 헝가리 민병대를 무너뜨렸다. 이 땅의 내전은 양쪽 민간인에게 참혹했다. 헝가리 역사가 에제드 아코시는 1848~1849년 트란실바니아에서 1만 4천~1만 5천 명이 학살되었다고 추산하며, 희생자는 헝가리인 7,500~8,500명, 루마니아인 4,400~6,000명, 작센인·아르메니아인·유대인 등 약 500명이다. 당시 「비너 차이퉁」에 실린 공식 목록은 헝가리 군사 법정이 재판 없이 처형한 사람을 4,834명(그 가운데 루마니아인 4,425명)으로 적는다. 12월 지휘를 맡은 벰은 1만 2,500명으로 북부를 되찾았다. 1849년 1월 말에는 러시아군 7,000명이 들어와 브라쇼와 너지세벤에 주둔했고, 벰은 2월 4일 비저크너에서 크게 졌으나 2월 9일 피슈키 다리에서 이겼으며 3월 11일 너지세벤을 점령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을 트란실바니아에서 몰아냈다. 4 30 25 31
코슈트가 1월 29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폴란드 장군 헨리크 뎀빈스키는 2월 26~27일 카폴너에서 졌다. 빈디슈그레츠는 이 승리를 부풀려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황제에게 보고했고, 슈바르첸베르크 정부는 1849년 3월 4일 헝가리를 중앙집권 제국에 편입하는 「3월 헌법(올뮈츠 헌법)」을 흠정했다. 사흘 뒤 크렘지어 제국의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헝가리는 다섯 개의 군관구로 쪼개질 처지가 되었다. 헝가리 쪽에서 이것은 헝가리 의회가 대표를 보낸 적 없는 제국 기구가 천 년 헌정을 폐지하려는 시도였다. 29 4 32 13
봄 공세와 데브레첸 독립 선언
3월 말 괴르게이가 임시 총사령관이 되면서 혼베드는 공세로 돌아섰다. 1848년 12월 중순 이미 10만~11만 명으로 불어난 혁명군의 사병 약 40%는 헝가리 안의 비헝가리 민족 출신이었고, 장교와 장군의 절반가량이 외국계였다. 4월 2일 허트반, 4일 타피오비치케, 6일 이서세그에서 괴르게이는 빈디슈그레츠를 직접 꺾었고, 10일 바츠, 19일 너지샬로에서 이긴 뒤 26일 코마롬 포위를 풀었다. 잇단 패배로 빈디슈그레츠는 해임되고 벨덴이 수도 철수를 명령했다. 봄 공세가 끝난 6월 14일 헝가리 정부가 장악한 땅은 9만 5천㎢에서 25만㎢로 넓어졌고, 크로아티아·스렘·트란실바니아 중부 산지와 몇몇 요새만 남았다. 4 33 19
승리의 분위기 속에서 코슈트는 4월 13일 비공개 회의에, 이튿날 공개 회의에 독립 선언을 내놓았고, 데브레첸 개혁파 대교회에서 이를 선포했다. 선언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는 그 위증의 규모에서 유례가 없다」며 「합스부르크 가는 왕좌를 잃었다」고 선포했다. 정부 형태는 결정하지 않은 채 코슈트가 섭정 대통령(총독)이 되었는데, 왕당파와 공화파를 모두 만족시키려는 타협이었다. 선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왕조 아래 자치만을 바라던 「평화당」과 장군들의 반발을 샀고, 괴르게이는 뒤에 이것이 러시아의 개입을 불렀다고 비난했다. 아라드 순교자 항목은 선언 날짜를 4월 19일로 적어 다른 자료와 어긋난다. 5월 2일 세메레 베르털란이 총리를 맡은 새 내각이 꾸려졌고, 괴르게이는 5월 7일 전쟁장관이 되었다. 34 5 4 35 36
혼베드 주력은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을 쫓는 대신 부더 성 공략에 몇 주를 묶였고, 영어판 위키백과는 여기에 코슈트의 역할이 컸다고 적는다. 5월 4일 시작된 포위는 강한 방어와 부족한 포병 탓에 늘어졌고, 5월 21일 마지막 총공격으로 수도를 되찾았다. 같은 날 프란츠 요제프는 바르샤바에서 니콜라이 1세와 러시아군 투입에 합의했다. 독립 헝가리는 비헝가리 민족과의 화해도 늦게나마 시도했다. 1849년 5월 데브레첸에서 코슈트는 왈라키아 혁명가 니콜라에 벌체스쿠와 만났고, 7월 28일 혁명 의회는 지방 행정과 학교에서 모국어 사용을 인정하는, 유럽 최초로 꼽히는 소수 민족 권리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러시아군이 들어온 뒤였고, 혁명이 진압되면서 폐기되었다. 4 5 23 22


러시아의 개입과 빌라고시 항복
1849년 봄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 직전에 몰렸다. 프란츠 요제프는 5월 1일 공식 서한으로 니콜라이 1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5월 21일 바르샤바에서 「신성 동맹」의 이름으로 러시아 차르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유럽의 헌병」으로 불린 니콜라이는 1848년 유럽 반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러시아 원정군의 규모는 자료마다 다르다. 영어판 위키백과의 헝가리 혁명 항목은 20만 명에 보조 병력 8만 명, 여름 전역 항목은 약 19만 3천 명과 대포 584문에 더해 갈리치아의 6만 명과 왈라키아의 1만 5천 명이 대기했다고 적고, 헝가리어판은 「20만 명 가까이」라고 적는다. 지휘관은 1831년 바르샤바를 함락시킨 이반 파스케비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율리우스 야코프 폰 하이나우가 18만 명과 대포 605문을 이끌었고, 루마니아인 민병 7만 명이 이들을 도왔다. 동맹군은 모두 38만 명, 헝가리군은 16만 명이었다. 4 29 23 37 38
6월 중순 러시아군이 여러 갈래로 국경을 넘었다. 서쪽에서는 하이나우가 6월 28일 죄르에서 푈텐베르크를 꺾었고, 괴르게이는 7월 2일 코마롬에서 하이나우를 막았으나 부상으로 7월 11일의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독립 선언과 작전 방향을 두고 코슈트와 괴르게이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고, 정부는 그에게 알리지 않은 채 세게드 집결을 명령했다. 괴르게이는 동쪽으로 돌아 7월 15~17일 바츠에서 파스케비치와 맞붙은 뒤 러시아군의 뒤를 돌아 8월 9일 아라드에 닿았다. 트란실바니아에서는 7월 31일 세게시바르에서 벰의 군대가 뤼더스의 러시아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페퇴피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에는 포로 약 1,800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가 바르구진에서 죽었다는 설도 나왔다. 4 29 10 25
8월 5일 하이나우는 티서강을 건너 쇠레그에서 뎀빈스키를 꺾었고, 8월 9일 테메시바르에서 벰이 지휘한 헝가리 남부군이 무너졌다. 8월 11일 코슈트는 괴르게이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며 그에게 전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3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을 거느린 괴르게이는 전쟁 회의를 거쳐 8월 13일 빌라고시(오늘날 루마니아의 시리아)에서 러시아의 뤼디거 장군에게 항복했다. 그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러시아에게 졌음을 보이려 했지만, 러시아는 포로를 오스트리아에 넘겼다. 코슈트는 8월 17일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남은 부대와 요새는 차례로 항복했고, 클러프커 죄르지가 지킨 코마롬 요새는 10월 2일에야 항복했다. 4 39 5 23


하이나우의 보복과 아라드 13인 순교자
