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인민위원
인물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예조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세묜 부됸니, 얀 가마르니크, 표트르 스미르노프, 이오나 야키르, 이에로님 우보레비치, 파벨 디벤코, 아우구스트 코르크, 야코프 알크스니스, 이오아킴 바체티스, 알렉산드르 토도르스키,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 게오르기 주코프, 니콜라이 카쿠린, 알렉산드르 스베친, 안드레이 스네사레프, 미하일 프룬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안톤 데니킨, 니키포르 흐리호리우,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 모이세이 루히모비치, 세르게이 카메네프, 이바르 스밀가,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예핌 샤덴코, 보리스 두멘코, 미하일 칼리닌,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드미트리 쿠르스키, 니콜라이 세마슈코, 필리프 미로노프, 표트르 브란겔 (백군 총사령관), 비탈리 프리마코프, 세묜 티모셴코, 안드레이 즈다노프, 가이크 브지시캰, 마트베이 자하로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콘스탄틴 베르시닌 용어대숙청, 붉은 군대, 붉은 군대 제1기병군, 군사야당, 차리친 방어 (1918–1919),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군사파시스트 음모, 신반대파, 하산 호 전투, 소비에트연방영웅, 내무인민위원부(NKVD), 소비에트 파르티잔 운동, 스타프카, 노보로시스크 철수 사건대숙청, 내전과 열강의 개입,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겨울전쟁, 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봉쇄
니콜라이 파블렌코의 머리말
소비에트 국가가 존재한 70년 동안 군대의 수장 자리를 거쳐 간 군 지도자는 열다섯 명이 넘는다. 국방인민위원(국방장관)은 평균 4~5년마다 바뀌었다. 국방인민위원 자리에 머문 기간으로 기록을 깬 군 지도자는 단 한 사람,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였다. 그는 이 자리에 거의 15년 동안 있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는 이미 1907~1908년 바쿠에서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도 1918년까지는 활동적인 혁명가였다는 점은 말해 두어야 한다.
보로실로프가 군대를 어떻게 이끌었는지 따라가 보면, 처음 4~5년 동안은 앞서 시작된 군사 개혁을 이어 갔지만 그 뒤 10년 동안은 군대가 무너져 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소련군과 해군의 비극이 있었다.
예부터 지휘관이 그러하면 군대도 그러하다고 했다. 전문적으로 잘 훈련되고 경험 많은 장교들은 군대를 가장 어려운 과제도 해낼 수 있는 강력한 전투 수단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그런 인재가 없으면 군대는 조직된 군사력이라기보다 “밥만 축내는 무리”에 가까웠다.
1930년은 많은 당 원로와 참전 용사들에게 대규모 공장 건설과 농업 집단화만이 아니라, 이미 눈에 띌 정도를 넘어선 탄압 조치로도 기억된다. 1930년 군대에서는 옛 군사 전문가 출신 교관이 많이 체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교관과 군관구·중앙 관리국 직원들의 체포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하리코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벌어졌다. 탄압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베르홉스키, 리그나우, 루키르스키, 카쿠린, 사포시니코프, 스베친, 스네사레프, 수호프 같은 이름난 학자들이 있었다. 군사 과학 인력이 짓밟히면서 군대는 군사 이론을 다듬고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며 새 무기를 설계하던 사람들을 잃었다. 그래서 국방인민위원부는 무력 투쟁 방식이 발전하는 새 흐름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총참모부와 군관구 지휘부가 파시스트 독일과의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의 방식으로 치르려 한 것이다.
특히 1937~1938년의 탄압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붉은 군대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토도르스키 중장은 18년 동안 감옥과 수용소를 떠돈 끝에 스탈린의 전횡에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회복 위원회 하나를 이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짧은 자료를 만들어 몇몇 벗과 지인에게 건넸다. 그 가운데 한 부가 『군사사 잡지』 편집장이던 내 손에 들어왔다. 그 발췌문은 이미 발표되었지만, 몇 가지 사실은 다시 한번 짚어 둘 만하다.
