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학 연구소의 성 상담소를 이끌며 노동자 청년에게 성교육을 편 독일의 사회주의 의사
1933년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게슈타포에 붙잡혔다가 망명했고, 1937~1938년 국제여단의 군의관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다.
슐레지엔 나이세 출신의 의사·성교육자.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 보건소장으로 일하며 1926~1929년 성과학 연구소의 성 상담소를 이끌었고, 노동자 청년에게 성교육을 펴며 산아 제한과 동성애 처벌 폐지를 주장했다.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난 뒤 소련 벗들의 동맹 의장 등을 지냈다. 1933년 국회의사당 화재 뒤 게슈타포에 붙잡혔다가 망명했고, 1937~1938년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으며 1946년 스톡홀름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성교육과 망명
슐레지엔 나이세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말에는 노동자·병사 평의회에서 일했다. 1915년 히르슈펠트를 만났고, 카우츠키 집안의 토론에서 사회주의에 눈떴다. 1917년 레오나르트 넬존의 국제청년동맹을 함께 세웠고,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22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으나 1926년 국제청년동맹 회원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뒤 다시는 정당에 들지 않았다. 1922~1933년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의 보건소장을 지냈고, 1923년 베를린 첫 어머니 상담소를 열었다. 1926~1929년 성과학 연구소의 성 상담소와 우생학 부서를 이끌며 공개 질의응답의 밤을 열었다. 1928년 소련 벗들의 동맹 의장이 되었고, 1927년부터 국제노동자구호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나 1931년 소련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우생학을 사회주의 사회의 과제로 보는 당대 좌파의 생각을 공유했다. 『성과 사랑』(1927) 같은 성교육서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압수되었고, 나치 신문은 그를 조롱하는 별명으로 공격했다. 1933년 국회의사당 화재 뒤 체포되어 6월까지 보호 구금되었다가 11월 스위스로 망명했고, 1935년 국적을 박탈당했다. 1937~1938년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고, 1946년 스톡홀름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