항복 뒤 하이나우가 전권 위원으로 헝가리를 맡았다. 러시아 황제가 관용을 청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군인과 민간인 수백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더 많은 사람을 가두었으며 포로들을 오스트리아군에 강제로 편입했다. 1849년 10월 6일 아라드에서 헝가리군 장군 12명과 대령 1명이 처형되었다. 「아라드 13인 순교자」의 다수는 헝가리계가 아니었다. 덤여니치 야노시는 세르비아계였고, 함께 아라드에서 처형된 흐루비 남작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이었다. 같은 날 페슈트에서는 첫 총리 버차니 러요시가 총살되었다. 그는 몰래 들여온 칼로 자살을 기도해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받았고, 「조국 만세!」를 외치며 쓰러졌다. 10월 10일에는 장관 처니 라슬로, 24일에는 상원 부의장 페레니 지그몬드가 처형되었다. 39 36 12 23
괴르게이는 러시아의 요청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1867년까지 클라겐푸르트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코슈트가 비딘에서 쓴 편지가 그를 「헝가리의 유다」로 낙인찍어 오랫동안 반역자라는 오명을 썼다. 20세기 연구는 이 평가를 뒤집었다. 코슈트는 오스만 제국의 퀴타히아에 머물다 1851년 미국 의회의 초청으로 영국과 미국을 돌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뒤에 런던을 찾은 하이나우는 맥주 공장 짐꾼들에게 쫓기며 「오스트리아 백정을 타도하라!」는 외침을 들었다. 빌라고시에서 거둔 혁명군의 깃발은 러시아로 넘어가 보관되었고, 소련은 1940년 이 깃발을 호르티 정부에 넘기는 대신 투옥된 공산당 지도자 라코시 마차시를 돌려받았다. 35 36 5 40 4
헝가리는 계엄령 아래 놓였다. 슈바르첸베르크는 헝가리 의회를 해산하고 자유주의 운동에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헌법을 강요했으며, 1852년 그가 죽은 뒤 내무장관 알렉산더 폰 바흐가 「신절대주의」를 이끌었다. 아돌프 피쇼프는 바흐 체제의 기둥을 「서 있는 군대(병사), 앉아 있는 군대(관리), 무릎 꿇은 군대(성직자), 기어 다니는 군대(밀정)」라는 네 군대로 불렀다. 1851년부터 1860년까지 알브레히트 대공이 총독으로 독일화를 밀어붙였고, 헝가리에서는 전국적인 「소극적 저항」이 이어졌다. 그러나 1848년의 농노 해방은 되돌려지지 않았고, 신절대주의 아래에서 내부 관세가 폐지되고 농민의 봉건적 의무가 정리되었다. 3 41 4



평가: 엥겔스의 「헝가리 투쟁」과 민족 문제, 1867년과 1956년
마르크스가 1848년 6월 1일부터 1849년 5월 19일까지 쾰른에서 펴낸 「신라인 신문」은 헝가리 혁명을 유럽 혁명의 최전선으로 보았다. 엥겔스가 훗날 회고한 이 신문의 대외 강령은 「모든 혁명적 인민을 지지하고 유럽 반동의 거대한 보루인 러시아에 맞선 혁명적 유럽의 전면전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1849년 이 신문에 실은 「헝가리 투쟁」에서 「1793년 이래 처음으로, 우세한 반혁명 세력에 둘러싸인 한 민족이 백색 테러에 적색 테러로 맞선다」고 쓰고, 코슈트를 「자기 민족을 위해 당통과 카르노를 한 몸에 지닌」 진정한 혁명적 인물로 불렀다. 같은 글에서 그는 남슬라브인을 비롯해 강한 이웃에게 밀려난 옛 민족의 잔재로 여긴 작은 민족들을 반혁명의 「광신적 기수」가 될 「민족 찌꺼기(Völkerabfälle)」라 부르고, 다음 세계 전쟁이 반동적 계급과 왕조뿐 아니라 「반동적 인민 전체」를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며 「그것 또한 진보」라고 썼다. 42 5 26
이 대목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카를 카우츠키는 1915년, 1848~1849년 이후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의 남슬라브인이 스스로를 바꾸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실천으로 반박했다고 썼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로만 로스돌스키는 1929년 빈 대학 박사 논문을 1948년 고쳐 1964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역사 없는」 민족들의 문제』로 펴냈다(영어판 『엥겔스와 「비역사적」 민족들』). 그는 「역사 없는 민족」 개념이 헤겔에게서 빌려 온 것이며, 엥겔스가 독일계 오스트리아 시민과 폴란드·헝가리 귀족·지주에게 억압받던 슬라브 농민 대중의 계급 모순을 놓쳤다고 비판했다. 로스돌스키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늦어도 1867년부터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받는 민족을 구별하며 1849년의 입장을 고쳐 나갔고, 레닌은 남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원칙 위에 민족 자결의 정치를 세웠다. 한편 반공주의 문학사가 조지 왓슨은 「민족 찌꺼기」를 「인종 쓰레기」로 옮겨 히틀러가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까지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라는 반론을 받았다. 26 27
나라마다 기억도 다르다. 헝가리에서 1848~1849년은 근대 민족 정체성의 주춧돌이며, 3월 15일은 국경일, 10월 6일은 애도의 날이다. 크로아티아에서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를 헝가리에서 떼어 내고 농노제를 폐지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루마니아에서 아브람 이앙쿠는 농민을 이끈 「산의 왕자」이고, 루마니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벌체스쿠와 코슈트의 접촉을 기렸다. 트란실바니아 학살의 수치를 두고도 헝가리 쪽 추산과 1850년 합스부르크 궁정의 조사가 서로를 불신한다. 코슈트 자신은 망명 뒤 소수 민족과 맞선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고 여기고 「도나우 연방」을 구상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은 4월 법을 제9조·제10조를 뺀 채 되살렸지만, 코슈트는 「카산드라 편지」로 타협을 규탄했다.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시위는 벰 장군 동상 앞에서 시작되었고, 그 혁명은 다시 러시아, 곧 소련의 군대에 진압되었다. 4 36 20 22 30 5 43 25 44
결과
하이나우는 1849년 10월 6일 아라드에서 장군 13명을, 같은 날 페슈트에서 첫 총리 버차니를 처형했고, 헝가리는 계엄령과 바흐의 신절대주의 아래 놓였다. 코슈트와 벰은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괴르게이는 클라겐푸르트에 연금되었다. 그러나 농노 해방은 되돌려지지 않았고,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은 4월 법의 대부분을 되살렸다. 3월 15일은 헝가리의 국경일, 10월 6일은 애도의 날이 되었으며, 엥겔스가 「신라인 신문」에서 헝가리를 칭송하고 반혁명 편 슬라브 민족들을 「민족 찌꺼기」라 부른 논설은 로스돌스키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 민족 문제 논쟁의 출발점으로 남았다.
