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지 《미래》로 빌헬름 2세의 측근을 공격해 오일렌부르크 사건을 일으킨 언론인
1906년부터 오일렌부르크와 쿠노 폰 몰트케를 동성애자로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독일 제국 최대의 추문과 재판 사태를 일으켰다.
베를린의 유대인 비단 상인 집안에서 펠릭스 에른스트 비트코프스키로 태어난 언론인·비평가. 배우와 연극 비평가를 거쳐 1892년 주간지 《미래》를 창간해 1922년까지 펴냈다. 비스마르크를 숭배한 강경파로, 1906년부터 빌헬름 2세의 측근 오일렌부르크와 쿠노 폰 몰트케를 동성애자 「카마릴라」로 공격해 오일렌부르크 사건을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 중 전쟁 비판으로 돌아섰고 혁명 뒤에는 사회주의 쪽에 섰다. 1922년 극우파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은 뒤 잡지를 접고 스위스로 물러나 1927년 그곳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펠릭스 에른스트 비트코프스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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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1922
독립 활동대표
이념·선전
관련 역사 사건
《미래》와 오일렌부르크 사건 이후
열두 살에 아버지의 강요로 김나지움을 떠나 1874년부터 배우 수업을 받고 떠돌이 극단에서 활동했다. 1878년 개신교로 개종했고, 1884년부터 여러 신문의 연극 비평가로 일하며 정치 글도 썼다. 1889년 극단 「자유 무대」를 공동 창립했다. 1892년 창간한 《미래》를 거의 혼자 채우며 「가장 미움받고 가장 유명한 독일 작가」가 되었고, 성개혁가 헬레네 슈퇴커 같은 진보적 필자에게도 지면을 내주었다. 처음에는 군주제주의자이자 비스마르크 숭배자였으나, 빌헬름 2세의 측근 정치를 「카마릴라」로 보고 그 동성애적 분위기가 황제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공격했다. 그가 사적인 일을 법정에 끌어낸 데 실망한 카를 크라우스는 1907년 그와 결별하는 소책자를 냈다. 1차 세계대전 초에는 승리의 평화를 주장했으나 점차 전쟁 비판자가 되었고, 혁명 뒤 사회주의 쪽에 섰으며, 독일의 전쟁 책임을 인정해 베르사유 조약을 지지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1922년 7월 3일 베를린 그루네발트의 집 앞에서 민족주의 극우파 청년들에게 습격당해 머리에 여덟 군데 상처를 입었다. 그해 9월 30일 《미래》 마지막 호를 냈고 1923년 스위스로 물러났다. 그가 죽자 괴벨스는 「우리 방식으로 결판낼 기회를 빼앗겼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