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폴을 세워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이으려 한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가
1931년 베를린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 제국연맹」(섹스폴)을 세웠으나,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로 공산당에서, 1934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정신분석가·정신과 의사. 빈 대학 의학부에서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었고 성격 분석을 발전시켰다. 1927년 빈에서 노동자를 위한 무료 성 상담소를 열었고, 1930년 베를린으로 옮겨 공산당에 들어가 1931년 섹스폴을 세웠다.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로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그해 나치의 분서로 책이 불탔으며, 1934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다. 덴마크·노르웨이를 거쳐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르곤」 연구로 나아갔고, 법원 명령 위반으로 수감되어 1957년 옥중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에른스트 파렐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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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57
독립 활동대표
과학·기술 -
–1930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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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3
사회운동·조직
관련 역사 사건
빈의 상담소에서 섹스폴과 망명까지
갈리치아 도브자우에서 지주 레온 라이히의 맏아들로 태어나 부코비나의 농장에서 자랐다. 부모는 유대계였지만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을 피해 농장을 버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들어가 1918년까지 복무했다.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동기 오토 페니헬이 연 성 세미나를 계기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 눈떴고, 1920년 학생 신분으로는 이례적으로 빈 정신분석협회 회원이 되었다. 1922년 의학 박사가 되어 1930년까지 빈 정신분석 외래진료소에서 일했고, 1924~1930년 정신분석 치료 세미나를 이끌며 저항 분석에서 성격 분석으로 나아갔다. 1926년 프로이트에게 헌정한 『오르가슴의 기능』에서 모든 정신 질환이 성적 체험 능력의 장애와 이어진다고 보았고, 프로이트와 달리 성 억압을 「문화적 필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일찍부터 그와 갈등을 빚었다. 1927년 7월 15일 빈 법원 방화 사건을 겪은 뒤 급진화해 사회민주당원으로 남은 채 몰래 오스트리아 공산당에 들어갔고, 노동자 환자를 위한 무료 성 상담소 여섯 곳을 열어 정신분석 상담과 마르크스주의 조언과 피임 도구를 함께 제공했다. 1930년 1월 사회민주당에서 제명되었다. 1929년 아내와 소련으로 강연 여행을 다녀왔고, 1930년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1931년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 제국연맹」, 곧 섹스폴을 세웠다. 당이 소책자 『청년의 성적 투쟁』의 출간을 미루자 직접 성정치 출판사를 차렸고, 『성 강제 도덕의 침입』(1931)에서 엥겔스를 이어 성 억압의 기원을 밝히려 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에서는 권위주의적 가족과 교회를 통한 충동 억압이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토대라고 분석했다. 1933년 3월 2일 나치 기관지가 그의 책을 공격하자 이튿날 망명했고, 그해 『파시즘의 대중심리』 때문에 공산당에서 제명되었으며, 5월 10일 분서에서 그의 책도 불탔다. 1934년 8월 말 루체른 정신분석 대회에서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도 쫓겨났다. 같은 해 5월 코펜하겐에서 「정치 심리학과 성경제학 잡지」를 창간했고, 덴마크 체류 허가를 잃자 오슬로로 옮겼다. 『문화 투쟁 속의 성』(1936)에서는 스탈린 아래 소련의 후퇴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39년 8월 실험실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자신이 「오르곤」이라 부른 생물학적 에너지를 연구했으나, 그 존재는 제자들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1955년 법원은 오르곤 축적기 사용 금지와 그의 책 폐기를 명령했고, 1956년 법정 모독죄로 2년 형을 받았으며 그해 여름 그의 출판물 6톤 넘게가 법원 명령으로 불탔다. 1957년 3월 수감되어 11월 3일 루이스버그 연방교도소에서 심부전으로 숨졌다. 「성혁명」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으로도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