연표와 지도
1848.09.29 헝가리 정부 관할과 옐라치치의 진입, 파코즈드
- 합스부르크 제국과 그 편의 크로아티아·세르비아·루마니아 세력
- 헝가리 혁명정부와 혼베드
- 러시아 개입군
- 합스부르크 군주국 밖 (도나우 공국·세르비아 공국·러시아 제국)
경계는 근사치이며, 영어판 위키백과의 헝가리 혁명·겨울 전역·봄 공세·여름 전역·빌라고시 항복 항목의 작전 기록을 바탕으로 손으로 그렸습니다. 1848년의 헝가리 왕국(트란실바니아 포함)은 현대 국경과 달라 카르파티아산맥·드라바강·도나우강·라이타강을 따라 따로 그렸습니다. 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 봉기 지역과 요새는 대략적인 범위만 표시했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와 군정 국경 지대는 제국 쪽으로 칠했습니다. 지도 출처: ; ; ; ;
- 11848-03-03코슈트의 책임 내각 연설
파리 혁명 소식이 닿은 뒤 코슈트가 포조니 의회에서 헝가리 책임 내각과 오스트리아 입헌 정부를 요구했다.
- 21848-03-13빈 봉기와 메테르니히 사임
군대의 발포로 5명이 죽은 뒤 메테르니히가 사임하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 31848-03-15페슈트의 무혈 혁명
페퇴피가 「민족의 노래」를 낭송하고 12개조가 검열 없이 인쇄되었으며, 총독부 위원회가 12개조에 서명했다.
- 41848-03-17버차니 내각 승인
황제가 헝가리 최초의 책임 내각을 승인했다.
- 51848-04-114월 법 재가
페르디난트 5세가 포조니 대주교 궁에서 귀족 특권 폐지·책임 정부·농노제 폐지를 담은 4월 법에 서명했다.
- 61848-05-13세르비아인 5월 의회
스렘스키카를로브치에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선포되었다.
- 71848-06-02프라하 슬라브 회의 개막
팔라츠키를 의장으로 슬라브 민족 대표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 81848-06-12프라하 성령강림절 봉기
빈디슈그레츠가 구시가지를 포격해 17일 봉기를 진압했다. 봉기 측 43명이 죽었다.
- 1848-09-07오스트리아 농노 해방
쿠들리히의 동의를 받아들인 제국의회의 결정을 황제 칙허장이 공포했다.
- 1848-09-11옐라치치의 헝가리 침입
크로아티아 반 옐라치치가 드라바강을 건너 헝가리 정부를 치러 들어왔다.
- 91848-09-29파코즈드 전투
헝가리군이 옐라치치를 막아 냈고, 옐라치치는 휴전을 청한 뒤 물러났다.
- 101848-10-06빈 10월 봉기
헝가리로 가는 부대를 막은 군중이 전쟁장관 라투르를 죽였고, 황제는 올뮈츠로 달아났다.
- 111848-10-30슈베하트 전투
빈을 구하러 간 헝가리군이 패했고, 이튿날 빈이 함락되었다.
- 121848-12-02프란츠 요제프 즉위
올뮈츠에서 페르디난트가 퇴위하고 열여덟 살의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했다. 헝가리 의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 131849-01-05페슈트 함락과 데브레첸 이전
빈디슈그레츠가 페슈트에 들어왔고, 정부와 의회는 데브레첸으로 옮겼다.
- 141849-02-26카폴너 전투
뎀빈스키가 빈디슈그레츠에게 졌고, 빈은 반란이 끝났다고 오판했다.
- 1849-03-043월 헌법 흠정
슈바르첸베르크 정부가 헝가리를 중앙집권 제국에 편입하는 헌법을 흠정했고, 7일 크렘지어 제국의회를 해산했다.
- 151849-03-11벰의 너지세벤 점령
벰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을 트란실바니아에서 몰아냈다.
- 161849-04-06이서세그 전투
괴르게이가 빈디슈그레츠를 직접 꺾어 봄 공세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 171849-04-14데브레첸 독립 선언
의회가 합스부르크 가의 폐위와 헝가리 독립을 선언하고 코슈트를 섭정 대통령으로 뽑았다.
- 181849-05-21부더 탈환과 바르샤바 합의
혼베드가 부더 성을 되찾은 날, 프란츠 요제프와 니콜라이 1세가 바르샤바에서 러시아군 투입에 합의했다.
- 1849-06러시아군의 침입
파스케비치가 이끄는 약 19만~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여러 갈래로 헝가리에 들어왔다.
- 1849-07-28소수 민족 권리법
혁명 의회가 지방 행정과 학교에서 모국어 사용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 191849-07-31세게시바르 전투
뤼더스의 러시아군이 벰의 군대를 섬멸했고, 페퇴피가 이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 201849-08-09테메시바르 전투
하이나우가 벰이 지휘한 헝가리 남부군을 무너뜨렸다.
- 211849-08-11코슈트의 사임
코슈트가 아라드에서 괴르게이에게 전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 221849-08-13빌라고시 항복
괴르게이가 3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러시아의 뤼디거 장군에게 항복했다.
- 231849-10-02코마롬 항복
클러프커가 지킨 마지막 요새 코마롬이 하이나우에게 항복했다.
- 241849-10-06아라드 13인 순교자와 버차니 처형
아라드에서 장군 12명과 대령 1명이 처형되었고, 페슈트에서 버차니가 총살되었다.
원문
쾰른, 1월. 이탈리아에서 지난여름과 가을의 반혁명에 맞서는 첫 반격이 벌써 시작되는 동안, 헝가리의 평원에서는 2월 혁명에서 곧바로 생겨난 운동에 대한 마지막 진압전이 마무리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새 운동은 1849년 운동의 서막이고, 마자르인에 대한 전쟁은 1848년 운동의 후일담이다. 이 후일담은 아마 조용히 준비되고 있는 새 드라마 속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후일담도 48년 혁명 비극의 빠르게 이어진 첫 장면들, 곧 파리와 빈의 함락만큼이나 영웅적이며, 6월과 10월 사이의 때로는 맥 빠지고 때로는 좀스러운 막간극들 뒤에 보니 반갑게 영웅적이다. 1848년의 마지막 막은 테러리즘을 통해 1849년의 첫 막으로 넘어간다.