소련 원수 다섯 명 가운데 세 명, 미하일 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가 테러의 희생자로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였다. 1급 군 인민위원[1] 두 명, 얀 가마르니크와 표트르 스미르노프가 모두 죽었다. 1급 군사령관 다섯 명 가운데 세 명, 이오나 야키르, 이에로님 우보레비치, 이반 벨로프가 죽었다. 1급 함대 기함 두 명, 블라디미르 오를로프와 미하일 빅토로프가 모두 죽었다. 2급 군사령관은 모두 죽었다. 파벨 디벤코, 미하일 레반돕스키, 이반 두보보이, 아우구스트 코르크, 니콜라이 카시린, 알렉산드르 세댜킨, 야코프 알크스니스, 이노켄티 할렙스키, 이오아킴 바체티스, 미하일 벨리카노프. 2급 함대 기함 두 명도 모두 죽었다. 2급 군 인민위원 열다섯 명이 모두 죽었다. 군단장 67명 가운데 60명이 탄압받았고 그 가운데 57명이 죽었다. 1급 기함 여섯 명이 모두 죽었다. 군단 인민위원 28명 가운데 25명이 탄압받았고 그 가운데 23명이 죽었다. 2급 기함 열다섯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죽었다. 사단장 199명 가운데 136명이 탄압받았고 그 가운데 125명이 죽었으며, 열한 명이 감옥에서 돌아왔다. 사단 인민위원 97명 가운데 79명이 탄압받았고 그 가운데 69명이 죽었다. 여단장 397명 가운데 221명이 탄압받았고 그 가운데 200명이 죽었다…
자료는 이어서 1937년 5월부터 1938년 9월까지 육군에서만 지휘관 3만 6761명이, 해군에서 3천 명 넘게 탄압받았다고 적는다. 그러니까 1년 반이 채 안 되는 동안 붉은 군대와 해군의 지휘관 약 4만 명이 탄압받은 것이다. 전쟁이 다가오는데 자기 나라 군 간부들을 이토록 광포하게, 이토록 대대적으로 없앤 일은 세계 역사에 없었다.
1960년대 초에 나는 보로실로프를 여러 번 만났다. 그는 자기 삶의 길을 즐겨 이야기했다. 지노비예프가 이끈 “신반대파” 참가자들의 회합에 끼어 키슬로봇스크의 한 동굴에 가게 된 일까지 이야기했다. 그런데 대화가 대량 탄압 쪽으로 넘어가면 금세 움츠러들며 몹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한번은 스탈린이 뛰어난 사령관들의 죽음을 후회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스탈린은 그들의 죽음을 후회했다기보다 이 무거운 죄의 책임을 나 혼자에게 떠넘기려 애썼습니다. 물론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고, 늘 맞서 버텼지요.” 그는 이어서 말했다. “투하쳅스키 등을 처단하는 결정은 스탈린과 몰로토프와 예조프가 우리에게 떠안긴 겁니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 게오르기 주코프와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 말로는 전선이 위급할 때면 스탈린은 죽은 사령관 몇몇을 떠올리면서, 자기는 그들을 없앤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고 한다.
N. 파블렌코
중장, 교수, 역사학 박사
스탈린의 인민위원
1937년 여름, 한 중앙 신문에 두 “스탈린의 인민위원”이 힘차게 악수를 나누는 우정 어린 캐리커처가 실렸다. 둘은 그 무렵 “만민의 영도자” 측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던 인물,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예조프의 고슴도치 장갑”과 “보로실로프 사수”라는 말은 보통명사가 되었다.[2] 그러나 나라의 역사가 두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랐다. 예조프는 대량 탄압의 상징이 되었고, 보로실로프는 용맹과 영웅주의의 표상으로 남았다.
이것이 공정한가?
내전 초기인 1918년 여름에 짝을 이룬 스탈린-보로실로프 2인조는 비극적인 1941년 가을까지, 아니 실제로는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후견인보다 16년을 더 산 보로실로프는 자기 우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5년 동안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속했고, 그 긴 세월 동안 스탈린이 총살대 앞에 세우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남았다.
보로실로프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혁명 전에 무엇을 했고 혁명 뒤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 어떤 훈장을 언제 받았는지는 모든 백과사전과 사전에 나온다.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어떤 참고서와 전기에도 실리지 않은 것을 말하는 편이 낫다. 스탈린-보로실로프 2인조는 우리 인민과 우리나라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 아무 죄 없는 사람 수만 명을 대량으로 없앤 주요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인 보로실로프는 죽어서도 그를 위해 지어낸 “전설적인 사령관”, “인민의 영웅”이라는 이력을 달고 있다. 지어내지 않은 보로실로프의 진짜 이력을 살펴보자.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처음 밝혀내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 쓴 거의 모든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여러 해 전에 발표되기까지 했다. 그것도 보로실로프가 살아 있을 때였다.
