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힐러

Kurt Hiller
독립 활동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85–1972 ○ 자연사

동성애자 권리와 혁명적 평화주의를 평생 주장한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의 독일 작가

1933년 평화주의자·사회주의자·유대인·동성애자로 나치에게 거듭 붙잡혀 콜룸비아하우스와 오라니엔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심한 학대를 받았다.

베를린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언론인. 1908년부터 25년 동안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9년 제2위원장이 되었다. 표현주의 문학의 선구자였고, 11월 혁명 때 정신노동자 정치평의회를 이끌었으며, 1919년 병역거부자 동맹을 세우고 「혁명적 평화주의」를 내걸었다. 1933년 나치 수용소에서 심한 학대를 받은 뒤 프라하와 런던으로 망명했다. 1955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위원회 재건과 제175조 폐지를 다시 시도하다 1972년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위원회, 표현주의, 혁명적 평화주의

베를린의 유대인 넥타이 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가 쪽 큰할아버지는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파울 징거였다. 1907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는데, 형법이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의 한 부분이었다. 1908년 히르슈펠트와 만나 25년 동안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표현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1909년 「새로운 클럽」을 세웠고 1912년 첫 표현주의 시선집 『콘도르』를 엮었다. 11월 혁명 때는 「정신노동자 정치평의회」 의장으로 지식인 엘리트가 의회와 권력을 나누는 「로고크라시」를 내세웠다. 1919년 병역거부자 동맹을 공동 창립했고, 독일 평화협회 좌파로서 소련의 레닌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평화주의가 소련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혁명적 평화주의자 그룹」을 만들어 자본주의 극복을 내걸었고, 무솔리니에 대한 찬탄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1928년에는 사회민주당에 실망해 공산당 투표를 호소했다. 1929년 히르슈펠트가 물러나자 위원회의 제2위원장이 되었다.

투옥과 망명

1933년 슈판다우 요새, 콜룸비아하우스, 브란덴부르크 교도소, 오라니엔부르크 강제수용소를 거치며 심한 학대를 받은 뒤 1934년 풀려나 프라하로 달아났고, 1935년 국적을 박탈당했다. 1938년 런던으로 옮겨 「자유 독일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웠다. 1955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1962년 위원회를 다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60년대 초에도 형법 제175조 폐지 청원을 냈다. 자신의 동성애는 80대에 쓴 자서전에서야 밝혔다. 1972년 함부르크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