1848년의 혁명 운동에서 처음으로, 1793년 이후 처음으로, 반혁명의 압도적인 힘에 둘러싸인 한 민족이 비겁한 반혁명의 광포함에 혁명의 열정을, 백색 테러(terreur blanche)에 적색 테러(terreur rouge)를 감히 맞세운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참으로 혁명적인 인물, 제 민족의 이름으로 절망적인 싸움의 도전장을 감히 집어 드는 사람, 제 민족에게 당통과 카르노를 한 몸에 지닌 사람을 본다 — 코슈트 러요시다.
적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온 오스트리아가, 맨 앞에는 광신에 사로잡힌 슬라브인 1600만이, 마자르인 400만에 맞서 있다.
총궐기, 국민적 무기 제조, 아시냐 지폐[1], 혁명 운동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즉결 처분하는 것, 영속하는 혁명, 한마디로 영광스러운 1793년의 주요한 특징이 모두 코슈트가 무장시키고 조직하고 열광시킨 헝가리에서 되살아난다. 망하지 않으려면 말하자면 24시간 안에 갖추어야 하는 이 혁명적 조직이 빈에는 없었다. 그것이 있었다면 빈디슈그레츠는 결코 빈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혁명적 조직이 있는데도 그가 헝가리에 들어가는지 지켜보자.
싸움과 싸우는 당사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오스트리아 왕정은 프랑스 왕들이 루이 11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해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독일을 하나의 왕정으로 통일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다. 그 시도는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의 비참한 지방적 편협함과, 그에 걸맞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좀스러운 장사치 정신 때문에 실패했다.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전체 대신 남독일 땅 가운데 흩어진 슬라브 부족들과 직접 싸우고 있던 곳, 또는 독일인 봉건 귀족과 독일인 시민층이 힘을 합쳐 예속된 슬라브 부족들을 지배하던 곳만을 얻었다. 어느 경우든 각 지방의 독일인에게는 밖에서 오는 지원이 필요했다. 그 지원은 슬라브인에 맞선 결합으로 주어졌고, 그 결합은 해당 지방들이 합스부르크의 왕홀 아래 통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렇게 독일계 오스트리아가 생겨났다. 오스트리아 왕정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다시 갈라졌다가 또다시 이루어졌는지, 그 모든 것이 슬라브인과 싸우는 가운데 일어났음을 아무 개설서나 펼쳐 읽어 보기만 하면 이 서술이 얼마나 옳은지 알 수 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것이 헝가리다. 헝가리에서 마자르인은 독일계 오스트리아의 독일인과 똑같은 싸움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에서 슬라브 야만인들 사이로 박혀 들어간 독일의 쐐기는, 라이타강 가에서 마찬가지로 슬라브 야만인들 사이로 박혀 들어간 마자르의 쐐기와 손을 잡았다. 남쪽과 북쪽에서, 곧 보헤미아, 모라비아, 케른텐, 크라인에서 독일 귀족이 슬라브 부족들을 지배하고 독일화하여 그로써 유럽의 운동 속으로 끌어들였듯이, 남쪽과 북쪽에서, 곧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카르파티아 지방에서는 마자르 귀족이 역시 슬라브 부족들을 지배했다. 양쪽의 이해는 같았고, 양쪽의 적수들은 자연스러운 동맹자였다. 마자르인과 오스트리아 독일인의 동맹은 필연이었다. 이 동맹을 풀 수 없게 만들 큰 사건 하나, 두 쪽 모두에 대한 거센 공격 하나만이 아직 모자랐다. 그 사건은 튀르크인이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면서 찾아왔다. 튀르크인은 헝가리를, 그다음으로는 빈을 위협했고, 헝가리는 수백 년 동안 풀 수 없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둘의 공동의 적은 차츰 약해졌다. 튀르크 제국은 무력해졌고, 슬라브인은 마자르인과 독일인에 맞서 일어설 힘을 잃었다. 아니, 슬라브 땅을 지배하던 독일과 마자르 귀족의 일부는 슬라브 민족성을 받아들였고, 그로써 슬라브 민족들 자신이, 귀족을 보호해야 하는, 그것도 점점 더 성장해 오는 독일인과 마자르인 시민층에 맞서 보호해야 하는 왕정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민족적 대립은 사라졌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른 정책을 취했다. 독일 속물 시민층의 어깨를 딛고 독일 황제의 자리에 뛰어오른 바로 그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른 어떤 왕조보다도 단호하게 시민층에 맞서는 봉건 귀족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런 뜻에서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분할에 가담했다. 갈리치아의 대(大)스타로스타와 보이보다들, 포토츠키가, 루보미르스키가, 차르토리스키가 사람들은 폴란드를 오스트리아에 팔아넘겼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장 충실한 기둥이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그 대가로 하급 귀족과 시민층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의 소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도시의 시민층은 점점 더 많은 부와 영향력을 얻었고, 공업과 함께 발전하는 농업은 농민에게 지주에 대해 달라진 지위를 주었다. 귀족에 맞선 시민과 농민의 운동은 갈수록 위협적이 되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민족적·지방적 편협함의 담지자인 농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지방적이고 민족적인 것이므로, 그와 함께 옛 민족 투쟁들도 다시 떠올랐다.
이런 형세에서 메테르니히는 그의 걸작을 만들어 냈다. 가장 강력한 봉건 대영주들을 빼고 나머지 귀족에게서는 국정에 대한 영향력을 모조리 빼앗았다. 부르주아지에게서는 가장 강력한 금융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빼앗았다 —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이 그를 그렇게 몰아붙였다. 이처럼 높은 봉건 세력과 높은 금융 세력, 그리고 관료제와 군대에 기대어, 그는 그의 경쟁자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절대 왕정의 이상을 이루었다. 각 민족의 시민과 농민은 그 민족의 귀족과 다른 모든 민족의 농민으로써, 각 민족의 귀족은 제 민족의 시민과 농민에 대한 두려움으로써 고삐를 죄었다. 갖가지 계급적 이해, 민족적 편협함, 지방적 편견은 아무리 얽히고설켰어도 서로를 완전히 견제하여, 늙은 사기꾼 메테르니히에게 더없이 자유로운 운신의 폭을 주었다. 그가 이렇게 민족들을 서로 부추겨 싸우게 하는 일에서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는 갈리치아의 학살 장면이 증명한다[2]. 거기서 메테르니히는 농민의 이익을 위해 시작된 민주주의적 폴란드 운동을, 종교적·민족적 광신에 사로잡힌 루테니아 농민들 자신을 써서 짓밟았다.