미래의 두 사령관, “만고에 걸쳐 만민의 위대한 사령관”과 “전설적인 사령관”은 1918년 초여름 처음으로 군사의 들판에서 만났다. 스탈린은 식량 문제를 맡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특별전권위원이었고, 보로실로프는 돈바스에서 차리친으로 물러나는 부대 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둘은 북캅카스 군관구 군사평의회에 들어갔고,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부대의 작전 지휘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은 중앙의 대표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북캅카스 군관구 병력의 상당 부분을 이루는 부대 집단의 사령관이라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 부대는 아직 전투력 있는 부대로 다시 짜야 할 빨치산 야영 무리였다.
군대에서 한 번도 복무한 적이 없는 사람이 군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 그런 예는 적지 않다. 붉은 군대에서는 미하일 프룬제, 이오나 야키르를 비롯한 이름난 내전 영웅들이 그랬다. 게다가 프룬제와 야키르는 직업 군인이 되었다. 그러려면 끈질기게 배워야 한다. 반대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한 번도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군사 문제에는 끝까지 문외한으로 남았다. 손질을 많이 거친 회고록에서 게오르기 주코프는, 보로실로프는 평생 낮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스탈린은 전쟁이 끝날 무렵 무언가를 배웠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지막 말은 주코프 자신도, 다른 군 지도자들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들의 회고록을 보면 때로는 그들의 뜻과 상관없이,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군사에 무지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 대신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의 야망은 엄청나서, 둘은 사령관으로 인정받기를 몹시 바랐다.
“사령관”이라는 말의 뜻부터 정해 두자. 사령관은 직책이 아니라 자질이다. 군대를 이끄는 사람의 역량으로, 학식의 깊이에서부터 큰 규모의 정치적·군사적 예측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요소를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스탈린도 보로실로프도 사령관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군복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군인이 아니었다. 보로실로프의 경우는 군 지도자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1918년 차리친 근처에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연대를 이끌어 보겠다는 바람을 이루려 했다. 되지 않았다. 정규 부대를 만드는 것보다 빨치산 방식을 앞세우고 군사 정세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적군 부대의 처지는 나빠졌고, 군관구 참모부, 그리고 그 군사 지휘관이던 경험 많은 군 지도자이자 군사학자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와 충돌이 빚어졌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맞서는 것은 언제나 위험했다. 진실도 논리도 일의 이익도 아닌, 그들 개인의 야망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스네사레프 자신과, 군관구 참모부와 부대에서 복무하던 옛 장교 수십 명이 체포되어 아무 증거도 없이 “적이자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충돌의 진상을 가리러 모스크바에서 특별 위원회들이 내려왔다. 스네사레프는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장막」[3] 서부 구역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군사 전문가들은 스탈린과 보로실로프가 탄압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차리친의 첫 충돌은 이렇게 끝났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사회혁명당원 여성에게 총을 맞고 중상을 입어 크렘린의 숙소에서 반쯤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으므로, 그 무렵에는 스탈린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아무도 조사를 하지 않았다. 두 “용맹한” 혁명가는 차리친 집행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미닌과 함께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1918년 9월 17일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에 들어갔다.
전선 사령관으로는 장군 출신 파벨 파블로비치 시틴이 임명되었다. 보로실로프와 미닌은 곧바로 스탈린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으로 뽑자고 했다.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의 지령에는 그런 직책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새 사령관은 작전 문제에 대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의 서투른 간섭을 단호히 물리쳤다. 다시 충돌이 터졌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당과 국가와 군의 규율을 어기고 시틴을 전선 지휘에서 밀어낸 뒤 사령관 자리에… 보로실로프를 앉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 중앙위원회와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가 단호했다. 셋(곧 2인조와 미닌)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에서 뺀 것이다.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보로실로프는 부대로 보내졌으며, 미닌은 다른 일을 맡았다. 시틴은 사령관 자리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차리친에서 아스트라한까지 충돌이 꼬리를 물었고, 빨치산식 행태가 길어지면서 전투력 있는 정규 부대를 제때 만들지 못했다. 그 결과 북캅카스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무서운 적, 안톤 데니킨 장군이 세력을 굳혔다. 그는 그곳에서 모스크바로 진군할 군대를 길러 냈다. 차리친 방어를 들어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를 떠받들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떠받들었고, 지금도 떠받들고 있다!
