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벤베르크 서클
Liebenberg circle
1886~1907년 빌헬름 2세를 둘러싼 가까운 벗들의 모임.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의 브란덴부르크 영지 리벤베르크 성에서 이름을 땄다. 남성들만의 동성애적 분위기가 감돌던 사교 모임이자 비공식 정치 영향력의 통로로, 오일렌부르크 사건으로 무너졌다.
상세
1886년 사냥 모임에서 오일렌부르크를 만난 빌헬름 왕자는 그해부터 해마다 리벤베르크를 찾았다. 명목은 사냥이었지만 실제로는 부모와 궁정에서 얻지 못한 정서적 온기를 찾아서였고, 1888년 즉위한 뒤에는 긴장을 푸는 휴식처가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음악을 했으며, 오일렌부르크는 「음유시인」, 황제는 「귀염둥이」로 불렸다. 이야기는 교양 있는 대화에서 음담패설까지 오갔고, 일부 구성원의 동성애 성향은 오늘날 사실로 여겨진다. 측근들은 황제의 요트 호엔촐레른호를 타고 노르웨이 피오르를 도는 「북방 항해」에도 동행했다.
주요 구성원은 오일렌부르크와 그 동생 프리드리히 보토, 리하르트 추 도나슐로비텐, 군사 내각 수장 디트리히 폰 휠젠헤젤러와 궁정 극장 총감독인 동생 게오르크, 베를린 위수 사령관 쿠노 폰 몰트케, 에밀 폰 슐리츠 겐안트 폰 괴르츠, 뷔르템베르크 공사 악셀 폰 바른뷜러였다. 오일렌부르크가 총리로 밀어준 베른하르트 폰 뷜로도 이 모임과 이어져 있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국가의 요직을 맡지 않았고 오일렌부르크도 비정치적 인물로 여겨져 영향력은 비공식에 머물렀지만, 존 뢸 이후 일부 역사가는 오일렌부르크를 1890년대 황제 「친정」의 주된 설계자로 본다.
대외 강경파 언론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은 1905년 1차 모로코 위기에서 독일 외교가 실패한 것이 이 모임이 황제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물러서게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1906년부터 구성원들의 동성애를 폭로하는 공격을 벌였다. 누가 하르덴에게 정보를 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스마르크를 따르던 외무부의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이 거론되고, 역사가 페터 빈첸은 오일렌부르크가 자신의 교체를 꾀하자 뷜로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고 본다. 재판이 이어지던 1908년 11월, 휠젠헤젤러는 황제를 위한 사냥 모임의 저녁 여흥에서 발레 치마 차림으로 춤추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장교단 「정화」를 지휘하고 있었고 오일렌부르크의 뚜렷한 반대자로도 꼽혀, 이 모임의 구성원으로 볼지는 자료마다 다르다. 군은 사인을 감췄다. 재판들은 유죄 판결 없이 끝났지만 황제는 벗들을 버렸고 모임은 흩어졌다. 황제는 국내에서 「평화로운 빌헬름」,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았고, 사건은 동성애에 관한 공적 논의를 처음으로 끌어내는 동시에 「박해의 유행」이라 불릴 만큼 동성애 혐오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