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 외교·국제활동 · 소련 · 외교
경력 연표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49, 1953–56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1984출당, 그리고 22년 뒤 복당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21.03–1926.01
- 정위원 1926.01–1957.06
1957.06 해임 · 「반당 그룹」 사건
관련 역사 사건
- 1917.02–072월 혁명수도의 볼셰비키2월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소수의 볼셰비키 지도자로 『프라우다』를 이끌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복무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인민위원회 의장1930년부터 정부 수반으로 계획 집행을 총괄했고, 1932년 우크라이나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었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소련 인민위원회의장, 공출 특사로 우크라이나에 파견1931년 12월 말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공출 할당 완수를 압박했다. 1932년 6월 '굶주림의 망령과 마주하더라도 공출 계획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 1937–1938대숙청정치국 승인자정치국 지도부의 일원으로 숙청 정책과 처형 명단 승인에 관여했다.
- 1939.08–1940.08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리트비노프 후임 외무인민위원, 조약 서명자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를 대신해 외무인민위원에 취임. 영불과의 삼국 협상을 이끌었고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 1939.11–1940.03겨울전쟁외교 · 강화조약 서명가을 교섭에서 국경 이동과 항코 조차를 요구했고, 헬싱키 폭격을 식량 투하라 부른 발언은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1940년 3월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국가방위위원회 부의장6월 22일 개전을 인민에게 알린 라디오 연설을 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반파시즘 연합 외교를 이끌었다.
- 1941–1944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소련 외교 대표1942년 5월 런던과 워싱턴에서 제2전선 개방을 요구하고, 미국의 약속과 영국의 유보를 협상했다.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외무인민위원으로 협상 실무를 총괄했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소일중립조약 서명자이자 파기 통보자1941년 4월 소일중립조약에 서명했고, 1945년 4월 5일 이를 파기 통보했으며, 8월 8일 사토 나오타케 주소 대사에게 대일 선전포고를 전달했다. 얄타 비밀의정서에도 서명했다.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소련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백분율 협정의 후속 협의에서 헝가리·불가리아 비율을 조정했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루마니아·불가리아 정부 승인 조건을 협상했다.
- 1944–1948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정부 재조직 3국 위원회의 소련 대표1945년 얄타 이후 해리먼, 클라크 커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 재조직을 협의하는 위원회의 소련 대표였다.
- 1944–1948루마니아: 8월 23일에서 인민공화국까지소련 외무인민위원1944년 9월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그로자 정부에 야당 각료 두 명을 추가하는 타협안에 합의했다.
- 1944–1949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소련 외무장관1944년 10월 휴전협정과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불가리아 문제를 다루었고, 1948년 2월 모스크바 회동에 배석했다.
- 1944–1949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소련 외무장관1945년 1월 휴전협정과 1947년 2월 파리 평화조약의 소련 측 책임자로 헝가리의 국경과 배상, 소련군 주둔 조건을 정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파리 회담 결렬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 회담에서 퇴장했다.
- 1945–19548월 혁명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소련 외무장관인도가 의장을 맡는 휴전 감시위원회를 제안했다.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규탄 서한의 공동 명의인스탈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당을 규탄하는 서한에 이름을 올렸다
- 1950–1953한국전쟁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의 일원으로 종전 방침에 동의한 외무상말렌코프·베리야와 함께 3월 19일 각료회의 결의에 참여했으며, 이후 정전 교섭의 외교적 방향을 조율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간부단의 지지베리야에 반대하는 간부단의 결의를 뒷받침했다.
- 1953헝가리의 새 노선소련 외무장관자급자족 목표와 레버이의 이념 독점을 비판하고 강제 협동조합 해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외무장관, 1939–1949, 1953–1956몰로토프는 파리 협정을 유럽 안보의 직접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미국을 배제한 집단안보로 NATO를 무력화하려던 구상이 서방에 거부되면서 바르샤바 조약의 배경이 되었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격하에 반대스탈린 평가와 새 노선에 반대했고, 1957년 반당 그룹으로 몰려 축출됐다.
- 1957반당 그룹 사건반당 그룹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으나 패배해 몽골 대사로 좌천됐다.
- 1975헬싱키 협정최초 제안자1954년 베를린 외상회의에서 범유럽 집단안보 조약을 제안하며 소련의 유럽안보회의 캠페인을 시작했고, 이는 헬싱키 협정까지 이어지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숙청 — 372개의 총살 명단, 가장 많은 서명
1937-38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였다. 그가 서명한 '총살 명단'은 기록상 372개였다. 스탈린(357개)보다도 많다. 명단 한 장에 수백 명의 이름이 올랐고, 정치국 지도부가 차례로 서명했다: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승인과 집행 사이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1938년 한 해에만, 몰로토프 내각의 각료(인민위원) 28명 중 20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자기 부하였던 룬주탁이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직접 확인하고서도, 몰로토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로모프에 대한 체포 건의가 올라오자, 몰로토프는 「저 놈 로모프를 즉시 체포하라」고 직접 적어 넣었다.