내전의 군 지도자로서 보로실로프는 어떠했나? “군 지도자”라는 말은 높은 지휘관 직책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직책을 감당하는 능력을 뜻한다. 보로실로프는 용감한 사람이었고, 조직 능력도 조금은 있었다.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은 그것이다. 그다음에는 지식과 전략가의 재능과 무인의 용맹이 필요하다. 보로실로프는 끝내 이 “그다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1918년 봄 부대를 하나 꾸렸고, 빨치산 부대 연합의 지휘관으로 뽑혔다. 그 연합은 제5우크라이나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군사령관 보로실로프는 돈바스에서 차리친으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도시 방어에 참여했다. 전선 혁명군사평의회에서 빠진 뒤 보로실로프는 한동안 제10군을 지휘했다.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지도부가 보로실로프는 작전 문제에 서투르다는 군사 전문가 스네사레프와 시틴의 결론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말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곧 민간 직무로 옮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1919년 6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19년 3월 제8차 당대회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 연대가 되살아났다. 대회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가 붉은 군대 문제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 군대는 어떠해야 하는가?
붉은 군대는 상급 기관이 임명한 전문가 지휘관들이 이끌고 혁명적인 철의 규율을 갖춘 혁명적 상비군이어야 한다. 이것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생각이었다.
붉은 군대는 지휘관을 선거로 뽑고 명령을 토론에 부치는 민병대식, 빨치산식 군대여야 한다. 대회에서 꾸려진 “군사 반대파”는 그렇게 보았다. 그 실질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막후의 지도자가 스탈린-보로실로프 2인조였고, 이 2인조는 10년 뒤 자신들이 붉은 군대의 “참된, 진짜” 창설자이자 조직자라고 선언했다.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반대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학은 “군사 반대파”가 트로츠키 개인과 군대 안 “트로츠키파의 전횡”을 겨냥한 것이었으므로 거기 가담한 것은 이를테면 용서할 만하다고 말한다. 트로츠키를 군대 안의 독자 세력으로 그리려 드는, 지금까지 쓰이는 1930년대 말의 상투어들은 실은 당 중앙위원회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내전에서 소비에트 인민이 승리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이 레닌과 레닌의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다른 누군가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보기에 “군사 반대파”는 실제로는 레닌과 정규군을 만들려는 그의 노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보로실로프가 반대파에 가담하고 이끈 것도 고결한 “이념적” 목표 때문이 결코 아니라 주관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첫째, 군사 전문가들이 들어오면 지휘할 기회를 잃을까, 곧 거저 얻은 수천 명에 대한 권력을 잃을까 두려웠고, 둘째, 현대 군대를 조직하고 충원하는 원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이던 보로실로프는 1919년 5월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아타만 흐리호리우와의 싸움에 참여했다. 크레멘추크 방면 부대 집단을 몸소 지휘했으나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전선 부대(사령관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가 “흐리호리우 반란”을 진압한 뒤, 그는 지도 기관 여러 곳에 동지들을 헐뜯는 글을 보내 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면서 자기 공로를 “부끄러울 만큼 부풀렸다”(안토노프-옵세옌코의 말).
내전 전선에서 보로실로프의 지휘관 경력은 같은 1919년에 끝났다. 6월 7일 그는 제14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고는 두 주 남짓 만에, 도시 방어 조치에 관한 전선 사령관의 지령을 이행하지 못하고 하리코프를 데니킨군에 내주었다. 보로실로프는 군사재판을 받았다. 재판소는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따졌다. 판사들의 공통된 의견은 모이세이 루히모비치가 대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로실로프가 경험 많은 지하 활동가이고 좋은 친구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가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중대, 대대, 좀 무리하면 연대까지다. 군사령관은 될 수 없다.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불행이지 죄가 아니다. 애초에 그를 군사령관에 앉히지 말았어야 했다…
보로실로프는 제61소총사단을 편성하러 보내졌다. 그러나 끝내 편성하지 못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보로실로프를 인민위원 일에 쓰기로 했다. 1919년 11월 그는 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에 임명되어 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인민위원으로서 보로실로프는 우리 전략 기병의 첫 연합 부대인 제1기병군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힘을 쏟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공로 못지않게 “삐걱거림”이 많았다. 2인조는 계속 움직였다. 보로실로프를 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도 사실상 보로실로프에게는 버거웠다. 그는 끝내 군대에 제대로 된 군기를 세우지 못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 자신이 규율 없음의 본보기였으니까.