1848년은 지금까지 메테르니히를 통해 서로를 예속시키던 이 갖가지 부족들을 한순간 모두 풀어놓음으로써 우선 오스트리아에 더없이 끔찍한 혼란을 가져왔다. 독일인, 마자르인, 체코인, 폴란드인, 모라비아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루마니아인, 일리리아인, 세르비아인이 서로 충돌했고, 그와 동시에 이 민족들 하나하나 안에서는 개별 계급들도 서로 싸웠다. 그러나 이 뒤죽박죽 속에 곧 질서가 잡혔다. 다투는 자들은 두 개의 큰 진영으로 나뉘었다. 혁명의 편에는 독일인, 폴란드인, 마자르인이, 반혁명의 편에는 나머지, 곧 폴란드인을 뺀 모든 슬라브인과 루마니아인과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이 섰다.
민족에 따른 이 갈라짐은 어디서 오는가, 그 밑에는 어떤 사실들이 깔려 있는가?
이 갈라짐은 해당 부족들의 지금까지의 역사 전체와 들어맞는다. 그것은 이 크고 작은 모든 민족의 생사에 대한 판결의 시작이다.
오스트리아의 지난 역사 전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증명하고, 1848년이 그것을 확인했다. 오스트리아의 모든 민족과 꼬마 민족들 가운데 진보의 담지자였고, 능동적으로 역사에 개입했으며, 지금도 살아갈 힘을 지닌 것은 셋뿐이다 — 독일인, 폴란드인, 마자르인.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혁명적이다.
다른 모든 크고 작은 부족과 민족은 우선 혁명의 세계 폭풍 속에서 멸망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반혁명적이다.
폴란드인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의 폴란드 논쟁에 관한 우리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3]. 그들의 혁명 정신을 길들이려고 메테르니히는 일찍이 루테니아인에게 호소했다. 루테니아인은 조금 다른 방언과 무엇보다 그리스 정교라는 종교로 폴란드인과 구별되는 부족으로, 예로부터 폴란드에 속해 있었고 메테르니히를 통해 비로소 폴란드인이 자기들의 억압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옛 폴란드에서 루테니아인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인 자신도 억압받지 않았다는 듯이, 마치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서 메테르니히가 그들 공동의 억압자가 아니었다는 듯이!
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그들은 어차피 역사와 지리적 위치로 보아 본래의 오스트리아와는 너무나 떨어져 있어서, 나머지 민족들의 뒤죽박죽을 정리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제쳐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짚어 두자. 폴란드인이 지금 그들의 옛 적인 독일인, 마자르인과 동맹하여 범슬라브주의 반혁명에 맞서 나선다는 것은 그들의 큰 정치적 통찰과 참으로 혁명적인 정신을 드러낸다. 슬라브주의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는 슬라브 민족은 그것만으로 자신이 살아갈 힘을 지녔음을 증명하며, 그것만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장한다.
이제 본래의 오스트리아로 가자.
수데티산맥과 카르파티아산맥의 남쪽, 엘베강 상류 계곡과 도나우강 중류 지역에 걸친 오스트리아는 중세 초기에 오로지 슬라브인만 살던 땅이다. 이 슬라브인은 언어와 풍습으로 보아 터키의 슬라브인, 곧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불가리아인,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슬라브인과 같은 부족에 속하며,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에 대비하여 남슬라브인이라 불리는 부족에 속한다. 흑해에서 보헤미아 숲과 티롤 알프스에 이르는 이 거대한 지역에는 이 친족 슬라브 부족들 말고는, 발칸 남쪽에 드문드문 그리스인이, 도나우강 하류 지역에 흩어진, 로망스어를 쓰는 왈라키아인이 살았을 뿐이다.
이 빽빽한 슬라브 덩어리 사이로 서쪽에서는 독일인이, 동쪽에서는 마자르인이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독일 요소는 보헤미아의 서부를 정복했고, 도나우강 양쪽을 따라 라이타강 너머까지 밀고 들어갔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모라비아의 일부, 슈타이어마르크의 대부분이 독일화되었고, 그렇게 하여 체코인과 모라비아인을 케른텐인과 크라인인으로부터 갈라놓았다. 마찬가지로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 중부는 독일 국경까지 슬라브인이 말끔히 쓸려 나가고 마자르인이 차지했다. 마자르인은 여기서 슬로바키아인과 몇몇 루테니아 지역(북쪽)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라보니아인으로부터 갈라놓았고, 이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끝으로 튀르크인이 비잔티움인의 선례를 따라 도나우강과 사바강 남쪽의 슬라브인을 예속시켰고, 남슬라브인의 역사적 역할은 영영 끝나 버렸다.
남슬라브인이 독자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려 한 마지막 시도는 후스 전쟁이었다. 그것은 종교의 깃발을 든 체코 민족의 농민 전쟁으로, 독일 귀족과 독일 황제의 종주권에 맞선 것이었다. 그 시도는 실패했고, 체코인은 그 뒤로 줄곧 독일 제국에 끌려다니는 신세로 묶여 있었다.
반면 그들을 이긴 자들, 곧 독일인과 마자르인은 도나우 지역에서 역사의 주도권을 쥐었다. 독일인이 없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마자르인이 없었다면 남슬라브인은 튀르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일부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듯이, 아니 슬라브계 보스니아인이 오늘날까지 그렇듯이 이슬람교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남슬라브인이 자기 민족성을 독일이나 마자르의 민족성과 맞바꾼다 해도 결코 지나치게 비싸게 치르는 것이 아닌 은혜다.
15세기와 16세기 튀르크인의 침입은 8세기 아랍인 침입의 제2판이었다. 카를 마르텔의 승리는 빈의 성벽 아래서, 헝가리의 평원에서 거듭거듭 다시 쟁취되었다. 그때 푸아티에에서, 또 그 뒤 몽골 침입 때 발슈타트에서[4] 그랬듯이, 여기서도 다시 유럽의 발전 전체가 위협받았다. 그리고 그 발전을 구해 내는 것이 문제였던 곳에서, 오래전에 무너져 무력해진 오스트리아 슬라브인 같은 몇몇 민족성이, 그것도 덤으로 함께 구원받기까지 한 그들이 무슨 대수였겠는가?
