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치하 동성애의 재범죄화: 새로운 사료, 새로운 답변
인물아돌프 히틀러, 보리스 니콜라옙스키, 니콜라이 부하린, 에른스트 룀, 예브게니 파슈카니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막심 고리키, 이반 아쿨로프,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슈바이처, 라자르 카가노비치,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카를 마르크스, 니키타 흐루쇼프, 블라디미르 레닌,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미하일 바흐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콜라이 크릴렌코, 파울 힌덴부르크, 카를 라데크, 이오시프 스탈린, 블라디미르 베흐테레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빌리 뮌첸베르크, 겐리흐 야고다 용어소련 남색죄 사건소련의 낙태 합법화·금지와 남색죄 재범죄화,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유럽의 성개혁 운동과 1930년대의 반동 (1885~1941)
초록
새로 발굴된 문서고 자료와 인쇄물을 활용하여, 이 글은 기존 역사서술의 핵심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스탈린 체제하 동성애의 재범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글은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가 새로운 남성 간 성행위 처벌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은 1930년대 초부터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선별적으로 기소되어 왔지만, 1933년 여름과 가을에 이들이 일관되게 기소된 것은 소비에트 국가 측의 조직적이고 커져가는 동성애 혐오의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와 파시즘을 결부시키려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운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 글은 또한 연대기를 확장하고 소비에트 동성애자들 자신의 경험에 더 주목하지 않고서는 동성애의 재범죄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917년 동성애의 비범죄화와 1922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형법(최초의 소비에트 형법)에서의 그 재확인 이후 동성애자들의 가시성은 높아졌고—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커져가는 자기 수용에 힘입어 더욱 심화되어—결국 비밀경찰의 주목을 끌었다.
1933년 8월,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 제4비밀정치부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은밀한 작전을 개시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8월 4일 첫 체포가 이루어졌고, 체포는 9월까지 이어졌다. 발레 예술가와 작가를 포함해 모두 198명의 남성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체포된 이들의 다수는 사무직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산업 노동자, 그리고 농민 출신으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1] 이들은 모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형법 58조에 따라 반혁명분자로 기소되었는데, 이 조항은 “반혁명 활동”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동성애가 이들의 반소비에트 행위의 주요 요소로 거론되었다. 남성 동성애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아직 도입되지 않았으나, 이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3년 레닌그라드 작전은 소비에트 역사상 동성애 남성을 겨냥한 탄압 가운데 알려진 것으로는 최대 규모다. 이 작전은 1933년 9월 당시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 수장 대행이던 겐리흐 야고다가 스탈린에게 보내 중간 결과를 요약한 악명 높은 보고서를 낳았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이 보고서의 발췌문은 분량은 짧지만, 이 비밀 작전을 언급한 유일한 공식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2] 지금까지 보고서 전문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주제를 다룬 기존 연구는 OGPU 보고서가 스탈린으로 하여금 남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새로운 형사 조항을 도입하도록 촉발했다고 본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소비에트 지도자는 그 권고에 동의했다. 보고서 첫 장에서 스탈린은 정치국 동료인 라자리 카가노비치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남겼다. “카가노비치 동지에게. 이 악당들은 마땅히 본보기로 처벌되어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지도적 법령을 우리 법제에 도입해야 한다.”[3] 1922년 동성애가 비범죄화된 지 12년 뒤인 1934년, 소비에트 각 공화국의 형법에 남성 간 성행위(muzhelozhstvo)를 처벌하는 조항이 도입되기 시작했다.[4] 러시아에서는 이 조항이 60년 뒤인 1993년 보리스 옐친 치하에서야 폐지되어, 스탈린주의 법률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철폐된 법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동성애의 재범죄화는 스탈린 치하에서 시행된 탄압적 개혁 가운데 연구가 가장 덜 된 사안으로 남아 있다. 1933~1934년에 동성애는 왜 다시 범죄화되었는가. 그 직전까지는 비범죄적 접근을 주장하는 학계의 판단에 힘입은 공적 관용이 있었는데도 말이다.[5] 이 전환을 누가 주도했으며, 어떤 요인이 당국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수십 년 동안 역사학자들은 이 물음들과 씨름해 왔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사생활이 존중되지 못한 점, 1930년대 초 여권 제도 도입 캠페인이 촉진한 “사회적 변칙”에 대한 투쟁, 소비에트 연방과 민족사회주의 독일 사이의 긴장을 강조해 왔다.[6] 실제로 193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사회주의자들은 동성애 혐의를 서로에 맞선 이념 투쟁의 무기로 사용했다.[7]
