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군대 제1기병군
First Cavalry Army (Red Army)
1919년 11월 부됸니의 제1기병군단을 바탕으로 만든 붉은 군대의 기병군.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을 추격해 1920년 초 로스토프와 북캅카스까지 내려갔고, 소련-폴란드 전쟁에서는 6월 5일 폴란드 전선을 뚫어 키예프를 되찾게 했으나 르부프 공방전에 묶였다가 8월 말 코마루프에서 패했다. 이어 북타브리야의 브란겔과 마흐노군을 상대로 싸운 뒤 1923년 10월 해체되었다.
상세
1919년 11월 17일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가 제4·6·11기병사단으로 이루어진 부됸니의 기병군단을 기병군으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1918년 차리친에서 맺어진 스탈린·보로실로프·부됸니의 인연이 그 배경이었고, 12월 보로실로프와 샤덴코가 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에 들어갔다. 러시아어 출처는 두멘코와 미로노프 같은 이들이 실제 창설에 기여했으나 소비에트 역사서술에서 지워졌다는 견해도 소개한다. 1919년 10월 보로네시와 카스토르노예에서 백군 기병을 처음으로 대규모 기병전에서 꺾었고, 1920년 2월 티호레츠카야 방면 공세로 돈과 쿠반의 백군을 갈라놓았다. 4월 남서전선으로 옮겨 1만 6,700명의 기병과 많은 타찬카로 폴란드군을 공격했다.
6월 5일 삼호로도크 돌파 뒤 폴란드군은 키예프를 떠났지만, 기병군은 지토미르와 베르디체프에서 수비대 학살과 병원 방화를 저질렀다. 8월에는 총사령관 카메네프의 북진 명령을 스탈린과 예고로프의 지지 아래 거부하고 르부프를 공격하다 포위를 풀고 물러났고, 이 결정은 바르샤바 전투 패배의 책임 논쟁으로 이어졌다. 8월 31일 코마루프 전투는 역사상 마지막 대규모 기병전으로 불리며, 퇴각 중 최대 4천 명이 죽었다. 9월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제6기병사단을 중심으로 반란과 유대인 포그롬이 3주 동안 번졌고, 사단 군사위원 셰펠레프가 살해되었다. 이사크 바벨은 이 기병군에 종군한 경험으로 단편집 『기병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