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공산당
Communist Party of Austria
1918년 11월 3일 세워진 오스트리아의 공산주의 정당. 제1공화국에서는 의석이 없는 작은 당이었으나, 1933년 금지된 뒤 지하로 들어가 나치 지배 아래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반파시즘 저항 세력이 되었다. 1945~1959년 국민의회에 의석을 두고 전후 첫 정부에 참여했으며, 오늘날에도 주의회에 진출해 있다.
상세
오스트리아 공산당은 1918년 11월 3일, 1차 세계대전 말 연합국의 해상 봉쇄로 생필품이 모자라 1918년 1월 총파업 같은 노동자 항의가 번지던 가운데 노동운동 좌파가 세웠다. 루트 피셔, 카를 슈타인하르트, 프란츠 코리초너, 뤼시앵 로라 등이 창립에 참여했고, 1920년까지는 「독일오스트리아 공산당」이라 했다. 러시아·독일과 달리 평의회는 빈과 오버외스터라이히 공업 지대에서만 뿌리내렸고, 1918년 11월 12일의 쿠데타 시도는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1918~1919년의 몇 차례 무장 봉기 시도는 일부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지원을 받았다.
제1공화국에서 오스트리아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를 한데 묶은 탓에 의회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했고, 분파 투쟁으로 크게 약해졌다. 1920년대 들어 민주집중제와 당 규율을 강화해 1920년대 말에는 분파 싸움을 넘어섰고, 1924년부터 소련 볼셰비키의 이념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1920년대 말 사회민주주의를 「사회 파시즘」으로 낙인찍는 스탈린의 노선에는 자주 동의하지 않았다. 빈의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는 1927년 7월 15일 빈 법원 방화 사건을 겪고 급진화해 몰래 오스트리아 공산당에 들어갔고, 겉으로는 사회민주당원으로 남았다가 1930년 1월 공산당을 위한 분열 활동을 이유로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났다.
1933년 돌푸스의 오스트리아 파시즘 정부는 긴급 명령으로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금지했지만, 당은 지하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34년 2월 12일 공화국 수호동맹이 일으킨 노동자 봉기에 가담했고, 봉기가 진압된 뒤 실망한 사회민주당원들이 몰려와 당원이 4000명에서 1만 6000명으로 늘었다. 알프레트 클라르의 이론에 따라 오스트리아 민족이 독일 민족과 다르다고 보아 1938년 3월 병합 때 독립 오스트리아를 내걸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 뒤 창립 당원 코리초너 같은 망명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나치에 넘겨지기도 했다. 나치 지배 아래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반파시즘 저항 세력이 되어, 4000명 넘는 당원이 갇히고 중앙위원 13명을 포함해 200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속에 카를 레너의 임시정부에 들어가 의장 요한 코플레니히가 부총리가 되었으나, 그해 11월 총선에서 5.4%에 그쳤다. 1947년 마셜 계획을 둘러싸고 정부에서 물러났고, 1950년 대규모 총파업을 이끌다 실패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비판하지 않아 당원이 대거 떠났고, 1959년 국민의회에서 의석을 잃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을 처음엔 비판했다가 1971년 소련 노선으로 돌아섰고, 이를 「탱크 공산주의」라 비판한 에른스트 피셔를 제명했다. 1994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었고, 2005년부터 슈타이어마르크, 2023년부터 잘츠부르크 주의회에 의석을 두고 있다.