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치하 동성애의 재범죄화: 새로운 사료, 새로운 답변
인물아돌프 히틀러, 보리스 니콜라옙스키, 니콜라이 부하린, 에른스트 룀, 예브게니 파슈카니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막심 고리키, 이반 아쿨로프,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슈바이처, 라자르 카가노비치,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카를 마르크스, 니키타 흐루쇼프, 블라디미르 레닌,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미하일 바흐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콜라이 크릴렌코, 파울 힌덴부르크, 카를 라데크, 이오시프 스탈린, 블라디미르 베흐테레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빌리 뮌첸베르크, 겐리흐 야고다, 미하일 쿠즈민, 리우리크 이브네프, 니콜라이 류비모프, 라인하르트 마우라흐, 세르게이 불라토프, 에른스트 토르글러, 블라고이 포포프, 바실 타네프, 마르크 세레이스키, 니콜라이 쿠르샤코프, 카를귄터 하임조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해블록 엘리스 용어소련 남색죄 사건소련의 낙태 합법화·금지와 남색죄 재범죄화,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유럽의 성개혁 운동과 1930년대의 반동 (1885~1941)
겐리흐 야고다의 메모: 전문이 드러내는 것
1933년 9월 15일,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에 관한 유르의 기사가 이즈베스티야 1면에 실린 지 닷새 뒤, 야고다는 스탈린에게 세 쪽짜리 메모를 보냈다. 1993년에 이 메모의 몇 구절이 러시아의 한 학술지에 공개되었다.[69] 그러나 보고서 전문은 역사가들이 한 번도 검토한 적이 없었는데, 대통령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고 그곳이 일반과 학자들에게 폐쇄되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글을 발견한 것은 1998년에 비밀 해제되어 러시아 국립현대사 문서보관소(RGANI)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동성애 재범죄화를 더 세밀하게 재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70] 댄 힐리는 야고다가 동성애 남성에 대한 법적 조치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71] 그러나 보고서 전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 글은 왜 작성되었는가? 그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야고다의 메모는 스탈린에게 직접 보낸 것이었다(그림 3). 시작은 평범하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남성 동성애 조직이 존재한다는 비밀경찰 자료에 근거하여,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는 체포를 단행하였다. 이어 수사 결과 이 조직은 배우, 사무직 종사자, 그리고 노동자 출신의 일부 반사회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지도부는 귀족과 전직 백군 장교로 이루어져 있다.”[72] 체포된 남성들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야고다는 레닌그라드에 열두 개, 모스크바에 또 열 개의 “남성 동성애 살롱”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살롱”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일들을 간단히 언급한다. “조직적인 상습 술자리(p'ianka), 난교, 집단 합숙, 그 밖의 각종 타락이 있었고, 마약을 쓰고 여성 복장을 하기도 했다.”[73] 야고다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이 청년에게 끼친 “악성 영향”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나쁜 본보기에 그치지 않았다. 심리적 조종과 술을 통해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은 “[청년들을] 남성 동성애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메모의 다음 부분은 동성애자들의 “배신적 본성”에 초점을 맞춘다. 야고다는 이 남성들과 독일·핀란드·노르웨이 외교 공관 관리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된 유착 관계를 스탈린에게 알린다. 독일 대사관은 실제로 두 사람의 심문 과정에서 언급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발사로, 그곳에 단골손님이 있었다.[74] 다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프로, 구금자 거의 200명 가운데 독일 대사관 직원들과의 이른바 “접촉”에 관해 상세히 진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직원들을 “남성 동성애자”라고 표현했다.[75] 그는 또 자신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소비에트의 “남성 동성애자”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연줄이 있다고 짤막하게 언급했다. 소비에트 동성애 남성들과 외국 대사관의 관계가 어떤 성격인지는 심문 진술에서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러나 야고다에 따르면 그러한 접촉이 실재했든 조작되었든, 접촉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첩보 활동의 기회가 열릴 수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로프는 유일하게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흥미롭게도 야고다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꼼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포함시킨 노르웨이·핀란드 대사관은 레닌그라드 사건과 관련된 심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어서 야고다는 지금까지 체포된 130명 가운데 74명이 “특권 계급 출신”이라고 거짓 단언하고, 그 뒤에 “조직의 활동적 구성원” 명단을 붙인다. 야고다가 거명한 열두 사람 가운데 일곱은 레닌그라드, 다섯은 모스크바 출신이었다. 야고다가 동성애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강조했음에도, 레닌그라드 사건의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 기록은 이 주장과 분명히 어긋난다. 체포된 사람들의 출생지와 사회적 신분을 보면 귀족 가문 출신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농민이나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다. 야고다는 자신의 보고가 지닌 의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상투적 문구로 보고서를 맺는다. “추가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흔히 그렇듯 스탈린의 사건 처리 방침은 문서 첫 장에 두드러지게 적혀 있다. “카가노비치 동지에게. 이 악당들은 본보기로 처벌되어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지도적 법령을 우리 법제에 도입해야 한다.”[76]
그림 3. 겐리흐 야고다가 스탈린에게 보낸 메모의 첫 장. 스탈린의 친필로 “이 악당들은 본보기로 처벌되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 RGANI, f. 3, op. 57, d. 37, l. 19.
