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폴
Sex-Pol
빌헬름 라이히가 1931년 가을 독일 공산당 산하에 세운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 전국연맹」과 그 뒤를 이은 운동. 노동자 성 상담소를 열고 혼인·중절법 개정과 성교육을 요구하며, 개인의 성적 고통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한다고 알리려 했다. 당내 반발로 1933년 초 해산되었고, 라이히가 망명지에서 낸 잡지를 중심으로 1939년까지 느슨한 모임으로 남았다.
상세
「섹스폴」은 성정치(Sexualpolitik)의 줄임말이다. 그 앞에는 1927년 빈에서 라이히가 노동계급을 위해 연 무료 성 상담소 여섯 곳이 있었다. 상담소마다 의사가 책임을 졌고 산과 의사 셋과 변호사가 대기했으며, 정신분석적 상담과 마르크스주의적 조언과 피임 도구를 함께 주었고, 청년과 미혼자에게도 성적 허용을 주장해 다른 정신분석가와 좌파를 놀라게 했다. 이동 상담소를 몰고 공원과 교외를 돌았고 성교육 소책자를 집집마다 돌렸다.
빈에서는 「건강한」 숙련 노동자의 성을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거친」 성과 구별하던 소(小) 카를 카우츠키 중심의 사회민주당원들과 다퉜다. 라이히는 1930년 11월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31년 가을 지역의 성개혁·성혁명 단체들을 하나의 「강령」으로 묶어 연맹을 세웠다. 강령은 혼인과 중절을 규율하는 법의 개정, 수감자의 귀휴, 성매매 근절 등을 요구했고, 지역 기관지 《디 바르테》를 연맹지로 삼았다. 섹스폴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권위주의 체제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성적인 곤궁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며 사회주의에서 차츰 사라질 것이라고 알리려 했다.
질투와 가족 구조에 반대했고, 자위와 피임을 알렸다. 1932년 베를린의 성정치 출판사는 라이히의 『성도덕의 침입』과 『청년의 성적 투쟁』, 아니 라이히의 아동·부모용 성교육 소책자를 냈다. 섹스폴은 일상의 문제로 정치에 무관심한 층을 끌어들였지만, 당내에서는 「라이히는 우리 체육관을 사창가로 만들려 한다」는 반발이 거셌고, 당은 먼저 라이히의 책 보급을 멈춘 뒤 연맹을 해산했다. 라이히는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낸 뒤 그해 가을 당에서 제명되었다.
당 안의 섹스폴은 1년 남짓 반발 속에 세워지다 1933년 초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졌고 당사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1934년부터 라이히가 에른스트 파렐이라는 필명으로 스칸디나비아 망명지에서 낸 《정치심리학·성경제학 잡지》가 섹스폴의 주된 활동이 되었다. 1933~1939년 섹스폴은 여러 나라의 망명 좌파,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프롤레타리아 자유사상가」들이 정식 조직 없이 라이히의 분석에 공감하며 모인 느슨한 집단이었고, 스페인 내전 소식도 잡지에 보냈다. 미셸 푸코는 1976년 『성의 역사』에서 섹스폴의 성 억압 가설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