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누스 히르슈펠트

Magnus Hirschfeld
독립 활동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68–1935 → 망명 중 사망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와 성과학 연구소를 세워 성개혁 운동을 이끈 독일의 성과학자

1919년 베를린에 세계 최초의 성과학 연구소를 열고 1928년 세계 성개혁 연맹을 세웠으나, 1933년 5월 나치 학생들이 연구소를 약탈해 장서를 분서의 불길에 던졌다.

프로이센 콜베르크의 유대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의사·성과학자. 1897년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인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를 세워 형법 제175조 폐지 운동을 이끌었고, 모든 사람이 남녀 특성의 고유한 혼합이라는 성적 중간 단계론을 폈다. 1919년 베를린에 세계 최초의 성과학 연구소를 열고 1928년 세계 성개혁 연맹을 세웠다. 1931년 세계 강연 여행을 떠난 뒤 독일로 돌아오지 못했고, 1933년 5월 나치가 연구소를 약탈해 장서를 불태웠다. 1935년 망명지 니스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위원회와 성적 중간 단계론

프로이센 콜베르크의 유대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892년 베를린에서 의학 박사가 되었다. 1897년 5월 15일 샤를로텐부르크의 자기 집에서 출판인 막스 슈포어 등과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를 세워 위원장이 되었고, 남성 사이의 성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제175조를 없애라는 청원을 냈다. 이 청원은 이듬해 아우구스트 베벨이 제국의회에 올렸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1899~1923년 《성적 중간 단계 연감》을 펴내며, 모든 남녀가 남성적·여성적 특성의 고유한 혼합이라는 「성적 중간 단계론」으로 동성애를 처벌할 수 없는 타고난 변이로 설명했다. 1907~1909년 오일렌부르크 사건 재판에 감정인으로 나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1910년 『트랜스베스타이트』로 이 말을 처음 만들었다.

성과학 연구소, 세계 성개혁 연맹, 망명

1919년 7월 6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에 세계 최초의 성과학 연구소를 열었고, 같은 해 동성애를 다룬 첫 영화 〈다른 이들과 다르게〉에 자문하고 직접 출연했다. 1921년 베를린에서 국제 성개혁 대회를 열었고, 1928년 코펜하겐에서 세계 성개혁 연맹을 세워 공동 의장이 되었다. 우생학의 언어를 받아들였지만 강제가 아니라 계몽·피임·임신중절 합법화로 이루려 했고, 나치의 인종 위생과 안락사는 단호히 거부했다. 1920년 거리에서 민족주의 활동가들에게 심하게 맞아 경찰이 처음에 죽었다고 여길 만큼 다치는 등 민족주의자와 나치의 표적이 되었고, 1926년에는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찾았다. 1929년 위원회 안의 반대파에 밀려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1931년 미국 강연 여행을 시작으로 세계를 돈 뒤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고, 1933년 5월 6일 나치 학생들이 연구소를 약탈해 장서를 나흘 뒤 분서에서 태웠다. 파리에서 연구소를 다시 세우려다 실패하고 1935년 67번째 생일에 니스에서 숨졌다. 망명 중 나치 인종론을 반박한 원고는 사후 『인종주의』(1938)로 나왔다. 묘비에는 “과학을 통해 정의로”라는 그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동료와 지지자

히르슈펠트에게는 맞선 사람들만큼 오래 곁을 지킨 동료도 많았다. 1897년 위원회를 함께 세운 출판인 막스 슈포어는 『사포와 소크라테스』(1896)를 비롯한 그의 초기 저작을 펴냈고, 의사 게오르크 메르츠바흐는 1905년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부위원장을 지냈다. 1898년 아우구스트 베벨은 그의 폐지 청원을 제국의회에 올렸다.

1919년 성과학 연구소는 피부과 의사 프리드리히 베르트하임, 정신의학자 아르투어 크론펠트와 함께 열었고, 크론펠트는 1926년까지 수석 의사로 일한 가장 중요한 협력자였다. 루트비히 레비렌츠와 펠릭스 아브라함은 1931년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성확정 수술을 했고, 막스 호단은 1929년까지 성 상담소를 이끌었다. 쿠르트 힐러는 1908년 그가 직접 위원회로 끌어들인 사람으로, 1926년 그의 제안으로 「성형법 개혁 연합」의 대안 초안을 다듬었다. 1929년 그가 물러난 뒤 위원장이 된 정신의학자 오토 율리우스부르거도 여러 해 연구소와 긴밀히 일한 동료였다. 여성운동에서는 헬레네 슈퇴커와 아니타 아우크스푸르크 등 시민계급 급진파와 손잡았다.

국제적으로는 해블록 엘리스, 오귀스트 포렐과 함께 세계 성개혁 연맹을 이끌었고, 노먼 헤어는 1923년 엘리스의 소개장을 들고 연구소를 찾아온 뒤 오랜 동지가 되었다. 사생활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카를 기제가 함께 살며 연구소 기록보관소를 맡았고, 1931년 상하이에서 만난 의대생 리스우퉁(Li Shiu Tong)은 망명 생활을 자기 재산으로 뒷받침했다. 1920년 동성애자 운동의 첫 노래 〈보랏빛 노래〉(Das lila Lied)는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이자 벗」인 그에게 헌정되었고, 그가 죽자 헤어·호단·힐러가 추도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