동성애의 재범죄화를 해명하려는 연구자들은 두 가지 주요 난점을 지적해 왔다. 첫째, 재범죄화에는 당국이 법률을 도입하기로 한 결정의 근거를 설명하거나 적어도 공식적으로 정당화해 줄 수 있었던 공개 캠페인이 수반되지 않았다.[8] 오히려 『대소비에트백과사전』(Bol'shaia sovetskaia entsiklopediia) 초판에 동성애 항목을 집필한 저명한 정신과 의사 마르크 세레이스키의 글은 당시 소비에트 국가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여 동성애를 형사 범죄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다루었다.[9] 동성애 항목이 실린 권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재범죄화가 이루어지기 3년 전인 1930년에 출간되었다. 이 정신과 의사는 동성애자를 겨냥한 법률을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고 불렀으며, 격렬한 반대의 뜻을 담아 “이 위선적인 규정들을 폐지하려는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언급했다.[10] 둘째, 연구자들은 재범죄화를 맥락화하려는 노력과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할 1차 사료의 실제 부재 사이의 간극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11] 동성애의 재범죄화와 관련된 모든 것은 기밀로 분류되었다.
이 글은 새로운 기록보관소 사료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출판물을 활용하여 동성애의 재범죄화 역사를 다시 검토하고, 이 법의 제정을 추동한 그간 숨겨져 있던 요인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이 법의 제정을 일관된 논리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동성애자들을 기소하려는 조직적 노력이라기보다, 대체로 관료제 내부의 전개에 이끌린 분절적인 과정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이 글은 공개 캠페인이 실제로 동성애의 재범죄화에 일조했음을 보여 준다. 그 캠페인은 소비에트 국가 내의 동성애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법 제정의 조건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락을 마련했다.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은 1930년대 초부터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선별적으로 기소되어 왔으나, 1933년 여름과 가을에 이들이 일관되게 기소된 일은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 지목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에 맞선 코민테른의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동성애와 파시즘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소련에서 동성애 관계를 재범죄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운동의 성격은 상당히 개인화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이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 지목한 네덜란드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1909–1934)의 동성애 혐의가 소비에트 언론에서 부각되고 매도되었다. 나치에 따르면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 배경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에게 그는 “성향”이 자연히 자신을 나치와 결부시키는 동성애자였다. 이 논문은 소련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를 겨냥해 벌인 공개 운동을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 수장 대행 겐리흐 야고다가 1933년 8월부터 9월까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는 구실로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점은 야고다가 이 체포를 단행하기 위해 별도의 공식 승인을 구하지 않고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략은 야고다 개인의 야심에 부응하는 것으로, 그가 자신의 경계심과 OGPU의 작전 효율성을 동시에 과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반판데르루버 운동은 1933년 소비에트 남성 동성애자 대량 체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논문은 또한 야고다 본인이 동성애의 재범죄화를 개시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12] 필자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에 대한 비밀 작전을 다룬 1933년 스탈린 보고서 전문은 야고다가 새 법률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RSFSR) 형법 58조(“반혁명 활동”)를 능숙하게 활용해 이들을 기소했음을 보여 준다. 이 1933년 보고서에 대해 스탈린이 카가노비치에게 별도의 법을 마련하도록 권고하며 친필로 남긴 지시는 정치적 불신뢰를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동성애 행위를 겨냥하는, 소련의 동성애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만약 야고다가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보내지 않았다면 스탈린 치하에서 동성애가 재범죄화되었을까? 