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en-Eulenburg-Affäre · 1906.11.17–1909

오일렌부르크 사건

Harden–Eulenburg affair

1906~1909년 언론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빌헬름 2세의 측근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와 그 주변 「리벤베르크 서클」을 동성애자 집단으로 공격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재판과 추문. 독일 제국 최대의 스캔들로, 동성애와 형법 제175조를 둘러싼 공적 논쟁을 터뜨렸다.

상세

오일렌부르크는 1886년부터 젊은 빌헬름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고, 그의 영지에 모이는 「리벤베르크 서클」은 황제 주변의 비공식 권력으로 여겨졌다. 실각한 비스마르크는 이 모임을 「남색꾼들의 카마릴라」라 불렀고, 하르덴에게 처음 정보를 흘린 것도 그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비스마르크 숭배자이자 대외 강경파였던 하르덴은 1905년 1차 모로코 위기에서 황제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무릅쓰지 않은 것을 이 모임 탓으로 보았다. 누가 그를 부추겼는지는 논쟁거리다. 외무부의 「회색 추기경」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이 거론되고, 역사가 페터 빈첸은 오일렌부르크가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의심한 뷜로 총리가 자료를 넘겼다고 본다. 한 역사가의 평대로 하르덴은 동성애 혐의만큼 추문을 일으키기 좋은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6년 11월 17일 하르덴은 《미래》에 오일렌부르크를 「하프 연주자」로, 그의 연인 쿠노 폰 몰트케를 「귀염둥이」로 빗댄 글을 실었다. 오일렌부르크는 스위스로 피했다가 1907년 1월 흑독수리 훈장을 받으러 돌아왔고, 하르덴은 4월 공격을 재개했다. 5월 3일 황태자에게서 이 일을 들은 황제는 린나르·호에나우와 쿠노 폰 몰트케 등 측근의 퇴진을 요구했고,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하면서 추문이 터졌다. 오일렌부르크는 친분 있는 검사에게 스스로를 고발해 무혐의를 받았다. 히르슈펠트는 6월 《미래》에 제175조 폐지를 호소하는 글을 실었다.

1907년 10월 쿠노 폰 몰트케가 하르덴을 고소한 첫 재판에서 그의 전처가 증언했고, 감정인 히르슈펠트는 그에게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동성애적 기질」이 있다고 진술해 하르덴이 무죄를 받았다. 11월 아돌프 브란트는 뷜로 총리를 동성애자로 지목했다가 1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는데, 이 재판에서 오일렌부르크는 제175조를 어긴 적이 없다고 선서했다. 1907년 12월~1908년 1월 재심에서는 히르슈펠트가 증언을 철회해 하르덴이 징역 4개월을 받았다. 그러자 하르덴은 1908년 4월 뮌헨에서 꾸민 소송을 열어 우유 장수와 어부가 젊은 시절 오일렌부르크와 관계했다고 증언하게 했다. 오일렌부르크는 위증죄로 체포되어 6월 29일 재판에 섰으나 병으로 쓰러져 재판은 1909년 무기한 연기되었다. 1909년 4월 세 번째 재판에서 하르덴은 벌금 600마르크를 받았고, 하르덴이 상고를 거두는 대가로 뷜로는 소송 비용 보전 명목의 재상청 비밀 자금 4만 마르크와 명예 회복 서한을 건넸다.

1908년 11월 14일, 장교단 「정화」를 지휘하던 군사 내각 수장 디트리히 폰 휠젠헤젤러가 황제를 위한 도나우에싱겐 성 사냥 모임의 저녁 여흥에서 여주인의 발레 치마와 깃털 모자 차림으로 황제와 손님들 앞에서 왈츠를 추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다. 동성애 추문으로 장교단이 거센 압박을 받던 때라 군은 사인을 감췄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황제는 신경 쇠약에 빠졌다. 오일렌부르크의 아내는 히르슈펠트에게 「남편을 때리지만 노리는 것은 황제」라고 말했다. 황제는 「평화로운 빌헬름」,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고 벗들을 버렸으며, 이후 군사 쪽 조언자들에게 기울었다. 뷜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까지 겹쳐 1909년 7월 물러났다. 하르덴은 「카마릴라를 무너뜨렸다」며 승리를 자처했으나, 훗날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실수라고 했다. 사건은 동성애를 처음으로 공론장에 끌어냈지만 「박해의 유행」이라 불릴 만큼 혐오를 키웠다. 전쟁장관 카를 폰 아이넴은 1907년 11월 29일 제국의회에서 동성애자 장교들에게 전역을 요구했고, 히르슈펠트는 그를 찾아온 이들 일부의 자살을 막았다. 1909년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제175조 유죄 판결이 늘었고,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의 뮌헨 지부는 1908년 해산했으며, 반더포겔도 「소년애자 클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르덴과 그 변호사가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공격도 거셌다. 역사가 볼프강 비퍼만은 유대인을 「나약한 비독일인」으로 낙인찍던 시대에 하르덴이 그 비난을 궁정의 동성애자들에게 되돌린 역사적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d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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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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