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86 ○ 자연사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57.06 해임 · 「반당 그룹」 사건

관련 역사 사건

대숙청 — 372개의 총살 명단, 가장 많은 서명

1937-38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였다. 그가 서명한 '총살 명단'은 기록상 372개였다. 스탈린(357개)보다도 많다. 명단 한 장에 수백 명의 이름이 올랐고, 정치국 지도부가 차례로 서명했다: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승인과 집행 사이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1938년 한 해에만, 몰로토프 내각의 각료(인민위원) 28명 중 20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자기 부하였던 룬주탁이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직접 확인하고서도, 몰로토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로모프에 대한 체포 건의가 올라오자, 몰로토프는 「저 놈 로모프를 즉시 체포하라」고 직접 적어 넣었다.

후일 흐루쇼프 시대의 시베르니크 보고서는 몰로토프가 스탈린과 함께 '근거 없는 대규모 정치 탄압의 조직과 실행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명시했다. 말년에 몰로토프는 추예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실수도 있었고, 지나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정책은 옳았다. 나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 — 서명 20분, 대가 4년

1939년 8월 23일 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크렘린에서 나치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맞이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가 같은 탁자에 앉다니.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몰로토프는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비밀 의정서는 동유럽을 분할했다.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베사라비아를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었다. 서명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이 조약을 인민외교위원으로서의 최대 성과로 여겼다. 소련은 2년간의 전쟁 준비 시간을 벌었고, 서부 국경을 수백 킬로미터 확장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조약을 찢어버렸다.

몰로토프는 평생 이 조약을 정당화했다: 「그것은 불가피했고, 올바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외교의 가장 냉소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전시 외교와 전후 국제질서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뒤 몰로토프는 국가방위위원회에 참여하고, 영국 및 미국과의 전시 동맹을 구축하는 외교를 맡았다. 그는 1941년 7월 영국과의 협정을 시작으로 연합국 협력을 제도화했으며,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소련의 군사·안보 요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이 외교는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면서, 전후 동유럽의 안전보장과 세력권을 둘러싼 경쟁을 동시에 준비하는 성격을 지녔다.

몰로토프는 테헤란, 얄타, 포츠담 회담과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독일의 무장 해제와 배상, 폴란드 국경, 동유럽 정부의 성격을 둘러싼 협상에서 소련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했고, 유엔 헌장 형성 과정에서는 강대국 간 합의를 지탱하는 외교를 수행했다. 따라서 그의 전시 외교는 단순한 개인적 반서방 노선이 아니라,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제도화하려는 국가 전략의 실무적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 전략은 동유럽의 자결과 소련의 안보권이 충돌하는 문제를 남겼다.

몰락과 불복: 반당 그룹, 좌천, 그리고 끝까지 바꾸지 않은 신념

스탈린 사후 몰로토프의 후반 생애는 권력에서의 몰락과 끝까지 이어진 불복으로 요약된다. 기존 장들이 다루지 않은 이 시기를 따로 정리한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뒤 말렌코프, 베리아, 몰로토프의 삼두정이 잠시 통치했고, 몰로토프는 3월 5일 외무장관에 다시 임명되어 베리아 제거와 이후 처형을 지지했다. 1956년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정부에 남은 가장 고위의 숙청 협력자였던 그가 구세대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6년 6월 그는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다. 1957년 6월 29일, 흐루쇼프 축출 시도가 실패한 뒤 그는 당 간부회에서 축출되어 몽골 인민공화국 대사로 좌천되었다. 그의 파벌은 처음 간부회 표결에서 7대 4로 흐루쇼프 축출을 가결했다고 전해지지만,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결정하지 않는 한 사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6월 22~29일 전원회의가 파벌을 패배시켰다. 패배한 그룹은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었으나, 스탈린 시대와 달리 육체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았다.

출당 시점은 사료가 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1961년 제22차 당대회 뒤 그가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출당되었으며 1962년에 당 서류가 파기되었다고 전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962년에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1984년에 복권되었다고 한다. 단일 연도로 확정하지 않는다.

1960년 그는 국제원자력기구 소련 대표로 임명되었고, 이는 부분적 복권으로 평가된다(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임기를 1960~1963년으로 본다). 제22차 당대회 비판에서 반당 그룹을 공격한 분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의 거의 네 배였고 가장 많은 비판이 몰로토프에게 집중되었다는 평가는 A. V. 피지코프의 견해로, 중립적 합의가 아니라 특정 연구자의 판단으로 제시한다.

은퇴 뒤에도 그는 스탈린 시대의 자기 역할에 불복했다. 1962년 1월 심장마비를 겪었고, 중소 분쟁 뒤에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마오쩌둥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비밀 영토 거래 주장을 계속 부인했고, 냉전을 하나의 국제적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일상적 대립으로 취급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 백과사전에 그에 관한 정보가 다시 실렸고, 1970년대 중후반에는 '반당 그룹' 언급이 빠졌다. 체르넨코는 그를 더 복권시켰고, 1984년 그는 당 가입을 다시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96세로 사망했으며 일곱 번의 심장마비를 겪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1917년 사건의 주요 참여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스탈린과의 공식 회의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은 그였다: 2,927회, 8,169시간으로 스탈린 공식 회의의 76.5퍼센트다. 이는 그를 주변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지로 규정할 근거이며, 동시에 탄압의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태도는 그 책임 문제를 지우지 않는다. 출당 연도와 1957년 표결 수처럼 사료가 엇갈리는 지점에서는 단일 수치 대신 출처를 밝힌 대안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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