아니면 남성 동성애자들은 “정치적”인 58조에 따라 반혁명분자로서 계속 체포되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기소는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 테러의 희생 실태를 폭로하면서 끝났을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1933년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분석하면 동성애의 재범죄화에 관해 보다 세밀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이 논문은 연대기를 확장하고 소비에트 동성애자들 자신의 경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동성애의 재범죄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3] 1922년 동성애가 비범죄화된 이후, 남성 동성애자들의 자기 수용이 늘어나면서 커진 가시성은 결국 비밀경찰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화된 동성애 공동체 가운데 하나였던 레닌그라드의 동성애 공동체가 법 집행 당국의 감시 초점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 보여 주겠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 남성은 1933년 대량 체포 이전인 1930년대 초에 이미 OGPU에 의해 자의적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와 코민테른의 캠페인
1933년 2월 27일 월요일 저녁,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정부 청사이자 베를린 한복판에 자리한 국가적 상징인 국회의사당이 화염에 휩싸였다.[14] 이 화재가 같은 해 나치의 권력 장악을 위한 구실이 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화재 이튿날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흔히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통하는 “인민과 국가 보호를 위한 법령”을 공포했다. 새 법은 정부 수반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치의 적대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누구든 기소할 권한을 주었고,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스물네 살 네덜란드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어 즉시 자백했다. 판데르루버는 자신이 단독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으나, 나치 지도자들은 그를 봉기를 일으키려는 더 큰 공산주의 음모의 일부로 묘사했다.[15] 판데르루버는 앞서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이었고, 공산주의 활동가로서 지역 경찰에 알려져 있었다.[16]
1931년에 당을 떠났음에도 나치 수사관들은 신뢰할 만한 증거가 없는데도 그를 공산주의자들과 손쉽게 연결지었다.
이 글에서 나는 방화를 둘러싼 여러 가설, 곧 판데르루버가 나치에게 누명을 뒤집어썼는지, 괴짜로서 단독으로 행동했는지, 아니면 공산주의 이력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파고들지 않겠다. 내 목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판데르루버의 동성애 혐의가 소비에트연방의 안팎에서 나치에 맞서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에서 핵심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당국은 판데르루버를 타락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수백만 시민에게 내세웠는데, 그중 대부분은 소비에트 중앙 언론에서 “동성애자”나 “남성 동성애자” 같은 용어를 그런 규모로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더 나아가 공산주의자들은 판데르루버의 동성애가 그를 돌격대(SA) 및 나치와 이어 주었으며, 그가 국회의사당에 방화함으로써 나치의 이익에 봉사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동성애와 나치즘의 이러한 연결은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을 기소하는 데 이용되었고, 뜻밖에도 소비에트연방에 남성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조항이 도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반나치 캠페인의 중심에 동성애를 놓기로 한 결정은 1931년과 1932년에 돌격대 지도자 에른스트 룀과 관련해 벌어진 일련의 스캔들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룀은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지 않았다.[17] 1920년대에 룀은 독일의 동성애 단체인 인권동맹의 회원이었고 베를린의 퀴어 바를 자주 드나드는 단골이었다.[18] 1931년, 룀이 이미 돌격대 참모장이었을 때 그가 정신과 의사이자 동성애 권리 옹호자인 카를귄터 하임조트와 주고받은 서신이 좌파 언론에 유출되었다.[19] 편지에서 룀은 수치심이나 자기 비하 없이 자신의 동성애를 이야기했다. “나는 내 성향 때문에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 그것이 때때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왔음에도 그렇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20]
이 스캔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룀의 입지가 약화되거나 나치의 인기가 뚜렷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치 지도자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로 그리는 좌익 언론의 하나의 전형이 이때 확립되었다. 룀이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찬양했던 남성적·군사적 남성성에 대한 강조는 동성애 혐의로 무너뜨려지리라 기대되었다.[21]