밖에서 그랬듯이 안에서도 그랬다. 추동하는 계급, 운동의 담지자인 시민층은 어디서나 독일인이거나 마자르인이었다. 슬라브인은 민족적 시민층을 이루는 데 어렵게, 남슬라브인은 고작 군데군데서만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시민층과 함께 공업의 힘이, 자본이 독일인 또는 마자르인의 손에 있었고, 독일 교양이 발전했으며, 슬라브인은 지적으로도 독일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크로아티아 안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헝가리에서도 같은 일이, 다만 더 늦게, 그래서 덜한 정도로 일어났다. 거기서는 마자르인이 독일인과 함께 지적·상업적 지도권을 쥐었다. 그런데 헝가리의 독일인은 독일어를 지켰음에도 생각과 성격과 풍습으로는 진짜 마자르인이 되었다. 새로 들여온 농민 이주민들과 유대인, 그리고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만이 예외로, 낯선 땅 한가운데서 터무니없는 민족성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리고 마자르인이 문명에서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보다 조금 뒤처져 있었다 해도, 근래 들어 그들은 정치 활동으로 이를 눈부시게 따라잡았다.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헝가리 한 나라에만 독일 전체보다 더 많은 정치 생활이 있었고, 옛 헝가리 헌정의 봉건적 형식이 남독일 헌법들의 근대적 형식보다 더 잘 민주주의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운동의 선두에 선 것은 누구였나? 마자르인이다. 오스트리아의 반동을 지지한 것은 누구였나? 크로아티아인과 슬라보니아인이다.
이 마자르 운동에, 그리고 다시 깨어나는 독일의 정치 운동에 맞서 오스트리아의 슬라브인은 분리 동맹[5]을 세웠다. 바로 범슬라브주의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나 폴란드에서가 아니라 프라하와 자그레브에서 생겨났다. 범슬라브주의는 오스트리아의,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터키의 모든 작은 슬라브 민족과 꼬마 민족들이 오스트리아 독일인, 마자르인,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튀르크인과 싸우기 위해 맺은 동맹이다. 튀르크인은 그저 우연히 끼어든 것일 뿐이며, 그들 역시 완전히 쇠락한 민족이므로 아예 논외로 해도 된다. 범슬라브주의는 그 근본 경향으로 보아 오스트리아의 혁명적 요소들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처음부터 반동적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이중의 배신으로 이 반동적 경향을 곧바로 증명했다. 지금까지 혁명적으로 나선 유일한 슬라브 민족인 폴란드인을 제 좀스러운 민족적 편협함의 제물로 바쳤고, 자신과 폴란드를 러시아 차르에게 팔아넘겼다.
범슬라브주의의 직접적인 목적은 에르츠산맥과 카르파티아산맥에서 흑해, 에게해, 아드리아해에 이르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인 슬라브 제국을 세우는 것이다. 그 제국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마자르어, 왈라키아어, 터키어, 그리스어, 알바니아어 말고도 열두어 개의 슬라브어와 주요 방언을 아우르게 될 것이다. 이 전체를 묶어 주는 것은 지금까지 오스트리아를 묶어 주고 발전시킨 요소들이 아니라, 슬라브성이라는 추상적 속성과, 물론 주민 대다수에게 공통된, 이른바 슬라브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슬라브성이 몇몇 이데올로그의 머릿속 말고 어디에 있으며, 「슬라브어」가 팔라츠키, 가이[6] 같은 양반들과 그 패거리의 공상 속, 그리고 기껏해야 이제 어떤 슬라브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 교회의 고대 슬라브어 기도문 말고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는 이 민족들은 모두 저마다 전혀 다른 문명 단계에 있다. (독일인이) 꽤 높은 수준까지 발전시킨 보헤미아의 근대 공업과 교양에서부터 크로아티아인과 불가리아인의 거의 유목민 같은 야만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실제로는 이 모든 민족이 서로 정반대되는 이해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는 이 열 개에서 열두 개 민족의 슬라브어란 그만큼 많은, 대개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방언들은 몇몇 주요 갈래(체코어, 일리리아어, 세르비아어, 불가리아어)로 묶을 수도 있지만, 모든 문헌을 완전히 내버려 두고 대부분의 민족이 거칠었던 탓에 순전한 사투리가 되어 버렸으며, 몇몇 예외를 빼면 언제나 슬라브어가 아닌 외국어를 문어로 위에 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범슬라브주의적 통일이란 순전한 몽상이거나, 아니면 — 러시아의 채찍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슬라브 제국의 선두에는 어떤 민족들이 서야 한단 말인가? 바로 천 년 동안 흩어지고 쪼개진 채 다른 비(非)슬라브 민족들로부터 살아가고 발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억지로 공급받아 온 민족들, 비슬라브 민족들의 승리한 무기 덕에 튀르크의 야만 속으로 몰락하는 것을 겨우 면한 민족들, 몇천 명에서 200만이 채 안 되는, 어디서나 서로 떨어져 있고 무력하고 민족의 힘을 빼앗긴 작은 부족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약해져서, 예컨대 중세에 가장 힘세고 무시무시한 부족이던 불가리아인은 지금 터키에서 그저 온순하고 마음 약하기로만 알려져 있고, 스스로를 「도브레 흐리스티안」, 곧 착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체코인과 세르비아인도 빼지 않고, 이 부족들 가운데 민중 속에 살아 있으며 아주 작은 지방 싸움을 넘어서는 민족적·역사적 전통을 지닌 부족이 하나라도 있는가?
범슬라브주의의 시대는 남슬라브인이 아직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전체를 차지하고 비잔티움을 위협하던 8세기와 9세기였다. 그들의 두 적인 마자르인과 독일인이 서로 물어뜯고 있을 때조차 그들이 그때 독일과 마자르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하고, 독립을 얻지 못하고, 오래가는 제국을 세우지 못했다면, 천 년의 예속과 탈민족화를 겪은 지금 어떻게 그것을 하겠다는 것인가?
유럽에서 어느 한 구석에 하나나 여럿의 민족의 폐허를 지니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것은 예전 주민의 잔재로, 뒤에 역사 발전의 담지자가 된 민족에게 밀려나고 예속된 것들이다. 헤겔이 말하듯 역사의 진행에 무자비하게 짓밟힌 민족의 이 잔재들, 이 민족 찌꺼기는 그때마다 반혁명의 광신적인 담지자가 되며, 완전히 절멸되거나 탈민족화될 때까지 그렇게 남는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혁명에 대한 항의인 것처럼.
스코틀랜드에서는 게일인이 그렇다. 1640년부터 1745년까지 스튜어트가의 버팀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브르타뉴인이 그렇다. 1792년부터 1800년까지 부르봉가의 버팀목이었다.
에스파냐에서는 바스크인이 그렇다. 돈 카를로스의 버팀목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범슬라브주의의 남슬라브인이 그렇다. 그들은 몹시 뒤엉킨 천 년 발전의 민족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몹시 뒤엉킨 이 민족 찌꺼기가 오직 유럽 운동 전체를 뒤집는 데서, 곧 운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가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데서 구원을 보고, 그들에게 해방의 무기, 통일의 끈이 러시아의 채찍이라는 것 —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남슬라브인은 이미 1848년 전에 자신의 반동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냈다. 1848년은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2월의 폭풍이 터졌을 때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킨 것은 누구였나? 빈이었나, 프라하였나? 부더페슈트였나, 자그레브였나? 독일인과 마자르인이었나, 슬라브인이었나?