물러나는 데니킨군을 뒤쫓던 제1기병군과 제8군은 1920년 1월 7~8일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했다. 이제는 돈강 너머의 데니킨군을 끊어 그들이 노보로시스크로 물러나 크림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그곳에서 활동하던 백위군 집단을 강화해 소비에트 공화국에 맞서는 새 전선을 열 수 있었다. 그러려면 돈강을 건너 바타이스크를 점령하고 노보로시스크로 가는 철도를 끊어야 했다… 두 군, 곧 제1기병군과 제8군은 남부전선(그곳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이 스탈린이었다)에서 빠져 남동부전선(1920년 1월부터는 캅카스 전선)으로 편입되었다. 전선 사령관 바실리 이바노비치 쇼린은 기병군에게 힘찬 공격으로 돈강을 건너 바타이스크를 점령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곧바로 충돌이 일어났다! 기병군과 그 지휘부가 쇼린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열이틀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작전은 무산되었다. 백군은 진지를 굳혔고, 이제 돈강을 건너기는 무척 어려워졌다. 쇼린은 붉은 군대 부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사실상 소환된 것이다). 새 전선 사령관은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맡았다.
“바타이스크 마개”로 알려진 이 일은 내전사에서… 빠져 버렸다. 1925년 쇼린은 군을 떠나야 했다. 하기야 프룬제가 서명한 명령에는 그가 영웅으로서 “붉은 군대 명부에 영구히 등재된다”고 적혀 있었다… 군을 떠난 쇼린은 새 기술 문제에 힘을 쏟았고, 로켓 기술 개발이 시작된 그 유명한 GIRD(반동추진연구회)를 만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보로실로프는 바실리 이바노비치 쇼린을 잊지 않았다. 1938년, 68세 노인이던 쇼린은 총살되었다…
투하쳅스키는 쇼린의 구상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병군 지휘부의 규율 없음이 발목을 잡았다. 레닌은 캅카스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이바르 스밀가와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에게 보낸 전보에 이렇게 썼다. “캅카스 전선 우리 부대의 상태, 부됸니 부대의 완전한 해이를 몹시 걱정하고 있음…” 보로실로프와 부됸니가 투하쳅스키를 싫어하게 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고, 그 반감은 폴란드 전선의 사건들 뒤로 증오로 바뀌었다.
결국 데니킨군은 주력을 노보로시스크로 빼내 크림으로 건너보내는 데 성공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브란겔 전선이라는 새 전선을 떠안았다…
그 대신 기병군의 두 정치 지도자, 보로실로프와 예핌 샤덴코는 바로 그 무렵 내전의 영웅으로 당시 제1혼성기병군단을 지휘하던 보리스 모케예비치 두멘코를 처단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아마도 처단을 주도했을 것이다). 두멘코와 그 동지들을 재판한 군사재판소의 사건 기록에는 보로실로프와 샤덴코가 손수 쓰고 서명한 밀고장, 그리고 이 둘이 그때 설득해 밀고장을 쓰게 한 군사령관 부됸니의 밀고장이 남아 있다. 세 사람의 진술이 판결을 갈랐다. 두멘코와 그 동지들은 처형되었다.
1920년 폴란드 원정의 실패는 지금까지도 딱딱하고 거짓된 스탈린주의의 틀 안에서 다루어진다. 실패의 책임자로는 총사령관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와 서부전선 사령관 투하쳅스키만 거론된다. 실제로는 이것은 거짓이다. 적어도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백색 폴란드와의 전쟁을 앞두고, 또 전쟁 중에 소비에트 공화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어려움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투하쳅스키의 전략 계획이 당 중앙위원회와 총사령부에서 채택되었다. 이 계획은 원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서부전선과 남서부전선 두 전선으로 바르샤바를 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랬다면 전쟁을 빨리 끝내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걸맞은 강화 조건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전을 무산시킨 것은 스탈린이었다.
그의 압력에 남서부전선 사령관 알렉산드르 이고로비치 예고로프는 필요한 때에 자기 군대를 바르샤바 방면으로 돌리지 않고 리보프를 향한 쓸모없는 공세를 이어 갔다. 스탈린은 또다시 정치국과 당 중앙위원회의 지령, 총사령관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소환되어 전선 업무에서 물러났다. 전선 병력의 대부분은 기병군까지 포함해 서부전선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제1기병군 지휘부, 곧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기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바르샤바 작전을 무산시켜 원정 전체를 완전한 실패로 몰아넣었다.