판데르루버에 대한 사건을 꾸미는 과정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은 앞서 형성된 그 흐름을 활용했다. 판데르루버를 동성애자로 묘사하고, 동성애자 나치들로 이루어진 음모 집단이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한 핵심 문헌은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이었다. 이 책은 정교하게 짜인 반선전 서사를 제공한다. 24개 언어(러시아어 포함)로 번역된 『갈색책』은 독일 공산주의 선전의 책임자이자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빌헬름 뮌첸베르크가 이끈 운동의 산물이었다.[22] 이 책의 러시아어 번역본은 1933년 9월 21일 이른바 라이프치히 재판이 시작된 것과 때를 같이하여 1933년 9월에 출간되었는데, 이러한 시기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재판에는 판데르루버뿐 아니라 공산주의자 에른스트 토르글러, 블라고이 포포프, 바실 타네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도 공범 혐의로 끌려들었다. 그러나 판데르루버와 달리 이들 모두는 소비에트 언론에서 적극적인 지지와 변호를 받았다. 러시아어판 『갈색책』에는 일련의 소규모 출판물이 능숙하게 덧붙여졌다. 예컨대 판데르루버의 동성애를 다룬 대목을 포함하여 책에서 발췌한 장들을 담은 소책자가 그러했다.[23] 또한 권위 있는 소비에트 법률 잡지 『소비에트 법학』(Sovetskaia iustitsiia)은 판데르루버에 관한 익명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판데르루버의 동성애가 그를 나치의 앞잡이로 만들었다는 책의 핵심 논지를 강조하며 『갈색책』을 홍보했다. “그는 동성애자이며, 민족사회주의자들과의 결탁은 바로 이 요인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24]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소비에트 시민들은 동성애에 관한 포괄적인 서술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분명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었다.[25] 이런 일이 사실은 더 이른 시기에도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1920년대에 일부 소비에트 의학 전문가들은 동성애를 해로운 사회적 및/또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규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의료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학술 연구에 근거 짓고자 했으며, 대체로 성적 지향을 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결하는 것을 삼갔다. 더욱이 이 시기에 동성애에 관한 학술 논저는 그처럼 광범위하게 대중화되지 않았다. 그보다 그러한 논저들은 사실상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제시하는 틈새 문헌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널리 유포된 뮌첸베르크의 소책자는 다른, 다소 조작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갈색책』에 묘사된 판데르루버는 하나의 원형이다. 농민인 어머니에게서 길러진 그의 ‘소시민적’ 배경과 ‘원시적’ 신앙심이 그를 동성애 쪽으로 ‘미리 기울게’ 만들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그로 하여금 나치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판데르루버의 동성애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독일을 여행하는 동안 민족사회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바로 이 토대 위에서였다. [...]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체질상 동성애자이다. 그는 여성적인 기질을 드러내며, 여성에 대한 그의 태도가 소심함과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음은 수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나아가 남성에게서 애정과 다정함을 얻으려는 성향 또한 기록되어 있다.[26]
이 텍스트는 판데르루버가 룀과 가까웠던 것이 두 사람이 공유한 “성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명시하는데, 이 성향은 도덕적으로 병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당대 의학·법률 전문가들이 논의한 동성애에 관한 심리학적·의학적 견해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놀랍게도 이는 책의 다른 대목과 어긋난다. 그 대목에서는 퀴어 시민권 운동의 선구자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업적을 대단히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동성애에 대한 견해가 훨씬 복잡다단하고 계속 변화해 가던 학자들인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해블록 엘리스를 존중하는 어조로 언급한다. 『갈색책』의 러시아어판은 나치가 성과학연구소—히르슈펠트가 이끌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 연구소이자 진료소”—를 철거한 일을 상세히 다룬다. “비교할 대상이 없는 독특한 소장품과 방대한 연구 기록물 및 도서관 덕분에 이 연구소는 국제적 명성과 인정을 얻었다. 수많은 외국 학자와 의사, 작가들이 이 연구소에서 일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27] 이러한 불일치는 『갈색책』의 제작자들이 동성애에 관한 학술 이론을 다룰 의도가 없었고, 이 주제에 대한 과학계의 보다 폭넓은 관점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들은 동성애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명시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시했을 뿐이다. 『갈색책』의 제작자들은 판데르루버를,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이념적 경쟁자로서의 민족사회주의자들을 고발하는 일에 골몰했다. 그들은 이 캠페인이 완벽한 정합성을 갖추도록 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성애를 도덕적 타락과 동일시하고 동성애자에게 은밀함, 유약함, 거짓말하는 경향 같은 특정한 부정적 자질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은 동성애를 둘러싼 기존의 고정관념을 강화했다. 따라서 이 캠페인의 일부 요소들은 매끄럽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에른스트 룀을 두고 “유약한” 성격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갈색책』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3년 9월 10일 소비에트 정부의 공식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제1면에 실린 기사에서도 선전되었다. 