사실이다. 교양 있는 남슬라브인 가운데는 작은 민주주의 당파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성을 버리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자유를 위해 내놓으려 했다. 이 환상은 서유럽의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고, 그 공감은 슬라브 민주주의자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우는 동안에는 전적으로 정당했다. 이 환상은 프라하 포격[7]으로 깨졌다. 이 사건 이후로 모든 남슬라브 부족은 크로아티아인의 선례를 따라 오스트리아 반동의 처분에 몸을 맡겼다. 남슬라브 운동의 우두머리 가운데 아직도 민족들의 동등권이니 민주주의 오스트리아니 하는 따위를 지껄이는 자들은, 예컨대 많은 신문 기고가들처럼 꽉 막힌 몽상가이거나 옐라치치 같은 악당이다. 그들의 민주주의 맹세는 오스트리아 공식 반혁명의 민주주의 맹세 이상의 뜻이 없다. 요컨대 실천에서 남슬라브 민족성의 재건은 오스트리아 혁명과 마자르 혁명에 대한 가장 잔인한 광란으로 시작되며, 러시아 차르에게 바치는 첫 번째 큰 아첨으로 시작된다.
오스트리아 궁정 도당은 대귀족과 관료제와 군대 무리 말고는 슬라브인에게서만 지지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함락을 결정지은 것도 슬라브인이고, 빈을 강습한 것도 슬라브인이며, 지금 사방에서 마자르인에게 덤벼드는 것도 슬라브인이다. 그 선두에 대변인으로서 팔라츠키 휘하의 체코인이, 칼잡이로서 옐라치치 휘하의 크로아티아인이 있다.
이것이 6월에 체코 민주주의자들이 빈디슈그레츠의 산탄에 쓰러졌을 때 독일 민주주의 언론이 어디서나 그들에게 공감한 데 대한 보답이다. 바로 그 빈디슈그레츠가 지금은 그들의 영웅이다.
요약해 보자.
오스트리아에서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빼면, 1848년에 독일인과 마자르인은 이미 천 년 동안 그래 왔듯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들은 혁명을 대표한다.
천 년 동안 독일인과 마자르인에게 끌려다닌 남슬라브인이 1848년에 민족적 자립을 되찾겠다고 일어선 것은, 오직 그로써 동시에 독일·마자르 혁명을 짓누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반혁명을 대표한다. 그들에게는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쇠락하여 역사적 행동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두 민족, 곧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과 루마니아인이 가담했다.
독일인과 마자르인을 남슬라브인에 맞선 싸움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제 권력을 세운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제 남슬라브인을 독일인과 마자르인에 맞선 싸움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제 존재의 마지막 순간을 연명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의 정치적 측면이다. 이제 군사적 측면으로 가자.
마자르인만 사는 지역은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브라티슬라바에서부터 도나우강과 티서강의 북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의 등줄기에 이르기까지 수백만의 슬로바키아인과 얼마간의 루테니아인이 산다. 남쪽으로 사바강, 도나우강, 드라바강 사이에는 크로아티아인과 슬라보니아인이 살고, 더 동쪽으로 도나우강을 따라서는 50만이 넘는 세르비아인 정착민 집단이 산다. 이 두 슬라브 지대를 트란실바니아의 왈라키아인과 작센인이 이어 준다.
그러니 마자르인은 세 방면에서 타고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산악 통로를 쥐고 있는 슬로바키아인은 그들의 땅이 유격전에 더없이 알맞으므로, 그들이 그렇게 무관심하지만 않다면 위험한 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자르인은 북쪽에서 갈리치아와 모라비아로부터 쳐들어온 군대의 공격만 견뎌 내면 된다. 반면 동쪽에서는 루마니아인과 작센인이 대거 들고일어나 그곳의 오스트리아 군단에 가담했다. 그들의 위치는 한편으로는 땅이 산악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들이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를 쥐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유리하다.
끝으로 남쪽에서는 바나트의 세르비아인이 독일인 이주민과 왈라키아인과 역시 한 오스트리아 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알리부나르의 거대한 늪[8]에 가려져 거의 공격할 수 없다.
크로아티아인은 드라바강과 도나우강에 가려져 있고, 온갖 보급 수단을 갖춘 강력한 오스트리아군이 그들 마음대로 쓰이므로, 그들은 이미 10월 전에 마자르 땅으로 진격했고 지금은 드라바강 하류의 방어선을 손쉽게 지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방면,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지금 빈디슈그레츠와 옐라치치가 밀집 종대로 진격해 온다. 마자르인은 사방에서 포위되어 있다. 엄청나게 우세한 적에게 포위되어 있다.
이 싸움은 1793년 프랑스에 맞선 싸움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인구가 희박하고 반쯤만 문명화된 마자르인의 나라가 당시 프랑스 공화국이 가진 보급 수단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헝가리에서 만드는 무기와 탄약은 필연적으로 질이 매우 나쁠 수밖에 없다. 특히 대포 제조는 도저히 빨리 진행될 수 없다. 나라는 프랑스만큼 크지 않고, 그러므로 잃는 땅 한 치 한 치가 훨씬 더 큰 손실이다. 마자르인에게 남은 것은 그들의 혁명적 열광과 용맹, 그리고 코슈트가 그들에게 줄 수 있었던 정력적이고 신속한 조직뿐이다.
그렇다고 오스트리아가 이긴 것은 아직 아니다.
「황제군을 라이타강에서 쳐부수지 못하면 라프니츠강에서 쳐부순다. 라프니츠강에서 못 하면 페슈트에서 쳐부순다. 페슈트에서 못 하면 티서강에서 쳐부순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을 쳐부순다.」
코슈트는 그렇게 말했고, 그는 말을 지키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부더페슈트가 함락되더라도 마자르인에게는 아직 저 넓은 저지 헝가리의 대평원이 남는다. 그곳은 기병 유격전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땅이고, 늪지대 사이에 마자르인이 진을 칠 수 있는, 거의 함락시킬 수 없는 지점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말을 타는 마자르인은 이런 전쟁을 치를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황제군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서 모든 식량을 갈리치아나 오스트리아에서 실어 와야 하는 이 황량한 땅으로 감히 들어간다면, 그들이 어떻게 버틸지 짐작할 수 없다. 밀집 군단으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기동 부대로 흩어지면 끝장이다. 그들의 둔중함은 그들을 날랜 마자르 기병대의 손에 어쩔 도리 없이 넘겨줄 것이고, 그들이 이겨야 할 곳에서조차 추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낙오한 황제군 병사는 농민 하나하나, 목동 하나하나에게서 철천지원수를 만날 것이다. 이 초원에서의 전쟁은 알제리 전쟁[9]과 닮았고, 굼뜬 오스트리아군은 그것을 끝내는 데 몇 해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마자르인은 몇 달만 버티면 살아난다.