1920년 9월 제1기병군은 브란겔 전선으로 옮겨졌다. 가는 길에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붉은 군대에 그때까지 없던 일이었다. 기병군의 한 사단 전체가 강도 행위로 군사재판소의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주모자들은 총살되었다. 사단은 조건부로 해체되었고, 기병들에게는 피로 죄를 씻으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전선 사령관 프룬제는 레닌에게 보낸 보고에 이렇게 썼다. “제1기병군을 정치적으로 바로잡기 위한 진지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합니다. 가까운 장래에 이 군대가 우리의 평온에 큰 위협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칼리닌 동지가 이 군 부대를 방문해 주기를 바랍니다.”
미하일 칼리닌은 실제로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드미트리 쿠르스키, 니콜라이 세마슈코를 비롯한 특별 열차 “10월 혁명” 일행과 함께 제1기병군 주둔지를 찾아 군대의 정치적 기강을 바로잡았다.
브란겔을 치는 마지막 작전을 짜면서 프룬제는 제1기병군이 아니라 필리프 쿠지미치 미로노프의 제2기병군을 제1제대에 세웠다. 그러나 그 뒤 영웅 미로노프는 모함을 받아 1921년 4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기병들의 전공은 모두 보로실로프와 부됸니의 것이 되었다.
1925년 10월, 붉은 군대의 지도자로 오로지 일에만 헌신하고 스탈린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던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인, 마흔 살의 프룬제가 수술대 위에서 갑자기 숨졌다. 성대한 장례식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린 스탈린은 프룬제의 자리에 2인조의 짝, 보로실로프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로실로프는 소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 겸 육해군 인민위원이 되었다. 역량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그는 그토록 높은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는 평생 스탈린의 피조물이었고, 스탈린의 “일”을 고분고분 뒤따르며 이 막중한 자리에서 나라의 국방력과 붉은 군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거의 15년 동안 보로실로프는 찬양꾼들의 합창을 거느리고 붉은 군대를 이끌었다. 모든 것은 완전한 파탄으로 끝났다. 물론 군사 정책의 큰 문제를 결정한 것은 보로실로프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민위원인 보로실로프는 붉은 군대 참모부(총참모부)와 군 최고 지도부에 기대어 이 문제들의 안을 준비하고 다듬으며 자기 부처의 필요와 이익을 지켜야 했다. 모든 나라의 군 부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그렇지 않았다.
전략에서 부처 업무와 인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문제를 스탈린이 준비하고 다듬었다. 다른 걱정거리가 없어서는 결코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보로실로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개인적 충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1930년대 중반까지 보로실로프는 큰 영향력과 실권을 쥐고 있었다. 보로실로프의 무능은 부하들도 느끼고 있었고, 투하쳅스키나 세르게이 카메네프 같은 몇몇은 아예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1931~1936년은 붉은 군대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보로실로프의 부인민위원(모두 합쳐 두 명뿐이었다)으로 얀 가마르니크와 투하쳅스키가 일했다. 그 무렵 앞선 군사 과학을 바탕으로 붉은 군대의 전투력을 빠르게 키우는 일을 이끈 핵심 인물은 물론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였다. 그때 보로실로프와 가마르니크는 투하쳅스키를 지지했다. 보로실로프는 군사 문제에서 투하쳅스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듯하다. 여러모로 도왔고(그때 그의 도움은 큰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방해하지는 않았다. 짧은 이 협력 기간은 매우 성과가 컸다. 붉은 군대는 세계 최고 군대들의 수준까지 올라섰다. 어떤 공격도 물리치고 침략자를 호되게 응징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정상적인 인간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다.
1936~1938년 보로실로프는 동지들과 붉은 군대를 배신했다… 그는 붉은 군대 지휘관 대량 탄압의 가담자이자 조직자가 되었다. 지휘관들과 함께 그 가족과 친척 수만 명이 탄압받았다.
보로실로프의 서명은 “앞으로 쓸 수 없으므로 붉은 군대에서 완전히 해임함”이라는 판에 박은 문구와 함께 군에서 쫓겨난 지휘관 수천 명의 이름 아래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했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두가 안다. 보로실로프가 누군가를 도왔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이야기는 문학 작품에까지 실렸다. 나는 모르겠다. 절망한 사람 수백 명이 보로실로프에게 호소했다. 그 편지들 가운데 일부는 남아 있고 많은 수는 없어졌다. 나는 인민위원이 긍정적으로 처리한 결재를 하나도 읽지 못했다. 호소문에는 대개 결재 자체가 없었다. 보로실로프가 도운 군 지도자나 지휘관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한 명도 모른다. 그 대신 비탈리 프리마코프, 이오나 야키르, P. P. 그리고리예프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체포를 조직하는 데 그가 몸소 가담한 것은 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스탈린 음모의 숨은 동기를 밝히려고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로실로프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 할 뿐이다. 우리 민간·군사 역사가들은 아주 최근까지 “전설적인 원수”의 이름을 붉은 군대의 파괴와 연결 짓지 않으려 했다. 중립적이고 주어 없는 “근거 없는 탄압”이라는 말이 선호되었다.
