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르슈펠트와 성과학 연구소를 세운 정신의학자로 모스크바 망명 중 숨진 정신치료의 개척자
1919년 성과학 연구소 개소 강연을 맡아 1926년까지 수석 의사로 일했고, 1927년 정신치료 자격으로 독일 최초의 샤리테 강사가 되었다.
베를린의 유대계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정신의학자·정신치료사. 1919년 히르슈펠트와 성과학 연구소를 함께 세워 7년간 수석 의사로 일했고, 이후 정신치료를 의학 안에 자리 잡게 한 「새로운 방향」 운동을 이끌며 샤리테의 첫 정신치료 강사가 되었다. 11월 혁명 때 프라이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에서 활약했고 사회주의 의사 협회 회원이었다. 1935년 망명해 스위스를 거쳐 모스크바 정신의학 연구소에서 일했고, 1941년 10월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다가오자 아내와 함께 목숨을 끊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연구소, 정신치료, 망명
할아버지가 유대교 회당 선창자였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 첫 책을 계기로 히르슈펠트와 알게 되었고, 쿠르트 힐러와 평생 벗이 되었으며 철학자 레오나르트 넬존의 서클에서 활동했다. 1912년 프로이트 이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책을 냈고, 표현주의 잡지에 시와 평론도 실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베르됭 전선의 군의관으로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고, 11월 혁명 때 프라이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1919년 성과학 연구소의 공동 창립자이자 조직자로 7년을 일하며 개소 학술 강연을 맡았고, 1924년 교과서 『정신치료』를 냈다. 1926년 개업한 뒤 1927년 정신치료 자격으로 독일 최초의 샤리테 강사가 되었다. 1926년부터 사회주의 의사 협회 회원이었고, 1931년 트로츠키의 맏딸 지나 볼코바를 치료했으며, 1932년 히틀러가 제기한 명예훼손 재판에 감정 증인으로 나섰다. 나치 집권 뒤 교수 자격을 빼앗기자 1935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1936년 추방 압박 속에 모스크바 신경정신의학 연구소로 옮겨 인슐린 쇼크 요법을 도입했으며 1937년 소련 국적을 얻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나치 지도자들을 「퇴화자」로 묘사한 소책자를 썼고, 10월 16일 모스크바 전투 초기에 아내 리디아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숨졌다. 러시아에서는 오늘날까지 정신의학의 고전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