마자르인의 형편은 돈 받고 떠드는 흑황색[10] 열광이 믿게 하려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 그들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쓰러진다면, 그들은 1848년 혁명의 마지막 영웅으로서 영광스럽게 쓰러질 것이고, 그것도 잠시 동안만 쓰러질 것이다. 그때는 한순간 슬라브 반혁명이 그 모든 야만을 이끌고 오스트리아 왕정을 휩쓸 것이고, 궁정 도당은 자기 동맹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이 온 힘을 다해 불러일으키려 애쓰고 있는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승리한 봉기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독일인과 마자르인은 자유로워질 것이고 슬라브 야만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때 터지는 전면전은 이 슬라브 분리 동맹을 산산이 부수고, 이 고집 센 꼬마 민족들을 모두 그 이름까지 없애 버릴 것이다.
다음번 세계 전쟁은 반동적인 계급과 왕조들만이 아니라 반동적인 민족 전체를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 또한 하나의 진보다.
- 아시냐(assignat)는 프랑스 혁명 정부가 1789년부터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찍어 낸 지폐다. 코슈트의 헝가리 정부도 1848년부터 전쟁 자금을 대려고 자체 지폐를 발행했는데, 엥겔스는 이를 아시냐에 견준다. ↩
- 1846년 2~3월 서갈리치아에서 폴란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오스트리아 당국의 묵인 아래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영주 저택을 습격하고 귀족과 그 관리 천여 명을 죽였다. 이 농민들은 주로 폴란드계였고, 엥겔스가 쓴 「루테니아 농민」이라는 서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
- 엥겔스가 1848년 8~9월 『신라인 신문』에 연재한 「프랑크푸르트의 폴란드 논쟁」을 가리킨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포즈난 대공국의 일부를 독일 연방에 편입하기로 한 결정을 비판한 글이다. ↩
- 732년 푸아티에(투르) 전투에서 프랑크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물리쳤다. 발슈타트는 1241년 몽골군이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무찌른 레그니차 전투의 독일식 이름이다. 몽골군은 이긴 뒤 곧 물러났다. ↩
- 원어는 Sonderbund. 1847년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려다 내전에서 진 스위스 가톨릭 주들의 동맹 이름을 빗댄 표현이다. ↩
- 류데비트 가이(Ljudevit Gaj, 1809~1872). 크로아티아의 언어학자·언론인으로 남슬라브인의 문화적 통일을 내세운 일리리아 운동을 이끌었고, 크로아티아어 라틴 문자 표기법을 정비했다. ↩
-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봉기를 빈디슈그레츠가 포격으로 진압한 사건. 봉기는 프라하 슬라브 회의가 열리던 중에 터졌고, 회의도 이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
- 바나트 남서부, 지금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에 있던 넓은 습지. 1848~1849년 세르비아인 봉기군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
- 1830년 이래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하려고 벌인 전쟁. 압델카데르가 이끈 저항은 1847년까지 이어졌다. ↩
- 검정과 노랑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색이다. 「흑황색」은 당시 오스트리아 황실 편을 드는 사람들과 언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관련 인물 30명
헝가리 혁명정부와 혼베드12명
지도부4
재무장관으로 시작해 1848년 가을부터 국방위원회를 이끌며 혼베드를 일으켰고, 1849년 4월 독립 선언을 주도해 섭정 대통령이 되었다. 8월 11일 괴르게이에게 전권을 넘기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헝가리 첫 책임 내각 총리버차니 러요시1807–18491848년 3월 첫 책임 내각을 꾸려 4월 법을 시행하고 군대를 조직했으나, 궁정과의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10월 2일 사임했다. 1849년 1월 체포되어 10월 6일 페슈트에서 총살되었다.
혼베드 총사령관, 전쟁장관괴르게이 아르투르1818–1916오조러에서 크로아티아 군단을 항복시키고 1849년 봄 공세를 이끌어 이서세그에서 빈디슈그레츠를 꺾고 부더를 되찾았다. 마지막에 전권을 넘겨받아 8월 13일 빌라고시에서 러시아군에 항복했다.
버차니 내각 내무장관, 1849년 총리세메레 베르털런1812–1869버차니 내각이 사퇴할 때 코슈트·메사로시와 함께 남았고, 1849년 5월 2일 새 내각을 꾸려 소수 민족 언어법을 통과시켰다
집행 · 지휘3
빈 10월 봉기의 방어를 지휘한 뒤 헝가리로 와서 트란실바니아를 되찾았고, 1849년 3월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세게시바르와 테메시바르에서 패한 뒤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헝가리군 총사령관헨리크 뎀빈스키1791–18641849년 1월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카폴너에서 지고 물러났으며, 8월 쇠레그에서 하이나우에게 졌다
헝가리군 장군, 코마롬 요새 사령관클러프커 죄르지1820–1892봄 원정을 설계했고, 빌라고시 항복 뒤에도 코마롬을 지키다 1849년 10월 초 마지막으로 요새를 넘겼다
참여5
1848년 3월 15일 「민족의 노래」를 낭송하고 12개조를 퍼뜨려 페슈트 혁명을 일으켰다. 벰의 트란실바니아군에서 싸우다 1849년 7월 31일 세게시바르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버차니 내각 법무장관데아크 페렌츠1803–187612개조로 자유주의자를 묶었고, 빈 궁정과 타협을 꾀하다 실패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버차니 내각 교통장관세체니 이슈트반1791–1860개혁 시대의 지도자로 코슈트의 급진 노선에 맞섰고, 1848년 9월 신경 쇠약으로 정계를 떠났다
3월 15일 풀려난 정치범탄치치 미하이1799–18843월 15일 군중이 부더 감옥에서 풀어 주었고, 그 뒤 『노동자 신문』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를 대변했다
3월 청년 지도자요커이 모르1825–19043월 15일 페퇴피와 함께 페슈트의 대학을 돌며 12개조를 낭독했다
빈·프라하의 민주파와 봉기 세력3명
합스부르크 왕조와 제국군6명
지도부3
1848년 12월 2일 즉위해 4월 법을 거두고 헝가리 정부를 불법화했으며, 니콜라이 1세에게 러시아군을 청해 혁명을 진압했다.
오스트리아 황제·헝가리 왕페르디난트 1세 (오스트리아 황제)1793–18754월 법을 재가했으나 빈 탈환 뒤인 1848년 12월 2일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양위했다
오스트리아 총리 겸 외무장관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1800–1852빈 탈환 뒤 총리가 되어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이끌었고, 1849년 3월 헌법으로 헝가리를 중앙집권 제국에 편입하고 헝가리 의회를 해산했다
집행 · 지휘2
합스부르크 편에 선 크로아티아·세르비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 민족 운동3명
러시아 개입군2명
진영 밖
참여2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자료 26자료 27자료 28자료 29자료 30자료 31자료 32자료 33자료 34자료 35자료 36자료 37자료 38자료 39자료 40자료 41자료 42자료 43자료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