보로실로프는 배신자가 되었다. 왜일까?
다시 한번 밝혀 두자. 우리의 공식 간행물에는 이런 질문도, 그 답도 없다. 나는 대화와 토론에서 알게 된 역사가들의 의견만 말하겠다. 많은 역사가는 보로실로프가 준비되던 탄압에 맞섰다고 본다. 나는 사정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인민위원 자리에서 보로실로프가 성공한 일은 단 하나, 내전사를 날조하고 스탈린의 역할(그리고 물론 자기 역할)을 떠받든 것뿐이다. 1929년 후견인의 쉰 살 생일에 바친 연설 「스탈린과 붉은 군대」로 붉은 군대와 그 업적에 관한 진실에 공격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였다. 보로실로프가 그 연설을 거두어들였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1930년 붉은 군대의 많은 군 지도자, 곧 옛 차르 군대의 장군과 장교 출신들을 처단하려 한 것도 보로실로프였다. 하기야 그때는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보로실로프의 “탓”이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 그는 NKVD가 모함해 체포한 군 지도자 몇몇(가야 가이 등)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군에서 내쫓았다. 1930년대 전반에 그는 우리의 뛰어난 군 지도자들을 그저 참아 주었을 뿐이다. 그들이 보로실로프 자신과 스탈린은 할 줄 모르는 일, 곧 군대와 나라의 방위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로실로프와 스탈린은 이제 다 되었다고 판단하자 거추장스러운 사람들을 그냥 없애 버렸다. 첫째, 그들은 스탈린과 보로실로프가 나라와 군대와 전쟁의 역사를 비튼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둘째, 군대와 나라에 대한 2인조의 절대 권력을 세우는 데 걸림돌이었다(보로실로프는 나중에 스탈린이 자기를 “마차”에서 내던지리라고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희생자가 얼마나 되든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인민은 많고, 새 세대는 자라날 테니까.
1930~1940년대의 모든 사건은 나라와 경제, 사회 발전, 과학과 문화를 이끄는 문제에서 스탈린 정부가 무지했음을 보여 준다. 보로실로프는 한때 그 정부의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군대에 대해서는 이 말이 더더욱 들어맞는다. 2인조는 군대가 둘 다 유난히 신경 쓰던 군복이 아니라는 것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군대는 정치의 손에 들린 군사 수단이다. 그것이 움직이려면 나라에 군사 과학과 군사 술과 군사 업무가 있어야 한다. 군대의 목을 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사실상 군사 과학과 군사 술과 군사 업무를 없애 버렸다. 1930년대 말의 군사적 사건들과 대조국전쟁이 이를 남김없이 증명했다.
스탈린의 국방인민위원이 어떤 도덕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보여 주기 위해 1937년 5월 31일 서명한 그의 수많은 명령 가운데 하나를 옮긴다. “국방부인민위원 겸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1급 군 인민위원 Ya. B. 가마르니크를 현직에서 해임하고, 소련 국방인민위원부 군사평의회에서 제명하며, 군사파시스트 음모 가담으로 이제 당에서 제명된 야키르와 긴밀한 집단적 관계에 있던 자로서 붉은 군대에서 해임할 것.”
이 말을 쓴 사람은 얀 보리소비치 가마르니크와 이오나 에마누일로비치 야키르가 소비에트 군대 건설에서 한 뛰어난 역할을 알고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그들과 “긴밀한 집단적 관계”에 있었고 여러 해 동안 그들과 벗으로 지낸 사람이었다! 집안끼리 왕래하던 사이였다!..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누구도 사령관으로 임명할 수는 없다는 것, 사령관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현실은 몇 번이고 그를 올바른 이해 쪽으로 떠밀었지만, 스탈린은 고집스럽게 버텼다.
