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유아 성욕의 이론으로 정신분석을 세운 오스트리아의 의사
1933년 나치 분서에서 그의 책은 「영혼을 해체하는」 것으로 불태워졌고,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뒤 런던으로 망명해 이듬해 숨졌다.
모라비아 프라이베르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빈에서 자란 의사·정신분석의 창시자. 1885년 빈 대학 사강사가 되고 파리의 샤르코에게 배운 뒤 1886년 개업했다. 1895년 브로이어와 『히스테리 연구』를 쓰고 1899년 『꿈의 해석』, 1905년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로 무의식과 유아 성욕의 이론을 세웠다. 1902년 수요 모임에서 정신분석 운동이 시작되었고, 아들러·융·라이히가 차례로 그와 갈라섰다. 만년에는 죽음 충동론과 『문명 속의 불만』(1930)으로 문화를 논했다. 1938년 병합 뒤 런던으로 망명해 1939년 숨졌다.
다른 이름: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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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939
독립 활동대표
과학·기술
정신분석의 탄생에서 망명까지
갈리치아 출신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모라비아 프라이베르크(오늘날 체코의 프르지보르)에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로 태어났고, 어려서 가족을 따라 빈으로 옮겼다.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85년 9월 빈 대학 사강사가 되었으며, 곧바로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장마르탱 샤르코에게서 반년 동안 배웠다. 1886년 4월 개업해 히스테리를 최면으로 치료하던 요제프 브로이어와 함께 1895년 『히스테리 연구』를 냈고, 1899년 『꿈의 해석』으로 무의식 연구의 바탕을 놓았다. 1905년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어린 시절의 성적 갈등과 외상이 신경증을 낳는다는 생각을 펼쳐 의학계의 오랜 냉대를 받았다. 1902년 가을부터 그의 집에서 열린 수요 심리학 모임이 세계 정신분석 운동의 시작이 되었으나, 먼저 알프레트 아들러가, 이어 후계자로 여겼던 카를 구스타프 융이 자기 학설로 떨어져 나갔다. 1920년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반복 강박」과 「죽음 충동」을 내세웠고 1923년 『자아와 이드』에서 이드·자아·초자아의 구조 모형을 세웠다. 1927년 『환상의 미래』로 종교를 비판했고, 1930년 『문명 속의 불만』에서 성 충동의 승화를 현대 문명의 바탕으로 보았다. 1932년에는 국제연맹의 제안으로 아인슈타인과 「왜 전쟁인가?」를 주고받았다. 그가 성 에너지의 승화를 권한 데 맞서 오르가슴만이 참된 충족이라 본 빌헬름 라이히는 죽음 충동론도 거부했고, 1934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다. 1935년 동성애자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 보낸 답장에서 그는 동성애가 장점은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일도, 악덕도, 타락도 아니며 병도 아니고, 그것을 범죄로 처벌하는 것은 큰 불의이자 잔인함이라고 썼다. 1933년 5월 나치 분서에서 그의 책은 「영혼을 해체하는」 것으로 불태워졌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뒤 게슈타포가 딸 안나를 연행했고, 그는 6월 런던으로 망명했다. 빈에 남은 네 누이는 출국 비자를 얻지 못해 모두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1923년부터 앓던 구개암이 깊어진 그는 1939년 9월 21~22일 주치의 막스 슈어가 투여한 모르핀으로 23일 런던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