야고다는 시의적절하게도 잠재적으로 위험한 음모(여럿 가운데 하나)를 성공적으로 “적발”했는데, 이 사건은 당시 소련이 국제 무대에서 추구하던 목표와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야고다는 스탈린주의 국가에서 모범적인 고위 톱니바퀴 역할을 했다. 그는 소련의 국제적 의제에 맞추어 음모를 꾸며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능숙하게 폭로하고 처리했다. 게다가 그는 스탈린의 눈에 띄어야 할 개인적 동기도 지니고 있었다. 1933년 당시 OGPU 대리 수장으로서 야고다의 지위는 견고해 보였지만, 그는 그 직위를 공식적으로 맡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OGPU 제2부수장이었고, 공식적으로는 불치병을 앓던 뱌체슬라프 멘진스키가 1934년 5월 사망할 때까지 기관의 책임자 자리에 남아 있었다.[77]
야고다의 경쟁자였던 이반 아쿨로프가 1932년 면직된 뒤로 제1부수장이라는 막강한 자리는 계속 공석이었다.[78]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과 판데르루버를 둘러싼 공개 캠페인을 야고다가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이것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동성애가 점점 눈에 띄게 드러나는 문제를 다룰 명분이었을 뿐 아니라, 스탈린의 총애를 얻고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기관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조치이기도 했다. 동성애의 가시성 증가는 이미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우려 사항이 되어 있었다. 주목할 점은, 야고다의 보고서에는 판데르루버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데르루버에 대한 캠페인과 1933년 동성애자 탄압(새 법으로 귀결된)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를 주장하려면 현재 확보된 것보다 더 명시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판데르루버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다. 야고다는 위로부터의 직접적 명령에 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 작전을 “반혁명분자”에 대한 일상적 단속의 일부로 성격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권한 밖인 외교 문제에 간섭하는 인상을 피했다. 판데르루버에 대한 캠페인과 모스크바·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에 대한 캠페인이 나란히 전개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그 동시성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야고다 보고서의 전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댄 힐리는 자신의 연구에서 야고다의 보고서(당시에는 전문을 입수할 수 없었다)와, 이후 동성애 재범죄화를 둘러싼 논변의 변화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지적한다. 보고서에서 야고다는 첩보 활동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살롱, 중심지, 소굴, 집단, 그리고 그 밖의 조직화된 남성 간 성행위자 결성체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이 조직들을 결국 노골적인 첩보 세포로 전환시키는 일이다.”[79] 힐리는 동성애 재범죄화 및 반동성애 조항 초안 작성과 관련된 문서에서 후대의 당국자들이 첩보 활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문제 삼는다.[80] 이 불일치는 한편으로는 OGPU와 야고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이 동성애를 대하는 접근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야고다가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보낼 때 새로운 입법을 제안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OGPU와 야고다가 동성애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집중된 반혁명적 집단 활동의 일부로 규정한 반면, 스탈린은 더 넓은 인구 전체에서 동성애 관계를 보다 체계적이고 일률적으로 다루기 위한 별도의 법률을 주장했다.[81] 애초에 야고다와 비밀경찰에게 동성애자들은 당시 통제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도시 지형에서 눈에 띄는, 골칫거리 공동체였다. 야고다의 견해에서 “무고한 자들”을 “유혹”하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핵심 집단”은 공공 복지에 대한 주된 위협이자, 물론 첩보 활동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첩보라는 혐의는 스탈린 통치기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야고다의 보고서에 스탈린이 남긴 “입법에 새로운 지침을 도입할 것”이라는 언급은 다른, 더 확장적인 접근을 시사하며, 간헐적인 비밀 기소 물결이 일회성 조치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30년대 이후 학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공식 문서에서 소비에트 동성애자와 파시즘을 연결하는 관념은 사라지고, 이후 사료에는 그 흔적이 남지 않는다.[82]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소비에트 언론은 파시즘과 동성애의 연관성을 다시 끌어냈으나, 소비에트 내부의 동성애에 관해서는 눈에 띄게 언급을 피했다.[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