붉은 군대의 목을 친 직후부터 나라의 국방력에 뚫린 큰 구멍이 거의 곧바로 드러났다. 1938년 하산 호에서, 그리고 특히 1939~1940년 소련-핀란드 분쟁 때. 1940년 5월 보로실로프를 군에서 물러나게 해야 했다. 그러나 기병군 출신 말고는 누구도 붉은 군대를 이끌 수 있으리라고 아직 생각하지 못한 스탈린은 그 자리에 스탈린을 극도로 두려워하던 세묜 티모셴코를 앉혔다. 그 결과가 1941~1942년 전선의 비극이다.
1941년 7월 보로실로프는 다시 가장 중요한 지휘관 자리 하나에 올랐다. 그는 발트 지역과 레닌그라드 방어를 주 임무로 하는 북서 방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높은 자리는 다시 재앙이 되었다. 이번에는 나라 전체의 재앙이었다. 보로실로프는 현대 군사 작전에서 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다. 붉은 깃발 발트 함대의 비극은 그의 책임이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재가 없이 함대 주 기지를 탈린에서 크론시타트로 제때 철수시키도록 허락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철수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이 범죄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결국 철수는 탈린을 돌아 해안까지 나와 핀란드만의 좁은 항로를 불의 장벽으로 막은 독일군의 포구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그 항로에는 기뢰가 빽빽이 깔려 있었다. 기지의 기술자와 노동자, 그 가족, 발트 함대 수병들의 가족 등 수만 명을 태운 수송선 거의 모두가 만 바닥에 가라앉았다… 레닌그라드 접근로에서 벌어진 방어전에서도, 보로실로프가 즈다노프와 함께 맡은 도시 방어의 조직에서도 완전한 실패가 일어났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런 실패를 저지르고 군사재판을 피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로실로프는 공식적으로 꾸지람조차 듣지 않았다. 다만 보로실로프는 전선 지휘 업무에서 물러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지도자” 자리에는 남았다. 빨치산 운동 총사령관을 지냈고, 최고사령부(스타프카) 대표를 지냈다…
왜일까?
보로실로프는 내전과 붉은 군대의 역사를 스탈린주의식으로 해석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그는 상징으로 남았다. 전설이 된 사람, 그 전설을 지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이었다.
1956년에는 자신의 일흔다섯 번째 생일에, 1968년에는 소련군 창설 50주년에, 아마도 “인민의 영웅”, “전설적인 사령관”이라는 명성을 받쳐 주려고 보로실로프는 두 번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기계적으로 준 것일까? 그러나 이 높은 칭호에 관한 규정에는 1934년 이전의 지난 공로로는 누구도 이 칭호를 받을 수 없다고 아주 분명히 적혀 있다…
“주인”이 죽은 뒤에도 스탈린의 인민위원에게 무엇 때문에 상을 주었을까? 그는 왜 새 훈장을 받았을까? 공산주의 도덕과 인간의 양심은 어디로 갔나? 분명 그런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가장 나쁜 것은 승리에 눈이 멀어 그 승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인지 아무도 생각하려 하지 않을 때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겉으로만 그럴듯한 평온을 위해 역사를 날조할 때다. 인류의 가장 뛰어난 지성들도, 민중의 지혜도, 군대는 승리만이 아니라 패배에서도 배우고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에서 배워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군사사를 서술하는 거짓된 스탈린주의 틀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역사를 온전하고 근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기 패배와 실패를 비밀로 감추는 것은 너무 값비싼 일이다.
주석
- 옮긴이 주: 1935년 붉은 군대에 도입된 개인 계급이다. 지휘관은 소련 원수 아래로 1급·2급 군사령관(командарм), 군단장(комкор), 사단장(комдив), 여단장(комбриг), 정치 인민위원은 1급·2급 군 인민위원, 군단 인민위원, 사단 인민위원, 해군은 1급·2급 함대 기함(флагман флота)과 1급·2급 기함(флагман) 순이었다. 여기서 군단장·사단장·여단장은 직책이 아니라 이 계급을 가리킨다. 1940년 장군·제독 계급이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
- 옮긴이 주: “예조프의 고슴도치 장갑”(ежовы рукавицы)은 ‘아주 엄하게 다룬다’는 뜻의 관용구 «ежовые рукавицы»(고슴도치 가죽 장갑)에 예조프의 이름을 겹친 말장난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손아귀를 가리켰다. “보로실로프 사수”(ворошиловский стрелок)는 1932년부터 사격 실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준 휘장과 그 칭호다. ↩
- 옮긴이 주: 「장막」(Завеса)은 1918년 봄 브레스트-리톱스크 강화 뒤 독일군 점령선을 따라 세운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어 부대 체계로, 북부·서부 구역 등으로 나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