후일 흐루쇼프 시대의 시베르니크 보고서는 몰로토프가 스탈린과 함께 '근거 없는 대규모 정치 탄압의 조직과 실행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명시했다. 말년에 몰로토프는 추예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실수도 있었고, 지나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정책은 옳았다. 나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 — 서명 20분, 대가 4년
1939년 8월 23일 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크렘린에서 나치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맞이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가 같은 탁자에 앉다니.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몰로토프는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비밀 의정서는 동유럽을 분할했다.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베사라비아를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었다. 서명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이 조약을 인민외교위원으로서의 최대 성과로 여겼다. 소련은 2년간의 전쟁 준비 시간을 벌었고, 서부 국경을 수백 킬로미터 확장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조약을 찢어버렸다.
몰로토프는 평생 이 조약을 정당화했다: 「그것은 불가피했고, 올바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외교의 가장 냉소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전시 외교와 전후 국제질서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뒤 몰로토프는 국가방위위원회에 참여하고, 영국 및 미국과의 전시 동맹을 구축하는 외교를 맡았다. 그는 1941년 7월 영국과의 협정을 시작으로 연합국 협력을 제도화했으며,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소련의 군사·안보 요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이 외교는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면서, 전후 동유럽의 안전보장과 세력권을 둘러싼 경쟁을 동시에 준비하는 성격을 지녔다.
몰로토프는 테헤란, 얄타, 포츠담 회담과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독일의 무장 해제와 배상, 폴란드 국경, 동유럽 정부의 성격을 둘러싼 협상에서 소련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했고, 유엔 헌장 형성 과정에서는 강대국 간 합의를 지탱하는 외교를 수행했다. 따라서 그의 전시 외교는 단순한 개인적 반서방 노선이 아니라,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제도화하려는 국가 전략의 실무적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 전략은 동유럽의 자결과 소련의 안보권이 충돌하는 문제를 남겼다.
몰락과 불복: 반당 그룹, 좌천, 그리고 끝까지 바꾸지 않은 신념
스탈린 사후 몰로토프의 후반 생애는 권력에서의 몰락과 끝까지 이어진 불복으로 요약된다. 기존 장들이 다루지 않은 이 시기를 따로 정리한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뒤 말렌코프, 베리아, 몰로토프의 삼두정이 잠시 통치했고, 몰로토프는 3월 5일 외무장관에 다시 임명되어 베리아 제거와 이후 처형을 지지했다. 1956년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정부에 남은 가장 고위의 숙청 협력자였던 그가 구세대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6년 6월 그는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다. 1957년 6월 29일, 흐루쇼프 축출 시도가 실패한 뒤 그는 당 간부회에서 축출되어 몽골 인민공화국 대사로 좌천되었다. 그의 파벌은 처음 간부회 표결에서 7대 4로 흐루쇼프 축출을 가결했다고 전해지지만,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결정하지 않는 한 사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6월 22~29일 전원회의가 파벌을 패배시켰다. 패배한 그룹은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었으나, 스탈린 시대와 달리 육체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았다.
출당 시점은 사료가 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1961년 제22차 당대회 뒤 그가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출당되었으며 1962년에 당 서류가 파기되었다고 전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962년에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1984년에 복권되었다고 한다. 단일 연도로 확정하지 않는다.
1960년 그는 국제원자력기구 소련 대표로 임명되었고, 이는 부분적 복권으로 평가된다(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임기를 1960~1963년으로 본다). 제22차 당대회 비판에서 반당 그룹을 공격한 분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의 거의 네 배였고 가장 많은 비판이 몰로토프에게 집중되었다는 평가는 A. V. 피지코프의 견해로, 중립적 합의가 아니라 특정 연구자의 판단으로 제시한다.
은퇴 뒤에도 그는 스탈린 시대의 자기 역할에 불복했다. 1962년 1월 심장마비를 겪었고, 중소 분쟁 뒤에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마오쩌둥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비밀 영토 거래 주장을 계속 부인했고, 냉전을 하나의 국제적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일상적 대립으로 취급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 백과사전에 그에 관한 정보가 다시 실렸고, 1970년대 중후반에는 '반당 그룹' 언급이 빠졌다. 체르넨코는 그를 더 복권시켰고, 1984년 그는 당 가입을 다시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96세로 사망했으며 일곱 번의 심장마비를 겪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1917년 사건의 주요 참여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스탈린과의 공식 회의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은 그였다: 2,927회, 8,169시간으로 스탈린 공식 회의의 76.5퍼센트다. 이는 그를 주변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지로 규정할 근거이며, 동시에 탄압의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태도는 그 책임 문제를 지우지 않는다. 출당 연도와 1957년 표결 수처럼 사료가 엇갈리는 지점에서는 단일 수치 대신 출처를 밝힌 대안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