라이프치히 재판이 열하루 뒤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만큼, 이 시점이 우연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유르(Iur)라는 필명으로 서명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라는 제목의 기사는 신문 제1면에 실렸다.[28] 이 글에서 유르는 『갈색책』가 판데르루버의 성적 성향에 관한 세부 사항을 왜 담았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성향은 공개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수수께끼를 탐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이상,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판데르루버의 “병리적 성향”이 그를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일부 구성원과 친밀하게” 연결했다고 주장한다. 유르는 19세기 독일사에 관한 논의로 글을 맺으면서 “독일 귀족 계급은 깊이 침식되고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지적한다. 유르에 따르면 동성애는 귀족 계급의 주요 결함 가운데 하나였다. 동성애를 통탄할 만한 특성으로 규정한 자신의 비난을 강화하기 위해, 저자는 공산주의의 경전, 즉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서신을 인용한다. 독자에게는 1869년 6월 22일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구절이 제시되었다. 이 편지 전문은 1931년 두 사람의 서신집 가운데 한 권에 러시아어로 이미 출간된 바 있었다.[29]
자네가 보내 준 그 「우르닝」은 참 기묘한 물건이로군. 이건 그야말로 지극히 반자연적인 폭로일세. 남색가들이 머릿수를 세기 시작하더니, 자기들이 국가 안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룬다는 걸 알아냈다는 거야. 조직만 없었는데, 이걸 보면 그것도 이미 은밀히 있는 모양일세. 그리고 옛 정당이든 새 정당이든 모든 당에, 뢰징에서 슈바이처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대단한 인물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들의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지. … 우리가 개인적으로 너무 늙어서, 이 당이 이기더라도 승자들에게 몸으로 공물을 바치게 될까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세.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나저나 이런 녀석이 나타나 그 추잡한 짓을 이론으로 바꾸어 놓고… [30]
이어서 유르는 이렇게 맺는다. “이것은 64년 전에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쓴 글입니다. 이 편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31] 『갈색책』와 그에 딸린 소책자, 그리고 유르의 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1933년 9월 라이프치히 재판이 시작되자 소비에트 언론은 재판 과정을 광범위하게 보도하면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와 그가 동성애자라는 혐의를 직접 거론했다.[32]
그것은 판데르루버를 룀의 연인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묘사하고, 그가 방화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유르의 글도 엥겔스의 편지도 소련에서 동성애가 재범죄화된 맥락에서 학자들이 검토하거나 분석한 적이 없다. 그러나 수백만의 소비에트 시민이 이 자료들을 접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중 한 사람이 출판사 아카데미야에서 일하던 번역가 니콜라이 류비모프(1912–1992)다. 그는 193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암살을 모의한 혐의를 받는 “반소비에트 분자”로 체포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류비모프는 수도에서 벌어진 동성애자 탄압의 첫 희생자들을 만났는데, 그 탄압은 동성애 재범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1970년대에 쓴 회고록에서 류비모프는 이즈베스티야 기사를 읽었던 일, 그리고 나중에 감옥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비밀 기소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과 연결 지었던 일을 회상했다.
남색자들 또한 불법의 희생자가 되었다. 당분간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았으며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사설 주택에서 모임을 열어 클럽을 대신하기까지 했다. 1933년 9월 10일,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라는 제목의 글이 이즈베스티야에 실렸다. 첫 면 하단에 실린 이 글의 저자는 유르라는 필명으로 자신을 숨겼다. 글에서 그는 『갈색책』에 의거해,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 기소된 판데르루버가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병리적 성향이 그를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일부 인사들과 긴밀히 연결해 주었다”고 주장한다.[33]
이 캠페인 동안 당국은 소비에트 동성애자들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캠페인은 이후 소련에서 동성애가 재범죄화되는 토대를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는 여론의 추동력을 이용했고, 그 결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수백 명의 남성 동성애자가 체포되었다. 그중 대다수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았다. 1922년 동성애 비범죄화를 목격했던 많은 이들은 여전히 볼셰비키 국가가 이 문제에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을 하겠다고 내세운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